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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따뜻한 결핍과 식물적 상상력-이승희의 신작시들 / 박남희

문근영 2014. 4. 26. 11:24

따뜻한 결핍과 식물적 상상력
                -이승희의 신작시들

박남희



1.따뜻함과 결핍 사이

  이승희 시인에게 있어서 따뜻함과 결핍은 동의어이다. 왜냐하면 상반된 표정의 이와 같은 언어들이 모두 그의 유년의 느낌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뜻함과 결핍은 그의 고향체험과 결부되면서 그의 시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그가 자신의 시를 통해 따뜻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그 근원을 캐들어 가면 결핍과 만나게 된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결핍의 표정은 ‘가난’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꽃과 빛에 대한 무의식적 열망에 기인하는 결핍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승희의 시를 읽다보면 ‘꽃’과 ‘빛’의 이미지가 무수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대표적인 이미지는 식물적 상상력을 통해서 만나게 된다. 식물 이미지는 시인에게 있어서 결핍을 견디는 힘이고, 절망을 건너가는 방법이고, 춥고 어둡고 허기진 세상과 화해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매개물이다. 왜냐하면 그의 결핍은 빈 허공으로서의 결핍이 아니라 단단한 ‘씨앗’으로서의 결핍이기 때문이다. 씨앗은 아직 온전한 생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결핍되었던 햇빛과 물과 공기가 충족되면 언제든지 커다란 나무로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승희 시인의 첫 시집『저녁을 굶은 달을 본적이 있다』(2006. 1)를 읽어보면, 그의 상상력의 기저에 식물적 상상력이 자리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식물기간」연작(1~4),「씨앗론」,「감자」,「수련」,「찔레꽃」,「호박」,「패랭이꽃」,「여름 나무」등의 제목만 보아도 이러한 짐작이 가능하다. 우선 식물적 상상력을 대표하는 그의 시「식물기간」을 읽어보자.

  씨앗이 기다리는 것은 봄이 아닐 거야

  대륙풍을 따라 한 세상을 건너가고 싶은 마음에 끊임없이 제 무게를 버리는 일이나, 강물에 실려 하염없이 흘러 흘러가는 것도, 그리하여 온몸에 퍼렇게 멍들어도 몸을 열지 않는 마음은.

  마디마다 한번씩 오지게 견뎌야 했던 날들 왜 그리 많은지, 밤이면 밤마다 마디에선 뼈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맺힌 곳에서부터 다시 풀어가야만 하는 게 세월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소리도 들었다.
  상처가 생긴 그 안쪽에서부터 흔적처럼 물기가 생기면 나는 그 상처 속을 태아처럼 오래 떠다니겠지. 먼 사막의 씨앗들은 오늘도 폭우를 기다리며 십년 세월을 하루로 살지, 마음속의 다짐이 더 깊고 푸르러지면 나는 나무가 될까, 내 마음의 잎들이, 줄기가 햇볕을 따라갈 때 그것이 남은 자들의 그늘을 키우는 힘이 되어, 언제나 세상을 조금씩 들어올릴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전 생애가 씨앗으로만 굴려진다고 해도.

                                             ―「식물기간」전문

  이 시의 제목인 「식물 기간」은 시인 자신의 가난했던 유년 기간과 대응된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시인은 “씨앗이 기다리는 것은 봄이 아닐 거야”라고 말함으로써 무언가 비장미를 더해준다. 시인은 “대륙풍을 따라 한 세상을 건너가고 싶은”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꿈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맺힌 곳에서부터 다시 풀어가야만 하는” 세월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에게는 아직 견딤의 세월이 더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늘 따뜻하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의 잎들이, 줄기가 햇볕을 따라갈 때 그것이 남은 자들의 그늘을 키우는 힘이 되어” 세상을 조금씩 들어올릴 수 있게 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강물이 열리고, 반달 같은 눈과 잎들이 생기면서” 드디어 “꽃의 중심”에 앉아있게 될 것을 예견하면서, “그렇게 제 목숨을 하나씩 풀어내는 일이 세상과 화해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식물기간2」) 그가 또 다른 시에서 “꽃이 피거나/ 열매 맺는 일이란 습성이나/ 본성이 아닌 거야/ 검은 흙 속을/ 아주 오래 무던히 걸어 온 시간들이/ 단단하게 뭉쳐 있다가/ 풀어지는 일이야”(「씨앗론」)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시인이 식물적 상상력을 통해 세상과의 화해를 꿈꾸는 것은, 개인적 결핍의 차원을 넘어 세상의 보잘 것 없이 작은 존재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다. 그는 “공원에서 잠든 사람들”이나, “마지막 전동차가 지나간 길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 기울여 걸어가던 사람”을 ‘씨앗’으로 본다.(「식물기간4」)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꽃피는 일은 단지 개인적인 ‘충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도랑물이 논으로 흘러드는 모습을 통해서 “천년에 걸친 한 가계의 역사”(「논둑에서 울다 2」)를 읽어낸다. 이렇듯 그는 주로 개인사를 노래하지만 그 개인사는 동시에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의 제유인 것이다.
  이번에 새로 발표한 다음의 시 역시 시인의 따뜻함과 결핍 사이에 존재하는 가난한 가족사와 근대사의 한 표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따뜻한 공기가 손가락 사이를 하나, 둘, 셋, 넷 하면서 천천히 지나는 동안, 머리를 뒤로 묶은 아내와 다섯 살 딸아이를 앞세워 전세방을 보러간다. 부동산 할아버지의 늦은 걸음과 낮은 음성이 지는 개나리꽃처럼 바닥으로 떨어지고, 난 그 꽃잎을 피해 위태롭게 걷는 동안 그때마다 새로운 골목들이 생겨나고 지워지고를 반복한다. 담장들은 언제 이렇게 높아진 것일까? 고개 돌린 나무와 꽃들이 담장 꼭대기에서, 담장 너머에서만 피고 지고. 어린 딸은 봄 햇살을 받아 둥실둥실 골목길을 잘도 뛰어간다. 그 걸음마다 마구마구 꽃 피는 듯한데, 왜 눈물이 나는지. 지하로, 2층으로, 보령김밥 3층집을 지나 유한철물점 골목길을 돌아 나온다. 이런 짓 한두 번도 아닌데, 끝내 익숙해지지 않는구나. 불면이 환하게 꽃필 동안 나는 내내 앉아있다. 잠든 딸아이의 손에 쥐어진 개나리 잎이 물기도 없이 말라가고, 미처 풀지 못한 머리핀 두개가 자꾸만 내 눈을 아프게 찌른다.

                                           ―「개나리꽃 질 무렵」전문
                                    
  담장 위에 노란 개나리꽃이 피어나는 봄은 분명 따뜻한 계절이지만, 아내와 다섯 살 난 딸아이를 앞세워 전세방을 보러 가는 시인에게는 여전히 결핍의 계절이다. 이 시의 제목이 「개나리꽃 질 무렵」인 것도 우연한 것이 아니다. 시인은 골목길을 걷는 동안 높아진 담장과 그 너머에 핀 꽃을 본다. 담장 너머에 핀 꽃은 그곳에서만 피고 지는 꽃들이라는 점에서 딸아이가 손에 꺾어든 개나리꽃과는 구별된다. 하지만 시인은 봄 햇살을 받아 둥실둥실 골목길을 뛰어가는 딸아이의 걸음마다 피는 꽃을 본다. 시인에게 있어서 딸아이는 그 어떤 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꽃인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현실 저쪽으로 철없이 뛰어가는 꽃을 보면서 끝내 눈물을 흘린다. 미처 머리핀도 풀지 못하고 잠든 딸아이 옆에서 앉아서 불면의 꽃을 피울 수밖에 없는 현실은 그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결핍인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꽃에 대한 열망은 그리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꽃은 그에게 있어서 희망이고 욕망이고 새로운 생명의 지표이기 때문이다. 그가 “꽃 속이 따뜻하다// 너무 아프면/ 세상이 다 꽃으로 보여/ 천지간/ 온통 꽃 아닌 것 없으니”(「푸른 연꽃」)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것도, 꽃이 단순히 피었다가 지는 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순환과 재생의 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에게 있어서 꽃은 사람이고 우주이고, 몸에서 동 트는 일이다.(「동틀 무렵」)

 



  2. 저녁 불빛-용서와 화해와 따뜻함

  이승희의 시를 읽어보면 ‘꽃’과 ‘불빛’과 더불어 ‘저녁’이 많이 등장한다. 아침이 탄생의 시간이고 낮이 생동의 시간이라면, 저녁은 마감의 시간이고 죽음의 시간이다. 그런데 이승희 시인은 아침이나 낮보다는 저녁 시간에 더 큰 정감을 느낀다. 그 이유를 짐작해 보면 저녁은 시인의 피곤한 육신이 비로소 안식할 수 있는 시간이고, 가난이나 상처로 상징되는 어둠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저녁 불빛이 있는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녁 불빛은 태양처럼 강렬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속에는 포근함이 있다. 시인의 이런 취향을 분석해보면 그 의식의 기저에 서민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어둠을 어렴풋이 밝혀주는 저녁 불빛이야 말로, 초라하면서도 어둠 속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서민의 상징으로서의 불빛인 것이다. 가난한 서울 변두리의 저녁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어둠을 이해하는 건 불빛이다. 그래서 밤새 빛으로 남을 수 있는 거다. 저녁 불빛을 보면 안다. 어떤 사랑도 저보다 아름다운 스밈일 수는 없다.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밝아지는 이유들. 불빛이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걸 굳이 화해라고, 용서라고 표현할 일이 아니다. 빛 속에서 어둠이 만져지거나, 어둠 속에서 빛이 만져지는 건 다 그런 이유이다.

  늙은 불빛 한 점
  물처럼 오랜 물길을 흘러 집의 지붕을 적시고
  사람의 집은 이제 물방울 같은 불빛 하나하나로 도랑을 이루며 흘러간다.

  서둘러 불을 켜는 사람을 보면 눈물나게 고맙다.

                                    ―「갈현동 470-1 골목」전문  
      
  가난한 동네에도 꽃이 피는 것처럼, 가난한 골목에도 불빛은 있다. 시인이 현재 살고 있는 <갈현동 470-1>번지 골목의 저녁 불빛은 어둠(가난)을 이해하는 주요한 매개물로 나타나 있다. 시인은 골목길 여기저기를 비춰주는 저녁 불빛을 보면서 “어떤 사랑도 저보다 아름다운 스밈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저녁 불빛이야말로 어둠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밝아지는 불빛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러한 저녁불빛을 통해서 용서와 화해를 본다. 빛 속에서 어둠이 만져지고 어둠 속에서 빛이 만져지는 풍경이야말로 빈부나 귀천의 구별이 없는 진정한 사랑의 풍경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서울 변두리 갈현동 골목을 걸으면서 저녁의 “늙은 불빛 한 점”, 즉 “물방울 같은 불빛 하나하나”의 개체성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낀다. 시인은 작은 불빛 하나하나가 모여서 “도랑을 이루며 흘러가” 역사를 이루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다음 시 역시 <갈현동 470-1 번지>의 저녁풍경을 보여준다.  

  아리랑 슈퍼 알전구가 켜질 무렵 저녁이 흰 몸을 끌고 와 평상에 앉는다.  그 옆으로 운동화를 구겨 신고 사과궤짝 의자에 앉아 오락하는 아이의 얼굴이 불빛으로 파랗다. 저녁은 가만히 아이 얼굴을 바라보다, 작은 어깨 위로 슬며시 퍼져간다. 가로등이 켜지자 화들짝 놀란 저녁이 또 가만히 웃는 동안에도 아이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가 빨갛게 익었다가 다시 하얗게 질렸다. 갑자기 세상은 저녁 아닌 것이 없는 저녁이 되었고, 골목 끝은 해 지고 난 후의 들녘처럼 따뜻하다.
  골목길을 따라 불이 켜진다. 낮에 보았던 살구나무에 달린 살구들처럼 노랗게 불 켜진 골목을 따라 집들도 불을 켜는 동안 나는 집 앞에 앉아 수학학원 간 초등학생 딸애를 기다린다. 불빛은 얼마나 따뜻한가, 그림자를 보면 알 수 있지. 감추고 싶은 것 다 감추고, 아니 더는 감출 수 없는 몸을 보여준다는 것은. 나는 때로 그렇게 따뜻한 불빛에 잠겨 한 마리 물고기가 된다. 우리 집에도 불이 켜졌다. 딸아이가 불빛을 따라 헤엄쳐 올 것이다.

                         ―「갈현동 470-1번지 세인주택 앞」전문

  이 시 역시 앞의 시와 마찬가지로 시인이 사는 동네의 어두운 저녁풍경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첫 연은 ‘흰 몸’으로 표상되는 저녁의 따뜻한 눈으로, 아리랑 슈퍼 알전구 밑에서 사과궤짝을 깔고 앉아 오락을 하는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시인이 저녁을 의인화해서 ‘흰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저녁 어스름 속에서 보이는 마지막  환한 빛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으로 보이지만, 한편에서는 돌아가신 할머니나 어머니의 흰옷 입은 형상을 암시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저녁으로 표상된 ‘흰 몸’의 따뜻한 눈빛은 시인이 어렸을 때 놀이에 빠져있는 아들을 찾아와 밥 먹으라고 부르던 어머니의 따뜻한 눈빛과 겹쳐지는 이미지인 것이다.
  2연에 오면 시인 자신이 부모가 되어 수학학원 간 딸아이를 기다리는 풍경이 펼쳐진다. 이러한 풍경은 1연의 풍경과 겹쳐지면서 ‘저녁 불빛’의 따뜻함을 상기시켜준다. 시인에게 있어서 저녁 불빛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저녁 불빛 속에는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저녁 불빛은 “더는 감출 수 없는 몸을 보여”주는 사랑의 불빛인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시에서 불빛을 액체로 감각화해서 표현하고 있다. 시인이 시각적인 불빛을 촉감적으로 액체화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저녁 불빛을 모성적 감촉의 등가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마지막 행에서 딸아이가 불빛을 따라 헤엄쳐 오는 것도, 그 불빛 속에 부모의 따뜻한 사랑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만히 불빛에 얼굴을 대어봐. 비어 있는 공중에서, 비어 있는 집에서 눈물  나게 아프다고 말하지 말고 불빛에 젖어봐. 마음이 가는대로 따라 흐르는 불빛의 수면과 그 수면위로 잔 물결치는 어둠의 한 때와 불빛의 한 때를 기억해봐. 어느 누가 저 불빛처럼 당신을 그윽하게 적실 수 있었겠는가. 자꾸만 흐려지는 당신의 말끝으로 흘러들도록, 그리하여 불빛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젖어있는 거라고.
  불빛을 만져본 일이 있는지. 내게로 와서 한없이 쓰러지는 그리하여 내게 그림자를 만들어 주는 그 비밀을 사랑하는지. 사랑할 수 있는지. 촛불을 켜보면 안다. 숨 막히던 한 때의 생애와 죽을 것만 같았던 한 시절이 어떻게 잠들어 있는지. 가만히 얼굴을 대어보면 안다. 불빛 속에서는 어떻게 비가 내리는지, 어떻게 내 몸이 말라가는지, 먼지 같은 어젯밤이 왜 계속되는지. 쓸쓸할 땐 촛불을 켜보면 안다.

                                              ―「촛불을 켜」전문        
  
  시인은 이 시에서도 역시 불빛을 촉감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불빛이 단순히 어둠을 밝혀주는 도구가 아니라 시인의 감정적 등가물이기 때문이다. 앞의 시에서 불빛이 모성적 사랑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면, 이 시에 와서는 그 의미가 좀 더 확장되어서 추억 속의 사랑과 희망을 암시해주고 있다. 시인은 가만히 불빛에 얼굴을 대어보면서 추억에 젖는다. 그는 “마음이 가는대로 따라 흐르는 불빛의 수면과 그 수면 위로 잔물결 치는 어둠의 한 때와 불빛의 한 때”를 기억해보고 “어느 누가 저 불빛처럼 당신을 그윽하게 적실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불빛은 “내게로 와서 한없이 쓰러지는 그리하여 내게 그림자를 만들어 주는” 비밀을 가지고 있는 불빛이라는 점에서, 젊은 시절 그가 느꼈던 사랑의 표정과 많이 닮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불빛을 통해서  “숨 막히던 한 때의 생애와 죽을 것만 같았던 한 시절”을 만져볼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불빛을 통해서 자신의 가슴 속에 내리던 비와 말라가던 먼지를 확인해 보는 것은 “불빛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젖어있는 거”라는 ‘불빛’, 즉 ‘사랑’의 영속성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랑이란 눈부신 태양과 같은 빛이 아니라 빛과 어둠이 섞여 있는 ‘촛불’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빛과 어둠은 사랑의 이중성이면서 그 사랑을 감싸주고 한편으로는 긴장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랑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인 것이다.

어두울수록 불 켜진 속은 환해진다.
위층 여자가 거실에서 주방 쪽으로 가는 동안
자동차 한 대가 막 들어와 눈을 반쯤 뜬 채 비를 맞는다.
비를 맞는 것들은 다 착하다.

집을 빠져 나온 불빛도 비를 맞는다.
불빛이 불 켜진 집을 나와 내게로 건너오는 동안
빗방울마다 알전구가 켜지기도 하고
빗방울마다 불 꺼진 집이 들어서기도 한다.
  불빛이 둥글어 불 켜진 집도 차츰 둥글어진다. 밤이 깊어지고 툭툭툭 불이 꺼질 때도 켜질 때도 따뜻하게 덮어주는 불빛.

                                     ―「아파트 불빛을 바라보며」부분  

  시인은 아파트 건너편에서 아파트의 네모난 불빛을 바라보기도 하고, 빗방울을 통해서 보이는 알전구와 불 꺼진 집을 바라보기도 한다. 빗방울 속에서는 “불빛이 둥글어 불 켜진 집도 차츰 둥그러진다.” 빗방울 속에 비치는 불빛은 저마다 둥글게 한 세계를 이루고 있다. 이승희 시인은 그의 시집에 들어있는 시「물방울」에서, 물방울은 모여지는 것이 아니라 맺혀지는 것이며, 물방울이 “얼마나 사무쳤기에 저리도 둥글어진 것이냐. 물방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다.”고 말한다. 시인이 물방울과 같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개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그 작은 개체 하나하나에 들어있는 의미가 저마다의 우주적 존재성에 닿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물방울과 물방울이 만나는 것이 삶이고 사랑이라고 말한다.(「관계, 물들다」) 물방울은 그 어느 것보다도 온전히 다른 물방울과 하나가 된다. 물방울은 아파트의 네모난 불빛도 둥글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문명과도 뛰어난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


   3.불빛과 꽃의 만남-식물적 상상력

  이 글의 모두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승희의 시는 식물적 상상력이 바탕이 되어 있다. 시인이 그동안 살아온 자연은 온통 식물들로 가득 차 있고, 시인은 그 자연을 통해서 생명의 따뜻한 맥박소리를 듣는다. 그의 대부분의 시들에서 느껴지는 식물에 대한 놀라운 사랑과 친화력은 이승희 시의 상상력과 따뜻한 감성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도 시인의 이러한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식물적 상상력은 이승희의 시에서 문명과 자연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통로가 된다. 이승희의 시에서 ‘불빛’이 문명의 제유라면 ‘꽃’은 자연의 제유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문명과 자연은 그의 식물적 상상력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착한 사람들은 저렇게 꽃잎마다 살림을 차리고 살지, 호미를 걸어두고 마당 한켠에 흙 묻은 삽자루 세워두고, 새끼를 꼬듯 여문 자식들 낳아 산에 주고, 들에 주고, 한 하늘을 이루어간다지.
  저이들을 봐 꽃잎들의 몸을 열고 닫는 싸리문 사이로 샘물 같은 웃음과 길 끝으로 물동이를 이고 가는 모습 보이잖아. 해 지는 저녁, 방마다 알전구 달아놓고, 복(福)자 새겨진 밥그릇을 앞에 둔 가장의 모습, 얼마나 늠름하신지. 패랭이 잎잎마다 다 보인다, 다 보여.

                                                ―「패랭이꽃」전문

  시인은 패랭이꽃 속에서 우리네 농촌의 서민들이 살아온 훈훈한 삶의 모습을 본다. 시인이 패랭이꽃을 통해서 바라보는 세상은 가난에 찌든 삶이라기보다는, 해 지는 저녁 알전구 아래 둘러앉아서 저녁을 먹는 따뜻함과 훈훈함이 묻어있는 삶이다. 이승희의 시가 가난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가난이나 슬픔에 매몰되지 않는 건강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식물적 상상력과 무관하지 않다. 위의 시에서 시인이 바라보는 알전구도 패랭이꽃 속의 알전구이므로, 그 아래 모인 식구들이 “샘물 같은 웃음”을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자연은 각진 문명의 불빛을 둥글게 만들어 준다. 둥글다는 것은 화합과 사랑과 유대감을 상징해 준다. 그의 시가 하나같이 따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즘과 같이 젊은 시인의 그로테스크한 시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따뜻한 눈길을 주고 있는 이승희의 서정시들은 오히려 또 다른 새로움이다. 특히 그의 시가 맹목적인 긍정에 매몰되지 않고 가난에 뿌리를 둔 사회학적 상상력에 닿아있는 것은 여타의 심약한 서정시와 구별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는 지금도 “딱 한 끼 밥을 위해” 그“가 보았던 그 모든 것을 잃어야 했던,”(「나무젓가락」)시절의 아픔을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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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우가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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