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기다리다 간다 나는 그대의 그림자 볕뉘*야 그대가 나를 극지極地에 버려두고 간 뒤 얼마나 지났나 온도가 전 같지 않네 첨엔 얼음만 먹고 살았어 얼음 말고 달리 먹을 게 있어야지 자꾸 뚱뚱해져서 빙산이 된 줄 알았어 극광이 빙빙 돌 때마다 나는 바닷속에 있다고 소리쳤지 그 얼음모자가 너냐고 아무리 봐도 너 같지 않다고 도저히 너로는 볼 수 없다고 한참 몸부림쳤더니 다시 나만 한 얼음빛 볕뉘가 됐어 그후론 막 떠돌아다녔어. 바닷가 읍성 근처까지 왔는데 돌마음을 열어 보여주는 절이 있었어 돌빛을 보여달라고 삼천 배를 올렸지 이제 눈도 가슴도 다 녹아 그대가 준 맑은 뼈만 품고 흐르려고 해 내 분홍귀는 아직 초롱초롱 밝으니 그냥 두고 갈게 돌빛이 참 환한 호수를 봤어 귀를 두고 가기에 딱 좋은 물이야 혹시 이 호숫가 지나다 연꽃 등잔 걸렸거든 연꽃에 귀대고 등불소리 들어봐 달그락거릴 거야 -등불 소리 *볕뉘:햇볕의그림자
# 1971년 「원광」,「신반야경」등의 시를 <현대시학>에 발표하면서 등단한 이채강(등단 시 이름은 이명자)시인이 1989년 두 번째 시집 <별제>를 발표한 이후로 이십여 년이 지난 후 세 번째 시집 <등불 소리>로 돌아 왔다. 이 시인은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니”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 사랑을 잃고, 이십여 년 간 깊은 상처의 유형지流刑地에서 “얼음빛 볕뉘”가 되어 떠돌다가 “이제 눈도 가슴도 다 녹아”내리고야 그 유형지에서 익어간 시간을 생생하고도 빛나는 시로 끌어안고 돌아 왔다. 이십여 년의 긴 침묵의 시간 동안 이 시인에겐 어떤 일이 있었을까? 죽어도 좋을 만큼 혼신을 바친 사랑이 상처를 입었을 때, 사랑을 불태우던 불덩어리인 마그마가 상처 입은 정신의 연약한 지반을 뚫고 화산처럼 분출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빠져나간 텅 빈 동굴 속에서 이십여 년 동안 웅크리고 지낸 침묵의 시간은 이십만 년, 아니 이백만 년의 시간과 같았으리라. 슬픔과 절망과 분노와 그리움이 뒤엉킨 용암이 솟구치며 그녀의 하늘을 덮은 화산재가 그녀의 하늘을 캄캄하게 뒤덮고 빙하기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첨엔 얼음만 먹고 살았어/얼음 말고 달리 먹을 게 있어야지/자꾸 뚱뚱해져서 빙산이 된 줄 알았(등불소리 중 일부)”을 때 까지 스스로 만든 얼음 성 속에서 “매미 허물 뱀 허물이 켜켜이/먼지로 쌓여 단애가 된/물새 한 마리 깃들지 않는 포구에/물의 길 얼음의 길 눈의 길을/차례로 놓아준 눈먼 절벽(유형流刑 중 일부)”으로 둘러싸인 채 몸부림치며 유형流刑을 살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 시인의 사랑은 “노랑배멧새와/검은가슴물새가/죽고/못살다/훌훌/털어낸/그리움의/촉/새/길에/새로 켜놓고 가는 울음불/지평선/태우며/훌훌(훌훌의 전문)”할 정도로 뜨겁던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이 떠난 것이다. “그대가 나를 극지極地에 버려두고 간 뒤” “나는 한번도 그대를 만나지 못했다/그대는 날마다 나와 헤어졌지만/나는 한번도 그대와 헤에지지 못(꼭 중 일부)”하는 나날 속에서 “빙하기의 빙벽을 뜯어다가/겨우내 전국을 휩쓸던 괴도 혹한들이/한파며 폭설이며 연일 부르는 게 값으로/상한가를 올리며 출몰하는(그숲에자전거타고가는 중 일부)”추운 곳에서, “그렇게 만나지도 못하고/헤어지지도 못하는 나날들은/또 얼마나 가슴 여위던 시간인가/우리 한번은 꼭 만나기로하자/만나서 꼭 헤어지기로 하자(꼭 중 일부)”고 다짐해보던 시간들... “붙잡아 말릴 새 없이/눈밑의 절애로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눈감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동공에 우물을 파고 풍덩풍덩 투신하는 소리/난타하는 북소리로 귀청이 터지게/날마다 울어대는 소리(목소리 중 일부)”를 “제 귀로 들으며”지낸 그녀의 사랑은 얼마나 “애애 절절”했던가. “모래뿐인 내 가슴이 헐리고 헐려서/가는 길마다 모래언덕 첩첩이 앞을 가리고/망해사는 갈수록 멀어지는데/눈구름에 닫힌 포구는/다른 길을 냈는가/간데없는 망해사/에밀레 종소리가 풍경을 밀어낸다(중략)/내 가슴의 모래밭에 앉아 있는/아가아가 내 아가/너는 망해사 앞바다 모래 위에 있고/나는 네 곁에 있어도/너는 나를 보지 못하고/모래인 나는 너를 안아주지 못한다(망해사 가는 길 중 일부)” 자꾸만 목이 메이어오는 이 절절한 시 귀절 앞에서 한참을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소망하는 여성성의 충족 중 가장 커다란 영역 중의 하나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기를 갖는 것이리라.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니 꽃 피면 열매 맺고 싶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욕망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루어 내는 새로운 생명의 창조는 사랑을 완성하는 일이며, 새로운 미래를 향한 또 다른 시간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의 상실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사이이의 이별을 넘어선 새로운 생명 창조의 상실이며, 미래에 대한 꿈의 상실이기도 한 것이다. 사랑을 잃고 “내 목숨의 생살에 흐르는 모래”가 된 여성성의 시간은 “눈발 ”속에서 엎어지며 상처의 유형지流刑地에서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매미 허물 뱀 허물이 켜켜이/먼지로 쌓여 단애가 된/물새 한 마리 깃들지 않는 포구에/물의 길 얼음의 길 눈의 길을/차례로 놓아준 눈먼 절벽이/몽상 하나를 위리안치 시킬/고도 한 섬 남겨두지 않고/가진 거라곤 가벼움뿐인 공기를/술술 섞어서 앞뒤 못가리는/불명不明에게 보내주고/창창한 지평선 한뼘을/내게 유적지流謫地로 밀어 놓는/폭설의 밤/하얀 어둠 속에 가만히 찍히는/백일홍 발자국(유형流刑 전문)”에 이르면 “댓잎 자리 위에 얼어 자도 좋”았던 뜨겁고도 붉던 사랑의 순정이 “제 스스로 누르는 힘이 세져서/고색창연한 먼지의 뇌관 한 구석에/늘어붙어 있던 삭풍의 흔적까지/폭발해버린 기나긴 늦여름/먹구름이 수억 줄기 격렬한 물결로/무거운 먼지 속에 서렸던 속가슴을/씻어 내리고, 적어둔 한 줄/-티끌 하나 없이 맑음(상실 전문)”이라는 전언을 대하며 그녀가 견딘 상처의 유형지流刑地에서의 시간이 얼마나 처연하고 단단하게 익어 갔는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바닷가 읍성 근처까지 왔는데/돌마음을 열어 보여주는 절이 있었어/돌빛을 보여달라고 삼천 배를 올렸지/이제 눈도 가슴도 다 녹아/그대가 준 맑은 뼈만 품고 흐르려고 해(등불 소리 중 일부)”라는 구절에 이르면,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와 알리파노(Roberto Alifano)의 대화를 생각나게 한다. 알리파노는 보르헤스에게 “인간이 시간에 대한 감각 없이 살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보르헤스는 이렇게 대답한다(보르헤스와의 대화 pp.240-244중 일부). “헤라클레이토스가 「누구도 동일한 강물에 두 번 씻을 수 없다」를 처음 말하면서 느꼈을 그 치명적 현기증 말입니다. 이 말은 첫째로, 시간도 강물처럼 언제나 흐르며 멈춰있는 법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둘째로, -이것은 우리에게 일종의 신성한 공포를 안겨주는 형이상학적 차원인데-우리들도 역시 하나의 강이라는 사실, 즉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강물처럼 우리도 흐르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라는 대화 속에서 지적 되었듯이, “얼음빛 볕뉘”로 견디던 상처의 유형지流刑地에서 익어간 시간은 이제 그녀 자체가 되고 시간의 강이 되어 흐르게 되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지적처럼 “시간은 지속”이며 “존재한다는 것은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이 시인은 “상처의 유형지流刑地에서 익어간 시간”동안 그녀 자신이 “그 시간 자체”가 되었던 것이다. "애애 절절“한 시편들에서 보여주는 저 금강석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시어들은 그녀 스스로 ”상처의 유형지流刑地“에서 자신에게 상처를 준 “그대”인 타자와 한 몸을 이루며 익어간 시간 속에서 상처를 준 그대를 지우고, 상처도 지우고, 그녀의 실체도 지우고 강이 되어 우리 곁으로 흘러 온 실존적 시간인 것이다. 이제 시가 된 그녀가 불멸을 향하여 흐르는 시간이 되고자 한다.
이채강 (본명, 이명자)시인은 1947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석사과정), 대전대학교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1971년 「원광」, 「신반야경」등의 시를 <현대시학>에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신반야경, 1973>, <별제, 1989>등이 있다. <문학사상>편집부장을 역임하였고, 고려대, 배제대, 대전대 등에서 문학 강의를 하였다. [서정시학]값,9,000원
문화저널21 편집위원 서대선(신구대학교수 dsseo@shing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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