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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18) - 투명한 시어가 엮어내는 내밀한 풍경

문근영 2014. 5. 5. 10:18

투명한 시어가 엮어내는 내밀한 풍경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18)
 
홍일표

주사위

                                       이정란
 
너는 허공을 입방체로 뭉쳐 높이 던진다
나는 숨겨두었던 사다리의 날개를 펼친다
너와 난 공중에서 부딪혀 12각형의 별이 된다
우린 그 별을 복사해 만든 게임으로
서로에게 도박을 걸지도 모른다
 
어둠과 햇살을 가장 단순하게 만든 네 안에
규칙은 없다
 
6의 발바닥에서 해를 보는 1
1이라고 말하고 싶은 2
날개가 곤충의 불행인 것을 믿는 3
3의 노래로 타래를 만들어 동굴을 파는 4
매일 눈동자를 갈아 끼우며 남의 서가의 책을 즐겨 읽는 5
알고 있는 것들의 영혼을 다붓다붓 의인화시키는 6
 
6이 모르고 지나간 영혼은
온몸을 검게 칠하고
어긋난 모서리들 속으로 스며든다
그럴수록 너는 더욱 부드럽게 팽창한다
육면체 속 알 수 없는 뭉클거림을
허공으로 높이 던지는 순간
네 몸은 투명해진다 애당초
 
나는 너를 본 적이 없다
 
 

호주머니 속에서 악어를 찾아내는 것이 시다. 강인한 시인은 「호주머니 속 악어」를 발견하여 동물원에 거액을 받고 팔아넘겼다는 소문이 있다. 나는 잘 생긴(?) 그 악어를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만한 돈을 받을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본다. 그런데 최근에 이정란 시인의 시에서 악어 비슷한 놈을 보고 내심 기뻐한 적이 있다.
 

이 시인은 새로운 시의 영토를 개간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녀의 시는 단정하고 빈틈이 없이 잘 갈무리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구조적 안정감과 섬세한 시어로 드러나는 정서의 조밀함이 그녀의 시를 신뢰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주사위」는 이정란 시인에게 새로운 도전이다. ‘허공’을 던지고 ‘숨겨두었던 사다리의 날개’를 발견하는 화자는 ‘별’ 의 영역에 당도한다. 거기에 어떠한 ‘규칙’도 없다. 다만 여섯 가지의 존재태가 제시된다. 새로운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시선들이 정교하게 살아 움직인다. 4연에 이르러 비로소 화자의 목소리가 구체화되고 명료해진다.
 
이 시에서 ‘6’은 ‘알고 있는 것들의 영혼을 다붓다붓 의인화시키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름을 얻지 못한 무명의 사물들은 ‘어긋난 모서리’ 속으로 사라진다. ‘육면체’ 속에서는 존재성을 획득하지 못한 것들이 꿈틀거리고, 화자는 그것을 허공에 던진다. 그 순간 주사위는 투명해지고, 화자는 처음부터 ‘너를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이름을 얻은 존재이거나 이름을 얻지 못한 존재이거나 모두 ‘허공’의 다른 이름이었던 셈이다. 결국 삶이라는 놀이는 ‘별을 복사해 만든 게임’이었던 것이다. 시적 사유의 단서가 된 주사위라는 사물에서 시인이 포착한 삶의 내밀한 풍경이 오래 시선을 머물게 하는 시다. 사유가 표층에 어룽거리다가 그냥 사라지는 시들은 1회성의 울림으로 끝나지만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장력이 강한 시들은 여러 번 곰곰 되짚어보게 되고 그때마다 다른 맛과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고루한 시작법에 얽매이다 보면 구조와 내용에 집착하게 되고 그 집착이 시를 경직되게 한다. 동맥경화에 간경화까지 불러오게 되면 시는 끝장이다. 시의 마지막에 가서 메시지에 발목 잡히지 않고 뒤통수를 쳐서 흠칫 놀라게 하거나 슬그머니 종적을 감추어버리는 것이 한 방법인데 이정란 시인은 눙치고 상큼하게 돌아서는 방법을 잘 터득하고 있는 시인이다.
 

최근 그녀의 시가 달라지고 있다. 그 조짐은 이미 지난 번 시집에서부터 나타나긴 했지만 연대기적 시간을 폭파시켜 새로운 상상의 공간으로 진입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시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만큼 시의 걸음새가 사뭇 활기 있고, 보폭은 시원해졌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조만간 그녀의 치마폭 안에서 잘 생긴 사자 한 마리 뛰쳐나올 것이고, 아울러 ‘아름다운 표면’ 을 위해 ‘무서운 깊이’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그 사자의 판매가의 절반은 술값으로 내놓을 것이라고.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한국시인협회 기획위원)

 

-'문화저널21' 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우가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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