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1996년 중앙일보 당선작

문근영 2015. 3. 31. 03:11
심사평 : 정현종 , 황지우


'퓨즈가 나간 숲'을 시인 한혜영의 처녀림으로 기록하는 기쁨을 우리는 함께 나눈다. 그의 다른 시들에서도 우리는 그가 맑고 섬세한 시혼을 타고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섬세함은 "쌈지돈마냥 숨겨둔 사랑의 잎새 하나만 있어도 가슴은 이리 훗훗한 그리움이다."와 같은 미세화의 무늬를 그린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슬하슬하다. 감상주의의 반점들이 그 무늬 위에 번져 있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이런 류의 시를 몇 편 더 쓰다 말지도 모른다는 점에 대한 우리의 우려에 반격을 가하는 것은 앞으로 순전히 그의 몫이다.
 

당선시 : 퓨즈가 나간 숲

 
 
한혜영
충남 서산 출생, 1996년 현재 미국 거주

 
 
퓨즈가 나간 숲
 

퓨즈가 나간 숲은 깜깜하다. 나무 꼭대기 새집조차 어둡다. 길이란 길은 모두 지워지고 온전한 것이 있다면 푸르던 기억 에 항거하는 단단한 그리움이다.
한 계절 사랑의 불 환하게 밝혔던 나무들, 열매들, 그리고 새들, 그 사랑의 흔적을 죄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물론 그냥 상처다. 이 겨울의 어둠 아니 한줄기 빛을 참고, 그래 빛이야 말로 얼마나 많은 것들에게 상처가 되었나, 눈부신, 찬란한, 아름다운 따위의 형용사와 눈이 맞아 저지른 빛의 횡포, 가지 마다 넘치는축복인 양 위선의 잎새 덕지덕지 달아주며 오늘의 상처를 마련했었다. 누구라도 헛발 자주 내딛고 나뒹굴던 시절, 쌈짓돈 마냥 숨겨둔 사랑의 잎새 하나만 있어도 가슴은 이리 훗훗한 그리움이다.
어딘가에 한 뭉치 퓨즈가 분명 있을 것이다. 계절과 계절의 끈을 잇고 명치 끝을 꾸욱 누르면 혼곤한 잠의 머리 절레절레 흔들며 숲은 그날처럼 홀연히 일어날 것이다. 때문에 새들은 이 겨울 떠나지 않고 하늘 받들어 빈 숲을 지키고 있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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