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91) - 관조와 성찰의 시학 |
어둠에 들다
김완하
어둠이 오기 전
숲 앞에서 시간은 잠시 잠깐
움찔한다
쌓인 빛을 털어내려는 듯
풀들마다 허리께를 한번
요동친다
어둠은 세상의 길을 풀어버리고
소리 속으로 귀를 묻는다
내가 밟고 가는 걸음에 놀라 화들짝
깨어나는 숲,
제 울음을 골똘히 들여다보는 벌레들
어둠 속에서 땅은
나에게 순순히 길을 내어준다
어둠에 나를 묻자
길은 훤히 트였다
숲을 빠져나올 즈음
어둠은 겹겹 짜인 시간의 조롱을 흔들었다
눈 익어 오리나무 둥치도
어둠 속 희게 빛난다
작은 도랑을 건너
물은 흘러갈 만큼 가서야 소리를 죽인다
어둠도 깊어질 만큼 깊어야 또 빛이 된다
# 서정의 호흡이 가지런한 이 시는 대상의 미세한 표정과 움직임을 그려내는 한 폭의 세밀화를 보는 듯하다. 어둠을 통해 존재의 양태를 정밀하게 포착하고 있는 ‘어둠에 들다’는 평범한 일상의 풍경 속에 내재되어 있는 존재의 비의를 곡진하게 드러낸다.
화자는 어둠이 오기 전 우주의 기미를 감지한다. ‘풀’의 움직임을 통해 사물의 숨결을 읽어내는 시선이 ‘세상의 길’에서 멀어진 어둠과 숲을 발견한다. 그 때 숲 속에 잠들어 있던 벌레들은 ‘제 울음을 골똘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응시가 감각의 힘으로 탄력을 얻는 순간이다. 신성의 숲으로 발을 들여놓은 화자는 조심스럽게 우주와 함께 호흡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존재의 다른 차원으로 진입한다. 탈각의 지점에 화자가 서 있는 것이다.
숲은 고요의 신이 기거하는 곳이며 새로운 탄생의 보금자리다. 거대한 자궁이며 존재의 전환이 시도되는 성소인 것이다. 뱀이 허물을 벗듯 화자는 비로소 변신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삶의 층위에 서게 된다.
‘어둠에 나를 묻자 / 길은 훤히 트였다’
일시에 기존의 ‘나’는 소거되었다. 신생을 위한 결단이 곧 ‘나’의 죽음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제 눈앞에 펼쳐진 길은 과거의 길이 아니며 새롭게 태어난 길이다. 아무도 걸어가지 않았던 존재의 처녀지다.
‘어둠 속 희게 빛’나는 ‘오리나무’는 빛나는 생의 표지로서 화자가 바라보고 걸어가야 할, 어둠 속에서 캐낸 황홀한 광맥이다. 여기서 화자는 자연을 새롭게 지각하고 존재의 영토를 확장한다. ‘물은 흘러갈 만큼 가서야 소리를 죽인다 / 어둠도 깊어질 만큼 깊어야 또 빛이 된다’는 사실을 통찰한 화자는 이전과는 다른 삶의 양식을 발견하고 세계와의 새로운 호흡을 예비한다.
숲의 어둠 속에서 존재의 일신을 기도한 화자의 몸에서 푸른 서기가 감돈다. 깊고 그윽해진 시선이 현상의 실체를 더욱 명료하게 보여주는 순간이다. 현실에서 자연으로, 다시 자연에서 현실로 회귀하는 역동적 상상의 보법, 관조와 성찰은 건강한 서정의 미학을 탄생시키는 김완하 시의 주요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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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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