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2002년 제4회 수주문학상 수상작

문근영 2013. 12. 7. 17:41

(2002년 제4회 수주문학상 수상작)
<대상>

 

나무 아래서


        임하혁(본명 임세한)

 

아버지는 죽어서도 여전히 키 큰 나무다
피가 돌지 않는 아랫도리는 썩고
그 곳으로 벌레들이 몰려와 집을 짓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고통을 호소한 적이 없다
가지마다 연둣빛 자식들을 올망졸망 매달고
크고 탐스러운 열매들을 키워내는 가을이면
아버지는, 한 그루 풍성한 세상의 나무였다
그러던 나무가 갑자기 잎을 떨궈버렸다
바지런히 물 뿜어 올리던 뿌리도 말라버리고
햇빛 맘껏 끌어당기던 연둣빛 눈들이
시들시들 땅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바람 많은 세상의 무수한 죽음 중에서
모든 소임을 다하고 눈을 감은 아버지
그 성스런 최후가 무척 평온한 듯 보였다
아버지를 닮은 것이 소원이지만
나는 안다, 아버지의 행적을 따라가자면
비바람 모진 세월 오래 견뎌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내가 짓는 집들은 너무 작고
눈보라를 감당하기엔 아직 허술하다는 것을
이 고요한 아버지의 비밀을 엿보려고
바람은 국망봉까지 찾아와
푸른 잔디의 등을 부지런히 쓰다듬는다
가난하지만 넉넉한 마음으로 잎을 피운,
단단한 열매로 세상을 장식한 저 나무들
아버지라는 이름만으로도 거룩한 희생임을
나는 안다, 바람 많은 날 뒤돌아보면
여전히 아버지는 한 그루 나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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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달을 키우며


        이인주

 

댑싸리꽃 울타리 너머 휘영청
보름달이 걸리던 밤
방문을 열고 아버지가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오셨다
맥고모자 깊게 눌러 쓴
앞이 안보이는 아버지는 불쑥
내 안에서 보름달을 꺼내 가셨다
안돼요 아버지, 그건 하나 뿐인 제 목숨이란 말예요
입안에서 또아리를 틀던 말들은 끝내 맥없이 주저앉았다
한 십 년은 족히 걸릴껴
산사열매 술냄새 풍기는 아버지는
그대로 문지방을 넘어가셨다
누가 마른하늘에 벼락을 치는지
옆구리가 마구 결리고 이날 이즉까지 달랑 달 하나
궁글려 시간을 키운 죄밖에 없는 년
방석을 깔고 오금저린 비망록을 쓴다
돌려주세요 아버지 동강난 달이라도 좋으니
흠집난 자리에 곱게 풀칠을 하고
한 십년 너끈히 품어 키울 터이니
들썩이는 장강의 물살 속 떠내려가는 환한 달
나는 멍청히 문설주에 기대어
달쪽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가누며
환장할 듯 눈물이 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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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강씨 아저씨
     -고향방문·3

 

           정순옥


어이, 이제 오는가
근디, 누구다요?
홀로, 동네 어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너무 가벼워진 몸 허공에 기대고
휘익 지나버리는 사람과 차 뒤꽁무니에
꾹꾹 세월 도장이나 찍고 있다

무서리가 몇 번 내린 뒤였던가
추수 끝난 번든 논배미 짚비늘
사람들, 몽글몽글 뭉개진 볏단 사이 들여다보며
위아래 동네 골목골목을 뜨겁게 달구었던 일
윗동네 자전거 여자와 몇 번 달빛을 몰래 본 것
그것뿐이었다고,
하얀 손사래 내어졌던 그 초겨울 이후
제방공사 사방공사장 돌밭그늘에 묻혀서
그 성긴 돌 틈으로 바람 밀어 냇물 강물
흘려보내느라 명절에만 나타나던
내 친구 아버지, 강씨

햇빛 쨍쨍한 토요일 오후
동네 앞 논배미마다 새 뿌리내린 볏잎들
파랗게파랗게 나풀거리는데
골목 어귀에서 비뚜루 돌담밑 해그늘 지고
해 묵은 짚비늘로
그냥 앉아 계시네 그렇게,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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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티푸나

 

         김정원
        


담양 수북에서 읍을 거쳐

순창에 이르는 24번 국도변에는
메타세콰이어가 나무굴을 이루고 있다
겨울이 되어야 침엽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이 활엽수들은 이국정취를 풍기며
지나는 사람들에게 큰 행복을 거저 준다
그런데, 30년의 행복을 삽시간에 앗아가는,
울화통이 터져 절로 욕 나오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고속도로 통과, 벌목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서명도, 사이버 공격도,
시위도 했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밤낮 기계톱 소리 요란하더니
황토피 흐르는 길만이 벌렁 발가벗고 쓰러져 있고
자동차 안의 찌푸린 얼굴들이
속력을 낸다
돌이켜보면
오늘 우리가 우리 된 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를 길러주고 지켜준
나무 논 쌀 가축 물 공기 흙 하늘 박테리아……  조상 같은
생명체들 아닌가
아름드리 나무를 인정사정 없이 베고
큰길을 내는 것은
생명을 업신여기는 천박한 문명인의 일,
조상을, 마침내 나를 죽이는 일
아닌가
옛날, 아버지는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감 한두개씩 남겨두시는 것을 결코 잊지 않으셨고
할머니는 대를 이어 지붕 위에 새들의 모이를 던져주셨지,
한 노승은 꼭두새벽 지팡이로 풀섶을 헤치며 가셨고
이 길을 따라 티푸나*의 깊이를 찾아서.


 

* 티푸나(Tipuna)는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말로 조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우리가 일컫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의 조상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 , 땅, 하
늘, 물, 공기, 곡식, 짐승 등등, 즉 지금 나를 있게 해준 모든 생명체를 의미한다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흐르는 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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