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92) - 이미지의 충돌과 교합 |
수박이 있는 골목
최승철
수박은
어미에게로 이어진 자궁을 향해
보란 듯 긴 혀를 잘라버린 촌철살인
한강대교를 건너자 / 내 안의 쓸쓸함을 모아 / 공허를
모아 / 노란 꽃 한 송이 만든다 / 말랑말랑한 흙비 / 이
주문은 세 번 이상 외워야 한다 / 나를 위협하는 것은 /
저기, 봄 바다까지 꽉 찬 달
그어진 실핏줄마다
머리와 항문이 없는 아이의
꼭지가 마르도록 내민 혀,
간절한 소통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텅, 울리는 속이 벌겋다
인사를 했다 / 차를 몰고 갔다 / 관념은 말랑거리는
개의 혀처럼 궁서체다 / 거미줄을 따라 / 금이 간 담장
을 지나 / 내 마음 어딘가에 촛불을 켠다
온전한 행성을 이루기 위해
태양으로부터
제 몸을 허공에 단 지구
노부부의 눈동자가 그러했을 것이다.
묵(墨)이 한지를 적시는 속도로 / 온몸을 적시는 이
우울의 어깨를 다독였다 / 하늘과 땅의 영(靈)을 만나
게 하기 위해 / 향을 묻었던 전통을 침향이라 한다
고통은
사람의 몸을 빌려
마음을 짓는다
# 최승철의 시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그만의 개성이 살아있는 시들이 최근에 간행한 시집 『갑을시티』에 알곡처럼 담겨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시구와 시구를 가로지르는 빗금이다. 이 시에서 빗금은 독특한 위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미학적 실험의 사례로 다가온다. 돌올한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은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면서 동시에 부응하는 미묘한 효과를 드러낸다. 시구와 시구의 연쇄 고리가 일반적 논리와 이성의 질서를 위반하기 때문에 다소 당혹스러운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수박이 있는 골목」을 보자. 이 시에서 ‘수박’은 ‘보란 듯 긴 혀를 잘라버린 촌철살인’의 사물이다. 이것은 어미의 자궁을 버리는 일이고 모태를 잘라내는 일이다. 이러한 자의적 선택은 새로운 존재를 향한 모험이며 일탈이다. ‘쓸쓸함’과 ‘공허’로 ‘노란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한 일이지만 매 순간 ‘나’를 위협하는 것은 ‘봄 바다까지 꽉 찬 달’이다. 여기서 ‘달’은 염원이나 지향의 사물이 아니고 극복의 대상이다. 그리고 ‘말랑말랑한 흙비 / 이 주문은 세 번 이상 외워야 한다.’에서 두 시구의 결합은 일반적 시상 전개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난다. 서로 무관한 듯 보이는 두 이미지는 빗금을 사이에 두고 발효의 시간을 거쳐 동일선상의 의미로 수렴된다. 이와 같은 이미지 전개는 다음 연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머리와 항문이 없는 아이’와 ‘꼭지가 마르도록 내민 혀’ 등은 수박의 외형 묘사를 통해 비극적 정황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간절한 소통의 시작’이었던 수박의 꼭지를 스스로 절단한 화자는 벌건 속을 안고 살아가는 불우한 주체이다. ‘인사를 했다 / 차를 몰고 갔다’는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거리가 상당히 멀다. 얼핏 엉뚱해 보이기까지 하는 시구이지만 여기서 화자는 다시 한 번 현재의 삶으로부터 일탈을 기도하는 것이다. ‘거미줄’ ‘금이 간 담장’은 현재 삶의 어두운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화자는 고통의 국면을 지나 ‘내 마음 어딘가에 촛불’을 켜고자하는 욕망의 주체이다.
주체의 최종 지향점은 ‘제 몸을 허공에 단 지구’나 ‘온전한 행성’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험난한 것이고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고통과 우울의 시간을 통과해야만 획득되는 또 다른 삶의 형식이다. 이 부분에서 화자는 ‘침향’ 이야기를 꺼낸다. 독립된 하나의 행성이 되기 위한 지난한 과정을 암시하는 것이다. 결국 ‘우울의 어깨’를 다독이는 것은 다름 아닌 화자 자신인 것이고 향을 묻고 인내하는 시간은 온전히 화자의 몫인 것이다. 그리하여 ‘고통’은 ‘사람의 몸을 빌려’ ‘마음’을 짓고, ‘촛불’을 밝히게 되는 것이다. 궤도를 이탈한 ‘수박’이 비로소 하나의 행성으로 자리 잡는 순간이다.
이 시는 이미지의 충돌과 교합을 통해 새로운 시의 미학을 보여준다. 전략적으로 사용된 빗금은 배면에 깔린 서정의 아우라와 맞물려 형식의 이질감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고 시의 완성도를 높이는 장치로 작용한다. 낯설지만 기묘한 감응력을 가진 한 편의 시가 ‘수박이 있는 골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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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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