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어적 풍경 | ||
|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75) | ||
| 더없이 아름다운 시대 김박은경 꿈꾸는 것은 모두의 운명 가죽은 붉은 피와 살점의 시대를 유리는 반짝이는 모래알의 시대를 꿈꾸고 있다 신발은 피 흐르는 발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검정 구두 속은 온통 붉은색 다물지 않는 입에 신문지를 박아버렸다 얼마나 피를 빨아댔는지 퉁퉁 불어 살짝 눌러도 붉은 물이 흐를 것 같았다 유리도 오래도록 꿈을 꿨겠지 테이블로 바뀌어서 버틸 적에 창으로 드는 햇살에 감질내며 바닷물 대신 끈척한 차 얼룩 견뎌내며 때가 오면 다시 한 번 한 번만 더, 그랬겠지 그의 몸도 아기였던 때 큰 품에 안겨 안락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을 거야 이게 그 사건의 내막, 통유리 테이블에 올라갔다가 박살난 유리에 손과 발이 상한 일 유리는 해변을 향해 흘러가고 구두는 살점과 피 냄새에 취해 있고 그는 소파에 안겨 백 년 만의 오수를 즐기고 있다. 더없이 아름다운 시대가 오기는 왔다 # 시는 조개껍질입니다. 시는 동해안의 바람입니다. 아니 제주도의 검은 현무암입니다. 이렇게 시는 조개껍질일 수도 있고 바람일 수 있고 검은 바위일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시는 생물,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입니다. 당위적 목적성을 강조하는 시들이 갖는 한계는 생물인 시를 항아리에 가두어 육젓을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나 최근에 다양한 빛으로 분광하는 시를 보았습니다. 바로 김박은경의 시편들이 그러했습니다. 아직 시단에서 낯선 이름이지만 주목할만한 시인입니다. 그의 시는 이미지만 살아 반짝이는 시도 아니고, 너무 뻔한 상투적 이야기를 가벼운 시적 수사로 위장한 시도 아닙니다. ‘검은 새를 냉장고에 넣는다’와 같은 독특한 사유를 펼쳐놓은 시도 눈길을 끌지만 오늘은 ‘더없이 아릉다운 시대’라는 작품을 집어들었습니다. 인간은 모두 욕망하는 존재이고 꿈을 꿉니다. 1연의 ‘가죽’과 ‘유리’는 본래적 실체로부터 멀어진 사물들입니다. 현실의 질서와 억압에 구속되어 하나의 껍데기로만 살아가는 존재이지요. 제목이 시사하듯 이 시는 반어적 수사를 통해 현실을 비트는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구두’와 ‘유리’는 오욕의 삶을 견디면서 ‘때가 오면 다시 한 번 한번만 더’ 본원적 세계를 회복하고자 합니다. 인간 역시 매일매일 안락한 모태의 공간을 그리워하며 삽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걸 쉽게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손과 발’이 상하는 일이 일상의 일이지요. 마지막 연에서 보통의 삶의 풍경이 그려집니다. 미완과 불구의 모습입니다. ‘유리’와 ‘구두’는 여전히 모래알을 꿈꾸고 살과 피의 냄새를 그리워합니다. 도달할 수 없는 아주 먼 곳의 일이지요. 그리고 ‘그’는 모태의 안락한 공간 대신 ‘소파’의 안락함에 취해 낮잠을 즐깁니다. 이 지점에서 화자는 자조하듯 중얼거립니다. ‘더없이 아름다운 시대가 오기는 왔다’ 과연 ‘아름다운 시대’가 온 것인지요? 아니, 그런 시대가 있기는 한 것인지요?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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