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00) - 소멸과 재생의 미학 |
붉은 아침
박형준
오 나는 여명 속에서
집 하나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지
오 나는 마지막 순간에
가장 찬란한, 순진무구한 눈을 보았지
온통 빛으로 가득한 창틀 하나가
공중에 떠다니는 것을 보았지
역에서 누군가와 헤어진 것 같은
봄날 아침,
나는 창틀에 새 한 마리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네
새의 눈가에는 얼마나 많은
물방울이 스쳐갔는지
말이 되지 못한 말들이
안에서 들끓고 있었네
철거하고 남은 베란다 창틀에
작은 주검이 매달려 있다
풀씨가 아침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봄,
숨이 멎은 새의 내부에서 그렇게
구더기들이 붉은 창천으로 날아오르고 있다
# 소멸은 새로운 탄생을 예비한다. 사라지는 것은 그냥 멸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붉은 아침”을 물고 다시 온다. 이 시는 우주의 내밀한 질서를 보여주는 긍정과 희망의 시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의 화자는 철거되는 건물의 잔해를 보면서 “가장 찬란한, 순진무구한 눈”을 발견한다. 그 눈은 곧 “온통 빛으로 가득 찬 창틀”이다. 주변의 집들은 모두 무너지고 부서져 폐허가 되어 있다. 어디에서도 희망의 빛을 볼 수 없지만 화자는 그 자리에서 생명의 근원이며 미지의 날을 향한 시원의 눈을 발견한다. 설사 금이 가고 일부는 깨어진 창틀이라 할지라도 화자에게 포착된 사물은 새로운 생명의 불씨이며 신생의 눈빛이다.
2연에서 화자는 창틀에서 죽은 새를 응시한다. 응시는 한 곳에 머문 시선이 깊이를 획득하는 과정이며 사유의 부유물들이 침잠하여 알곡으로 여무는 과정이다. 화자는 응시를 통해 새의 눈물을 읽어내고 “말이 되지 못한 말”들을 보게 된다. 비록 새는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서 들끓고 있는 “말”에 주목하게 된다. 그 “말”은 단순한 언어 차원의 지시적 의미가 아니라 소멸하지 않는 생의 에너지이며 정신이다. 생동하는 정령, 영성의 힘을 함유하고 있는 하나의 씨앗인 셈이다.
여기서 화자는 다시 “풀씨가 아침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봄”과 “작은 주검”을 대응시켜 새로운 생명이 눈뜨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붉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구더기”를 통해 소멸 이후의 공간을 펼쳐 보여 주는 것이다. “구더기”는 “풀씨”의 다른 이름이며 그것은 “주검”에서 피어난 생명의 빛이다. 즉 화자는 사물의 소멸을 단순한 일회적 현상으로 파악하지 않고 순환과 반복의 질서에 따른 원운동으로 읽고 있다. 죽은 새의 몸을 파먹고 새로운 존재의 비상을 꿈꾸는 “구더기”는 이 시에 동력을 불어넣는 사물이며 인식 전환의 기제로 작용한다.
이 시에 우주론적 재생의 원리가 구체적으로 현현되었다. 단순히 현상의 표피만을 거론하지 않고 현상의 이면과 존재의 심층을 들여다 본 작품이 「붉은 아침」이다. 주검을 새로운 탄생으로 전환시키는 순환적 사유를 바탕으로 펼쳐 보인 상상의 영역은 이 시를 풍요롭게 하는 바탕이다. 또한 깊고 넓게 시의 외연을 넓힌 화자의 시선은 폐허의 현장을 생의 비의가 일렁이는 성소로 일군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 '문화저널21'에서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99) - 부활과 재생의 감각 (0) | 2013.12.11 |
|---|---|
| [스크랩] [자작시집엿보기] 카레이스키 연어 / 임 윤 (0) | 2013.12.11 |
| [스크랩] 이 아침의 시 / 정채봉 -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0) | 2013.12.10 |
| [스크랩] 울림을 주는 시 한 편 - 92 | 신미나 | 부레옥잠 (0) | 2013.12.10 |
| [스크랩] 지리산 시인들 1 | 허영자 시인 (0) | 2013.12.1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