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03) - 우주적 사유의 지평 |
푸른 방
문성해
풋완두콩 껍질 속에
다섯 개의 완두콩 방이 푸르다
완두콩을 훑노라니
껍질과 콩이 초록의 탯줄들로 연결되어 있는 게 보인다
작은 놈에서 큰놈까지 한 놈이라도 놓칠세라
껍질은 탯줄을 뻗쳐 악착같이 붙잡고 있다
밭 너머가 저수지라서였을까
엄마는 나와 동생을 나무에 묶어두었었다
해질 때까지 밭에서 쥐며느리처럼 몸을 말고 계시던 엄마
나와 동생이 조금만 안 보여도 허겁지겁 쫓아오셨다
딴 데 가면 안된다 여기 있어야 한다
엄마가 퉁퉁 불은 젖을 동생에게 물리러 올 때까지
동생과 나는 전지전능한 줄의 반경 아래서 놀았다
엄마가 훌쳐놓은 그 줄을 타고 개미들이 내려오기도 하고
탱탱하게 당겨지면 줄은 짧게 비명을 지르기도 하였다
엄마 젖퉁이에 푸르딩딩하게 뻗친 힘줄을
동생이 빨아먹는 거라고
그래서 동생의 똥이 푸르다고 생각하던 그때
하늘 전체가 푸른 방이었다
나무도 너럭바위도 저수지도 모두 초록의 탯줄로 땅에 매달려
우리들처럼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던 그때
세상은 막 물오른 완두콩 속처럼 안전하였다
푸르른 콩깍지 속에서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완두콩들
방이 깨지고 탯줄이 끊어지는 순간,
몇 놈이 훌쩍 어디론가 내빼고 만다
억지로 떼어낸 젖꼭지 같은 탯줄에서
연녹색 젖이 묻어난다
# 쉼 없이 살아 움직이는, 사물화 되기 전의 세계의 황홀을 본다. 하나의 시선이 폭력으로 작용하지 않는 곳. 시가 태어나는 탯자리 같은 곳. 바로 그곳에 문성해의 시가 있다. 거짓 포즈도 허황한 관념의 유희도 그의 시에는 없다. 천연의 시다.
현실에 밀착된 시들에서도 그는 목청을 높이지 않는다. 「자라」에서 투명한 절제의 미학을 보여주었듯이 볼썽사나운 정서의 과잉 노출을 노회하게 피해갈 줄 아는 그의 시적 기량은 많은 이들에게 공감의 물꼬를 터준다. 보편성과 진정성을 강조하는 시들이 놓치기 쉬운 것 중 하나가 개별 발화의 독자성이다. 그러나 그는 일반화의 논리에 함몰되지 않고 색다른 정서의 세계를 특이하게 보여준다. 익숙한 세계의 현상 속에서 원형적 사유의 뿌리를 시인만의 독특한 문법으로 드러낸다.
1연은 새로울 것도 낯설 것도 없는 일상의 평범한 풍경이다. 그러나 풋완두콩 껍질 속에 있는 완두콩을 훑다가 화자는 “탯줄”을 발견한다. 껍질과 콩 사이에 연결된 생명의 끈이다. 우주의 모성성이 발현된 부분으로 따듯하게 감싸 안는 “껍질”은 모태이며 자궁인 것. 그 안에서 생명의 뜨거운 혈맥과 우주의 섬세한 기운을 감지한 화자는 눈앞의 현상만 바라보지 않고 존재의 다른 양상과 연결지어 시의 공간을 확장한다. 상상의 힘에 탄력을 얻은 시가 이역의 층위로 도약하는 순간이다.
풍경 너머에서 존재의 이면을 응시하던 화자는 어릴 적 추억의 공간으로 이동한다. 시가 중층의 구조와 겹눈을 갖는 순간이다. 기억 속에서 우주의 “푸른 방”을 발견한 화자는 단순한 회상이나 추억담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관점에서 당시의 삶의 내용을 새롭게 해석하여 생명력을 부여한다. 그의 해석 능력은 우주적 파장과 무늬로 일렁이면서 얼핏 평면적 진술로 끝날 뻔한 상황에 입체성을 더하게 된다. “푸르딩딩하게 뻗친 힘줄”에서 다시 생명의 줄을 발견하고 “나무도 너럭바위도 저수지도 모두 초록의 탯줄로 땅에 매달려 / 우리들처럼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던 그때”를 추체험하게 된다. 여기서 체험의 내용은 화자의 사유의 깊이에 따라 우주적으로 확산된다. 단순히 껍질과 콩알의 차원이 아닌 모든 사물과 지상이 하나의 연결 고리로 이어져 있고 거대한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료한 이미지로 드러낸다.
과거에서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온 화자는 다시 콩깍지의 내부로 시선을 옮긴다. 그리고 태에서 떨어져 나오는 완두콩 몇 알은 “훌쩍 어디론가 내빼고” “억지로 떼어낸 젖꼭지 같은 탯줄에서 / 연녹색 젖이 묻어”나는 장면을 목격한다. 따듯한 모성성이 섬세하고 정밀한 시선에 포착된 사물에서 배어나온다. 감각적 묘사가 돋보이는 마지막 연에서 우주의 시원이 살아 숨쉬는 것을 본다. 생명의 진경이 수려하게 펼쳐지는 장면에서 존재의 영토는 확장되고 우주와 함께 호흡하는 따듯한 모성의 시는 새로운 행성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이 아침의 시 / 맹문재 - 이자의 거리 (0) | 2013.12.09 |
|---|---|
| [스크랩] 안도현, 그는 어쩌다 연탄시인이 됐나 (0) | 2013.12.09 |
| [스크랩] 이 아침의 시 / 김영태 - 남몰래 흐르는 눈물 24 (0) | 2013.12.09 |
| [스크랩] [시인 오은의 ‘vitamin 詩’ ①] 이제니의 ‘창문 사람’ (0) | 2013.12.09 |
| [스크랩] [시인 오은의 vitamin 詩] 이현승의 ‘경험주의자와 함께’ (0) | 2013.12.0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