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색이 선비라면 한가지의 재예(才藝)는 지녀야합니다. 그 재예가 정(精)하여 전문적인 저서 한권이라도 남겨야 세상을 살고 갔다는 흔적이 남겨진다는 것이 다산의 주장입니다. 중국 전한(前漢)의 사마천은 기전체(紀傳體)의 효시인 『사기(史記)』라는 불후의 통사인 역사책을 남겼습니다. 『사기』의 구성도 재미있게 되어있습니다. 제왕의 연대기인 본기(本紀) 12편, 제후왕을 중심으로 한 세가(世家) 30편, 역대 문물제도의 연혁에 관한 서(書) 8편, 연표인 표(表) 10편, 시대를 상징하는 뛰어난 개인의 활동을 다룬 전기인 열전(列傳) 70편, 총 130편으로 구성했습니다.
열전의 첫머리에는 도덕적 인간의 상징인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열전을 싣고 마지막에 이(利)를 쫓는 상인의 열전인 「화식열전(貨殖列傳)」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최고의 도덕성에서 시정잡배의 이욕에 이르는 대서사시가 다름 아닌 사기열전입니다. 이런 「화식열전」을 독실하게 연구하여 자세한 주석을 단 선비가 있었으니 바로 다산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의 막역한 친구이던 경기도 양평출신 동산(東山) 정량흠(鄭亮欽)이라는 사람입니다.
다산의 글 「발동산자화식전주(跋東山子貨殖傳注)」라는 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화식전주』 1권은 동산처사 정량흠이 편찬한 책이다. 정공(鄭公)은 성품이 침후(沈厚)하고 학식이 넓고 높아 정승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분으로 기대를 받았으나 지평(지금의 양평)의 산속에 숨어살다가 끝내는 포의(布衣)로 세상을 마쳤으니 알 만한 사람은 애석하게 여겼다. 유독 우리 아버님과 잘 지내셔 지나실 때마다 담론을 즐기셨다. 전에 자신의 편찬서인 『화식열전주』를 아버님께 보여주시자, 바로 한권을 베껴두게 하였다. 마침 병진(丙辰:1796)년 내가 규영부(奎瀛府)에서 책을 교정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정조대왕께서 『사기』에 관한 모든 주(注)를 널리 구하고 계신 때였다. 「화식열전」에 대하여는 특별히 더 관심을 두고 주(注)를 구하던 때여서 정공의 주석서가 마침내 채택될 수 있었다. ‘아아! 선비가 한 가지 재예에 정통함이 있기만 하다면 끝내는 한차례 이름을 날리게 된다.’ (嗟乎 士苟有一藝之精 終有一顯), 후학들이여! 그런 점에 힘쓸지어다.” (다산의 글 전문)
세상에 많기도 많은 학자들, 한 가지 재능에라도 정통한 학식을 지녔나를 점검해봅시다. 권력으로부터 채용(採用)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그 많은 폴리페서들, 산골에 숨어살던 이름 없는 선비가 국가에서 간행하는 책의 중요 자료로 채택되었다는 정처사(鄭處士)의 이야기를 잊지 맙시다. ‘일예지정(一藝之精)’ 이라도 있을 때에만 채용된다는 점도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