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젖과 음악의 영토 |
|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81) |
실내악室內樂
안현미
봄이 오는 쪽으로 빨래를 널어둔다
살림, 이라는 말을 풍선껌처럼 불어본다
옛날에 나는 까만 겨울이었지
산동네에서 살던,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던
실패하고 얼어 죽기엔 충분한
그런 무서운 말들도 봄이 오는 쪽으로 널어둔다
음악이 흐른다 빨래가 마른다
옛날에 옛날에 나는 엄마를 쪽쪽 빨아 먹었지
미모사 향기가 나던 연두, 라는 말을 아끼던
가볍고 환해지기엔 충분한
살림, 이라는 말을 빨고 빨고 또 빨아
봄이 오는 쪽으로 널어두던
# 안현미 시인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시인이다.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아직도 세포 분열과 증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시인이다. 무겁고 때론 활달한 언어 구사, 섬세하고 뜨거운 현실 인식, 실제와 환상을 오가는 자유로운 시적 행보, 환멸과 생의 비극적 풍경 등 그의 시에는 다채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만큼 시의 지평이 광활하다. 단순히 현실 재현으로 그치거나 생경한 체험만을 도드라지게 드러냈다면 그의 시는 자기 한계에 갇히게 되었을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현상학적 논리를 무슨 대단한 발견인 양 시속에 구겨 넣어 독자에게 강요하고 철학적 포즈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시들도 있지만 안현미의 시는 그런 단세포적 작품들과는 태생이 다르다.
이 시의 화자는 ‘까만 겨울’에 갇혀 있다. ‘산동네’ ‘고아’ 등의 시어가 어둡고 막막한 상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가난과 절망과 좌절의 혹독한 시간을 견뎌내고 있는 화자는 ‘봄이 오는 쪽’으로 존재의 시선을 돌린다. 풍선껌처럼 불어보는 ‘살림’은 산동네의 고단한 삶을 환기하고, 실패와 좌절의 무거운 말들을 빨아서 빨랫줄에 걸어 놓을 때 ‘음악’이 탄생한다. 그곳에서 생의 질곡을 넘은 희고 눈부신 실내악이 흐르고 팍팍한 삶은 마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빨다’라는 행동이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엄마의 젖을 빠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과 간난의 ‘살림’을 빠는 것이다. 두 행동은 모두 ‘가볍고 환해지기엔 충분한’ 현실 극복의 지난한 몸짓이고, ‘젖’은 생명의 상징으로 ‘음악’과 동일한 기능을 한다. 화자는 ‘젖’을 통해 고단한 삶의 굽이굽이를 넘어서고 ‘봄이 오는 쪽’을 향해 존재의 촉수를 곤두세운다. 그곳은 ‘미모사 향기가 나던’ 모성과 시원의 공간이다. ‘옛날’과 현실의 대비를 통해 안현미 시인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중저음의 현악 4중주 ‘실내악’ 한 곡을 들려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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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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