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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통과 현대, 경험과 상상 - 정연희 시집 『호랑거미 역사책』/ 이은봉

문근영 2014. 5. 2. 10:32

전통과 현대, 경험과 상상

   ―정연희 시집 『호랑거미 역사책』(종려나무, 2010)

 

 

   이은봉

 

 

   정현희의 시는 감각적이면서도 주지적이고, 주지적이면서도 감각적이다. 서정에 기초해 있으면서도 지성에 기초해 있고, 지성에 기초해 있으면서도 서정에 기초해 있다. 감각적 이성과 이성적 감각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 그의 시이다. 이처럼 그의 시는 이런저런 요소들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특징, 곧 양가성은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이고, 현대적이면서도 전통적인 데서 좀 더 잘 징험이 된다. 물론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이고, 현대적이면서도 전통적이라는 것은 그의 시에 전통성과 현대성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 그의 시는 전통과 현대라는 양가성이 복잡한 운산을 통해 매우 세련되게 드러나 있다.

 

   그의 시와 함께 하고 있는 전통적인 면들은 어휘의 차원만으로도 익히 확인이 된다. 전통적인 사물들이나 존재들을 표상하고 있는 두루마리, 막내고모, 명주실, 부채, 대금가락, 검지, 무명지, 진양조, 두견주, 초승달, 만월, 꽃상여, 돌확, 꽃살문, 제삿날, 창호지, 귀얄, 호박넝쿨, 연밥, 드므 등의 어휘들이 그의 시의 한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사물들이나 존재들을 표상하고 있는 이들 어휘들이 그의 시로 하여금 전통적 서정을 갖도록 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의 시가 전통적 서정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수도 없이 등장하는 鳥獸草木之名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일찍이 공자는 『論語』 「陽貨」篇에서 『詩經』의 시들이야말로 鳥獸草木之名을 많이 알게 해준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鳥獸草木之名이 많이 등장하는 시는 그 자체로 『시경』의 시들과 가깝다는, 곧 전통적 서정과 가깝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는 그의 시의 鳥獸之名, 곧 동물의 이미지로는 새조개, 호랑거미, 딱정벌레, 부나방, 휘파람새, 꼬리명주나비, 두견, 다람쥐, 토끼, 고라니, 호박벌, 칠성무당벌레, 자벌레, 별박이자나방, 멧새, 비탈거미, 비단잠자리, 흑두루미, 사슴벌레, 별점개구리, 동고비, 올챙이, 사마귀, 박각시, 황소, 꽃사슴, 참벌, 낙타 등을 예로 들 수 있고, 草木之名, 곧 식물의 이미지로는 층층나무, 백일홍, 봉숭아, 해바라기, 갈대, 물푸레나무, 할미꽃, 열무, 개복숭아, 돌배나무, 갯버들, 검팽나무, 떡갈나무, 느타리, 귀심초, 굴참나무, 호박꽃, 홍벚, 붉은구상나무, 감탕나무, 산국, 배롱나무, 소나무, 분꽃, 채송화, 맨드라미꽃, 감나무, 삼나무, 느티나무, 고욤나무, 사시나무, 단풍나무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 예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그의 시에는 매우 많은 鳥獸草木之名이 등장한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미처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다양한 동물들의 이름, 식물들의 이름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그의 시이다. 이는 무엇보다 그의 시가 전통적 서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면은 호수, 고향, 물푸레나무, 마음, 우듬지, 발길, 들길, 산길, 휘파람새 등 토착적 서정의 울림을 담고 있는 시어들로 이루어져 있는 다음의 시를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이 된다.

 

안동댐 호숫가에서 수몰된 고향을 들여다본다

마당가에 두고 온 물푸레나무

 

잠긴 물푸레나무 우듬지 위로 나와 있다

나무는 조금씩 제 중심부로 내려가고

내 마음도 그 나무 곁으로 바싹 다가가 손을 뻗으면

호수 한가운데

물푸레나무에게 건너갈 수 있겠다

저 나무를 타고 내려가면

너와 내 발길이 오래 닿았던 들길이며 산길을 다시 밟을 수 있겠다

 

물푸레나무에 앉은 휘파람새

그림자 가물거린다

휘파람새와 내 거리가 멀 듯

너와 나 사이도 수몰되어 아득하다

나무를 떠난 휘파람새 내 머리에 앉으려는 듯 맴돌아

돌아보니 내가 물푸레나무였다

 

수몰 때 고향에 두고 온

물푸레나무 한 그루 내 마음에 이미 뿌리내렸다

―「그때 내가 물푸레나무라는 걸 알았다」 전문

 

   이 시는 결구에 해당하는 제4연에 초점이 있다. “수몰 때 고향에 두고 온/물푸레나무 한 그루”와 하나가 되고 있는 “내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제4연이기 때문이다. 이 시의 제4연은 대상에게로 투사되는 동일성, 곧 “물푸레나무 한 그루”라는 타자에게로 전이되는 동일성을 담고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물푸레나무 한 그루”라는 객체와 하나가 되는 동일성을 담아내고 있는 만큼 이 시에서 극적 정서가 아닌 서정적 정서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물론 이때의 서정적 정서는 대립의 정서, 갈등의 정서가 아니라 조화의 정서, 사랑의 정서, 연민의 정서를 가리킨다.

 

   하지만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이들 서정적 정서가 결코 회고적이거나 퇴행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회고적이거나 퇴행적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오히려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이 그의 시의 서정적 정서라고 해야 옳다. 그의 시의 서정적 정서가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당연히 현대적인 아우라가 느껴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의 시의 전통적 서정이 현대적인 아우라를 갖게 되는 까닭 역시 기본적으로는 어휘의 차원에서 확인이 된다. 현대적인 분위기를 살려내기 위해 수많은 외래어를 과감하게 응용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의 시에는 다양한 외래어가 도처에서 응용되고 있다. 히프노스, 올리브, 아라크네, 도로시 랭, 칼래, 리기다, 메타세콰이어, 패치워크, 포크레인, 샤콘느, 아치, 루나, 파도하프, 앵글, 렌즈, 블라우스, 위미르, 스트라디바리우스, 플라밍고, 릴리라를린, 팬티스타킹, 파헤벨, 조지 윈스턴, 클릭, 잭과 로즈, 에르바르트 뭉크, 오버랩 등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이처럼 현대적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해 다양한 외래어들을 응용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이다. 이들 외래어는 그 자체로 그의 시에 현대성을 강화시켜준다는 점에서 일단 관심을 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현대성이 현대성 자체에 그쳐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에서는 끊임없이 지성을 불러내는 가운데 획득되는 것이 현대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지성은 앞에서 말한 바 있는 감각적 이성과 이성적 감각의 동시적 작동을 가리키기도 한다.

 

   때로는 외래어만이 아니라 외국어, 곧 영어가 직접 수용되기도 하는 것이 그의 시이다. Paso doble, Vitali Chaconne, Shostakovich 등이 그 실제의 예이다. 그의 시에서는 이들 영어도 지성을 강화시키는 데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강화되는 지성의 경우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얼마간은 변형된 속물성으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대화에 영어를 섞어 말해 지성을 드러내려는 속셈, 그러한 속물성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변형된 속물성은 과도하게 응용되어 있는 외래어에서도 그 혐의를 찾을 수 있다. 때로 지나친 이국취향은 낭만적 감상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는 지나친 노파심의 발로일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늘 구체적인 지식과 경험에서 비롯되는 정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정밀한 관찰은 그 자체로 그치지 않는다. 항상 활달한 상상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 그의 시에서의 정밀한 관찰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언제나 정밀한 관찰과 활달한 상상이 서로 겹쳐지고 뒤섞이는 가운데 표현되는 것이 그의 시라는 것이다.

 

멧새 한 마리,

울음소리 빈 들처럼 텅 비었다

먼 산 건너보는 어린 재구 눈을 닮았다

감탕나무에 앉은

작은 몸이 2월의 바람에 뒤집힐 것 같아

산국 같은 발가락 검은 나뭇가지 움켜쥐고 두 날개 퍼덕거렸다

꽁지를 올렸다 내렸다 수차례 겨우 균형을 잡았다

어미 새는 발치 아래에 배를 뒤집고 싸늘하게 식었다

아홉 살 재구는

큰엄마 옷자락 잡고 하룻길 왔다

사촌형 주먹질에 두 어깨가 움츠러든 작은 새,

추녀 끝에 숨죽여 울었다

형 앞에서 날개가 늘 접혀 있었다

작은 날개로 등짐을 날라

박사 형 대신 큰어머니 곁에서 선산을 지키고 있다

그 힘은

저 멧새의 볼품없는 짧은 꽁지에서 나왔다

―「꽁지의 힘」 전문

 

   이 시에는 “멧새 한 마리”와 “어린 재구”에 대한 관찰과 상상이 겹쳐지고 뒤섞여 있다. 관찰과 상상이 겹쳐지고 뒤섞이면서 독특한 서정을 만들고 있는 것이 이 시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들 대상에 대한 관찰과 상상을 이루는 구체적인 실재는 이미지와 이야기이다. 따라서 하나의 축에서는 “멧새 한 마리”와 관련된 장면이 펼쳐지고 있고, 다른 하나의 축에서는 “아홉 살 재구”와 관련된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고 해야 마땅하다.

 

“울음소리”가 “빈 들처럼 텅 비”어 있는 것이 “멧새 한 마리”이다. “꽁지를 올렸다 내렸다 수차례 겨우 균형을 잡”는 “멧새 한 마리”는 “먼 산 건너보는 어린 재구 눈을 닮았”는데, 이들 구절을 통해 “멧새 한 마리”는 “어린 재구”의 이미지 및 이야기와 겹쳐진다. 이처럼 이 시는 “멧새 한 마리”와 관련된 장면, 그리고 “어린 재구”와 관련된 장면이 상호 엇갈리면서 직조되고 있다. 각각의 장면이 상호 엇갈리면서 직조되고 있다는 것은 그것들이 끊임없이 겹쳐지면서 뒤섞이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 시는 이처럼 각각의 장면이 겹쳐지고 뒤섞이는 가운데 그 내포가 확장되는데, 이는 그의 시 일반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기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서시격인 「달의 흔적」은 물론 표제시격인 「호랑거미 역사책」 역시 두 가지 이상의 장면이 겹쳐지고 뒤섞이면서 그 의미가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장면 겹치기와 장면 뒤섞기야말로 그의 시를 이루는 가장 개성 있는 기법이라는 것이다.

 

   이들 장면 겹치기와 장면 뒤섞기를 통해 구체화되는 그의 시는 대부분 인물형상을 함유하고 있어 좀 더 주목이 된다. 물론 이는 겹치거나 뒤섞는 하나의 축에 인물형상이 자리해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위의 시 「꽁지의 힘」의 “아홉 살 재구”, 그리고 또 다른 시 「꽃밭의 독백」의 노모, 「명주실타레」의 막내고모, 「가라앉는 방」의 김 노인, 「붉은구상나무 요술장갑」의 사내, 「별박이자나방 애벌레」의 삼촌, 「강력접척제」의 k, 「명일동 산46번지」의 김 할머니 등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이들 인물형상은 기본적으로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존재, 소외되고 버려진 존재라는 점에서 시인 정연희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본래 시에서 장면의 선택, 곧 대상의 선택은 세계관의 선택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그의 시는 대상의 선택, 곧 인물형상의 선택을 통해 자신의 정신지향을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들 인물형상, 즉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연민이 그의 시를 이루는 정서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다름 아닌 이러한 점만으로도 한국 현대시사의 바른 맥락 위에 서 있다고 해야 마땅하다.

 

 

 

―『미네르바』(2010. 겨울호)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우가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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