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아! 서정시의 불행이여, 우리 시단의 재앙 됨이여 - 이경철

문근영 2014. 4. 27. 18:24

아! 서정시의 불행이여, 우리 시단의 재앙 됨이여 / 이경철
[유심프리즘]
[48호] 2011년 01월 10일 (월) 이경철 문학평론가

풍찬노숙(風餐露宿)하는 순수 서정시의 위의 

   

이경철
문학평론가

“그여코 내 손으로 화사집(花蛇集)을 내게 되었다. 내가 붓을 든 이후로 지금에 이르도록 가장 두려워하고 끄―리든, 이 시편을 다시 내 손으로 모아 한 권 시집으로 세상에 전하려 한다. 아― 사랑하는 사람의 재앙 됨이여!” 70년 전, 그러니까 정확히 소화(昭和) 16년 2월 10일 미당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을 남만서고에서 펴내며 발행인이 밝힌 말이다.

오장환 시인이 여기까지 쓰고 붓을 던진 말을 받아쓴 발문에서 감상원은 “시를 사랑하는 것은, 시를 생산하는 사람보다도 불행한 일이다.”라고 했다. 미당의 시에 매료된 오장환이 자신이 경영하던 남만서고에서 책을 내주겠다며 24편의 원고를 받은 것이 1938년. 그러나 운영난에 빠진 오장환을 대신해 남대문약국을 운영하던 감상원이 제작비를 대 4년 만에야 시집 한 권이 나오게 된 것이다.

아, 사랑하는 사람의 재앙 됨이고 시를 사랑하는 것은 불행한 일인가. 그 불행과 재앙은 지금도 여전한 것인가. 시집 한 권 내려 수년씩 기다리는 시인도 많고 그 줄에 끼지 못한 불쌍한 시인들은 또 기하련가. 시집 한 권 내기 이리 어려운데 순수시 잡지를 이어 내어가기란 또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삶의 아름다움과 시의 위의(威儀)를 지키기는 시지(詩誌)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진력(盡力)했다고 감히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때가 없지도 않습니다만, 그 풍찬노숙(風餐露宿)을 추호의 찡그림과 엄살이 없이 견디었다고 과연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부끄러움이 먼저 앞서고 있습니다. (중략) 시지를 만드는 일이란 제가 좋아서 미치지 않으면 전혀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현실적 여건이 냉혹할 정도로 따라와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까다롭기론 그야말로 비인간적일 정도인 시인들의 그 비의적 예술성 앞에서, 비판적으로는 그 아집과 아만 앞에서 손을 놓고 망연자실해야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음을 이 기회에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1969년 4월 전봉건 시인이 창간한 《현대시학(現代詩學)》을 1988년 7월부터 승계해 한 호의 결호 없이 펴내 500호를 맞은 정진규 시인이 2010년 11월호 권두언에서 밝힌 말이다. 외부 지원 없이 시의 진정성과 개결성에 대한 시인과 독자들의 의지로만 시 전문지를 500호까지 냈다는 데에 우선 경하드린다. 더불어 나 또한 이리 시를 사랑하는 민족의 한 성원이란 게 자랑스럽다.

“‘하늘엔 별 땅엔 꽃 사람에겐 시’ 계간 《시와시학》 20년, 그동안 부족한 《시와시학》을 사랑해 주신 문인, 후원회원 여러분, 그리고 애독자 여러분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 현대문학사상 최초로 계간 《시와시학》이 이번 호로 창간 20년, 통권 80호 최장수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여러분 한 분 한 분께서 지도편달해 주시고 물심양면 격려ㆍ성원해 주신 은덕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이에 여러분께 진심을 다하여 감사의 큰절을 올립니다.”

시 전문 계간지 《시와시학》을 창간, 20년간 한 호의 결호 없이 펴내온 김재홍 주간도 2010년 겨울호 권두언에서 이렇게 담담하게 소회를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제2 창간의 각오와 다짐으로 다시 새롭게 출발하겠다고 추호의 찡그림과 엄살이 없이 밝히고 있다.

아, 그러나 어찌 순수 시전문지 경영과 편집에 풍찬노숙의 추위와 고픔이 없었겠는가. 사석에서 시인들에게 털어놓던 그 비장한 각오 때문에 사람들 가슴엔 별인 듯 꽃인 듯 시가 떠나지 않고 있는 게 아니던가. 이들이, 순수 서정시인들이 풍찬노숙해야 하는 시절은 언제까지 계속돼야만 하겠는가.

소년배들이 이끈 우리 현대시 100년

시의, 인간의 순정한 마음속 강심수(江心水)로 흘러내리고 있는 순수 서정시에 대한 홀대는 언제까지 계속되어야만 옳겠는가. 우리 현대시 100년을 넘어, 이제 21세기도 그 10년을 넘어 두 번째 연대로 들어서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한번 우리 시 흐름의 대강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터.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무 것, 두려움 없어,
육상에서, 아무런, 힘과 권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서는.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부분

1908년 11월 육당 최남선 자신이 19세에 창간한 《소년》지에 발표한 〈해에게서 소년에게〉 한 부분. 이 시를 기점으로 우리 시는 고전시와 현대시로 갈린다. 이 시를 시작으로 우리 현대시사를 꿰고 있는 김윤식 씨의 글 〈1억 4천만 년 동안의 울림과 빛깔〉(《서정시학》 2010 가을호)이 역시 대가급 문학사가(文學史家)다운 넓은 안목을 지니고 있어 귀하게 읽힌다.

“육당의 꾐에 빠진 담 크고 순정한 소년배들의 청년배화 과정이 지난 세기 백 년 동안의 이 나라 시문학사의 궤적이라 할 때 그 앞에 놓인 대전제란 무엇이었을까. 청년배가 아닐 수 없소. 청년배란 새삼 무엇일까. 그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것의 은유가 아닐 수 없소. (중략) 당초 담 크고 순정한 소년배가 있었소.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 겁도 없이 바다를 건넜다가 날개 젖어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올 수밖에요. ‘허망한 정열’ 속에 들려온 것은 뻐꾸기 울음, 그 샤머니즘이었소.

이 블랙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혜가 요망되었던 것. 총명해야 했으니까. 1억 4천만 년에로 거슬러 올라가기, 거기서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기가 그 한 가지 방도. 다른 하나는, 인공물의 생태화 탄생이었던 것. 그렇다면 다음의 소년배는 어째야 할까.”

19세 소년 육당에게서 시작된 우리 현대시 100여 년은 소년배의 청년배화 과정이었다는 김 씨의 예의 문답식(問答式) 논지가 흥미롭다. 때리고 부수고 무너버리는 바닷가 담 큰 소년의 외침에서 시작된 우리 현대시는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에서처럼 수심(水心)을 몰랐기에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러다 순정한 소년 미당의 어찌해 볼 수 없는 뻐꾸기 소리의 샤머니즘에 빠졌다. 그러다 총명한 소년 최동호 시인의 정신주의로 빠져나왔다는 게 김 씨 논지의 대강으로 읽힌다.

“아가야, 네 스승 미당을 믿어도 좋지만 다만 조심하거라, 그건 샤머니즘이란다. 예술이란, 시란 그러니까 정신의 산물인 것. 자연의 우위에 놓이는 것이란다, 라고. 총명한지라 이 소년배는 직감했을 터. ‘인공물’이어야 한다는 것.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신라 황남대총 말안장 앞 뒷가리개의 저 인공물. 놀랍게도 이 샤머니즘은 인공물과의 결합물이 아니겠는가. 비단벌레의 인공물화의 발견이 그것.”

총명한 이 소년배가 정신주의를 주창한 최동호 시인이고 그가 정신주의의 구극의 소실점에서 날려 올렸다는 시가 〈불꽃 비단벌레〉라고 김 씨는 쓰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김 씨에게 다음의 소년배, 21세기의 소년배는 어째야 할까.

가능하다. 물끄러미 서 있는 너희 두 사람이 내 아버지다. 가능하다. 죽은 사람과 말하는 돌에 대해서 쓸 생각이었다. 가능하다. 내 말은 뼈를 부러뜨리고 나온다. 오전 11시에서 1시 사이. 가능하다. 떨어지다가 정지한 사람을 본다. 누가 내 이름을 바꿔 부를 때도 되었다. 가능하다
―김언 〈가능하다〉 부분

김 씨가 인용한 김언 시인의 시 〈가능하다〉 한 부분이다. 이 소년배에 대해 김 씨는 이렇게 적고 있다.
“총명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 소년배를 제3의 소년배라 하지 않는다면 어떤 명칭이 적절할까. 잠깐, 기껏해야 ‘미래파’라 불리는 소년배인 것. 서정적 자아를 조소하고 포기한 악동. 이 얼마나 소년배인가. 담 크기 여부와는 관계없이 얼마나 순정한가. 그도 그럴 것이 상징계(아비, 사회, 언어)가 송두리째 그 힘을 잃는, 그러니까 샤머니즘이 깡그리 사라진 세계 속에 미래파 소년배 홀로 서 있지 않겠소. 갈 곳은 두 가지. 상상계(우주)로 향하기가 그 하나. 다른 하나는, 저 윤리 부재의 현실계. 말이 공중에 뜬 이 겁 없고 순정한 소년배를 보시라. 얼마나 딱하고 재롱스러운가. 육당께서 다시 이렇게 꿰고 있음직하오. ‘오나라 소년배, 입맞추어주마’라고.”

지난 20세기의 우리 시가 소년에서 시작됐고 또 21세기 시도 소년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김 씨의 주장이다. 어째서? 〈신시 백 주기, 이 나라 시에 영광 있어라〉라는 글에서 김 씨가 밝혔듯 “소년이기에 담이 클 수밖에. 소년이기에 순정할 수밖에. 그만이 서정시의 담당자이니까.”

매양 역사의 종언을 외쳤지만 그 역사 없이도 인류사는 그 모양 이 꼴로 지속되고 있다는 원로 문학사가 글의 귀결이 크게 울리며 아프게 한다. 아! 그러니 언제까지 우리 서정시의 담당을 담 크고 영악한 소년배들에게만 맡겨야 할 것인가. 그것도 ‘서정적 자아를 조소하고 포기한 악동’ ‘얼마나 딱하고 재롱스런’ 소년배들에게.

민족사의 질곡에 볼모 잡힌 우리 시의 참상

나도 신시 백 주기를 맞아 한국 현대시 100년 시화선집을 엮어 펴내며 우리 시 100년을 가슴 졸이며, 사심 없이 쭉 망라해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우리 시가 국권 상실과 분단, 그리고 독재 등 현대사 질곡에 맞서 계몽과 현실참여에 징집된 아픈 역사임을 절감했다. 그리고 그것이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비롯됨을 알았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신시적, 현대적 특성을 살펴보니 우리 현대시의 공과 허물이 눈에 잡히는 듯했던 것. 그 이전의 시들과 비교해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우선 형태 면에서 정형은 완전히 벗어났고 정형에서 비롯되는 율격도 어지간히 깨지면서 운문에서 산문에 가까운 자유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운문의 상대는 산문. 운문은 그 율격으로 하여 노래가 되고 산문은 그야말로 말, 글이 된다. 해서 운문은 춤을 추지만 산문은 행진하는 것이라 했던가. 율격은 3,4,3,4 하는 음보나 반복에 의해 드러나며 그 율격은 노래가 됨으로써 그 자체가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말글의 뜻을 넘어서는 감동, 주술적 효과를 주게 된다. 설명이나 분석의 산문보다는 주술적 효과와 감동이 운문, 시의 본령일 터. 그러나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그 정형의 운문을 깨뜨리고 자유시라는 산문 쪽을 지향하고 있다.

다음 시의 의도나 내용 면에서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소위 계몽하려는 것이다. 제목처럼 바다, 즉 서쪽의 바다에서 소년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가르치려는 말보다는 감동, 주술적 감응이 본령. 우주와 나, 너와 나는 살아 있는 하나라는 가슴 떨리는 소통의 언어가 시 아니겠는가. 산문은 분석적이어서 머리로 읽히지만 운문은 감동적이어서 가슴으로 읽히는 것. 그러나 우리 현대시, 지금 쓰이고 있는 시들은 산문보다도 더 지성적, 비판적인 머리로 쓰이고 또 그렇게 읽혀 그만큼 감동이 죽고 있다.

일제 강점하의 카프 시와 분단 60년의 북한 시, 1960년대 이후의 참여시와 민중시 등이 모두 다 크게 보면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계몽, 가르침을 잇고 있는 시들이고 이들의 시가 1960년대, 특히 4·19 이후 우리 시단의 전면에서 평가를 받으며 주류를 이뤄온 것이 우리 현대시 100년사였다. 우리 근현대 민족사와 함께한 이런 우리 현대시 100년사는 민족사적으로는 지사적, 독립과 민주화 투사적으로는 영광일지 모르겠으나, 시 본령에서 볼 때는 참담한 비극이 아닐 수 없었음이 지난 100년간 쓰인 시를 읽어 내리며 눈에 아프게 들어왔었다.

혼의 울림인 시의 본령 되찾는 성숙한 모습 보일 때

삶과 죽음 갈림길
여기 있음에 두려워하여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같은 나뭇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 극락세계에서 만나 볼 나는
도(道) 닦아서 기다리겠다

―월명사 〈제망매가(祭亡妹歌)〉 전문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전문

1천2백 년이 넘는 세월을 두고 나와 두고두고 읽히고 있는 이 두 시에서 무슨 발전이나 진보라는 것을 논할 수 있겠는가. 신라와 대한민국 소년배의 시랄 수 있겠는가. 우주적 감동, 아쉬움의 감동, 시공을 초월해 이승 저승을 오가는 감동만이 여일하지 않은가.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 정치인가, 종교인가, 현실인가, 시대상황인가. 지성이나 역사나 사회과학인가. 이 모든 것을 다 아우르고도 결국은 너와 나의 혼을 이으며 울리는 것이 시 아니겠는가. 명징한 정신이 아니라 두루뭉술한 혼의 울림.

혼의 울림이란 시의 본령에서 벗어난 우리 현대시사의 비극과 형벌을 아직도 벗지 못하고 있는 시인들이 미당과 그 족속, 순수 서정시인들이다. 지금 우리 현대시의 지형도는 미당을 중심으로 그 한쪽에는 김수영을 아버지로 삼은 참여와 진보 그리고 지성의 시단이 있고, 또 다른 쪽에는 김춘수를 아버지로 삼은, 그러나 제 아비도 부정하고 죽여 버리는 실험과 해체의 전위 시단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시의 강심수(江心水)로서 미당시는 친일과 어용과 순수로 매장당한 채 김수영과 김춘수 쪽의 소년배만이 득세하고 평가되어 온 것이 4·19 이후 우리 시단의 흐름이다. 파도와 파랑만이 눈에 들어오고 강심수는 거론도 못하는 이 조급한 평단의 소년배스러움이여. 아, 순수 서정시의 재앙 됨이여.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단작들이 대부분 소년배들의 시이다. 유수 문학상 수상작들이나 후보작들을 엮어 펴낸 시집들을 봐도 빠개질 듯 아픈 머리를 굴려 쓰고 읽게 하는 시들이다. 김 씨가 말한 서정적 자아를 조소하고 포기한 악동들의 시가 정통, 순수 서정을 진화(鎭火)시킨 진화(進化)된 서정시라며 판을 치고 있다.

무엇보다 교과서에서마저 순수 서정시의 재앙이 일어나고 있다. 시인을 꿈꾸는 이들에게 순수 서정에 대해 가르치기가 이젠 겁부터 난다. 그런 시는 이젠 도무지 먹히지 않는 우리 시 현실을 들어 대들면 딱히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러니 순수 서정시는 풍찬노숙할밖에.

딱하고 기막히지 않으신가. 식민이나 독재 정권의 반대급부로 그야말로 정의롭게 득세한 참여와 지성과 실험의 시단에 언제까지 시의 본령을 내주어야만 하겠는가. 독재정권은 국민, 참여의 정부를 넘어 이제 누가 뭐래도 민주정권으로 넘어왔는데.

강물도 없는 강물 흘러가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 범람하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

―조오현, 〈무자화(無字話)―부처〉 전문

부처님 오지랖은 넓다 했던가. 강물도 없이 강물을 흘러가게 하고 범람하게 하고 뗏목다리도 떠내려 보내니. 서정의 오지랖도 넓음인가. 악동 소년배도, 참여와 지성과 실험도 서정을 덮으려 떠들어대고 있으니. 진짜 순수 서정시는 풍찬노숙하며 말없이 스스로 그 위의를 펴고 있는데.

아, 그러나 아서라. 강심수 다 말려 버리면 파도도 여울도 없을 것. 그때 어느 물가에서 물장구 개헤엄 치며 놀려 하는가. 소년배 짓거리나 타령 그만두고 이제 시의 진정성과 위의를 내세우며 성숙한 모습 보일 때가 너무도 무르익지 않았는가.     

 

이경철 | 문학평론가·시인. 동국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 문화전문기자, 《문예중앙》 주간으로 일하며 다수의 현장비평적인 평론과 산문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와 공저 《대중문학과 대중문화》 《천상병을 말하다》, 편저 《한국 현대시 100년 기념 명시》, 명화 100선 시화집 《꽃필 차례가 그대 앞에 있다》 《시가 있는 아침》 등이 있다. 현재 동국대 문창과 겸임교수.

-http://www.yousim.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84 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우가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