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제7회 수주문학상 수상작)
<대상>
밥 한 그릇의 자서전
이성훈
전집의 표지처럼 꽂혀있는
비석의 글꼴 바랜 자서전을 빼들어
책장에 드리운 일주문을 연다
목차에 찍힌 발자취를 훑어
기억으로 풀리는 페이지를 넘긴다
음절 한 조각 문장의 뼈 한 마디
골격이 작은 체구로 맞춰지고
행간은 새살로 돋아난다
환생하신 어머니,
밭일에서 흘린 땀을 들일 새도 없이
불을 지펴 지은 밥상이 차려진다
별무리를 숟가락질하는 달빛이
안마당을 두루 비추는 배경 속에
단란한 식사 풍경이 펼쳐진다
식구들의 밥을 푸다보면
늘 모자람에 물을 말아 드시는
어머니의 숨긴 허기가 읽혀진다
남루한 살림살이에 살림의 세월
밥 한 사발 소복한 무덤에서
밥알 같은 글자를 꼭꼭 씹어 삼킨다
그리움으로 휑한 늑골 한쪽에
퍼즐을 맞추는 자서전의 종결어미,
눈시울에 알알이 차오르는
눈물방울의 포만감에 젖어
모서리 닳은 뒷장을 덮는다
한평생 갓 지은 밥이셨던
어머니의 사랑을 대출받아
청계시립공원묘지를 내려오는
몸속 닦인 길이 환하게 열린다
(2005년 제7회 수주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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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고로쇠나무
배우식
그녀가 지리산 비탈길에 서 있다
웃통을 벗어젖히고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온
굶주린 봄이
물고기처럼 지느러미를 세차게 친다
그녀의 물살이 빨라지고
굶주린 물고기는
그녀의 뼈 속을 뚫고 지나간다
몸 속 깊이 열쇠를 밀어 넣은
굶주린 물고기가
그녀의 허리띠를 풀어헤친다
뇌관 같은 울먹한 슬픔위로
욕망에 굶주린 물고기가 내려앉는다
그녀의 밑동이 쩍 갈라진다
여자의 젖은 혓바닥이 뚝 떨어진다
물소리 흐르는
붉은 구름 하나가 혓바닥에 걸려있다
(2005년 제7회 수주문학상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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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태백 가는 길
황정순
자꾸 닥쳐 와 말꼬리 자르는 터널
손전화가 여러 번 기절하다 일어선다
생도 저렇게 캄캄할 수 있어 닫히고
빠져나오기를 거듭하다 산나리꽃 환한
벽촌 거뜬히 올라오기도 할 것이다
증산역, 상하행이 교차한다
엇갈리는 게 생이다
저릿하게 관통하는 고한-사북
녹슨 화차들 갱목에 걸려 깜깜히 저물고 있다
무너진 갱 속처럼 알 수 없는 날들이나
비탈 부신 저 은사시숲같이 반짝이는 날 있어
방부제처럼 검은 곰팡이 견디는 것이리라
첩첩, 수차례 재를 넘는다
넘어 참꽃물 든 한 여자 만나러 간다
앓고 나 부스럼도 나지 않을 면역의 땅
거기 아직 햇옥수수 같은 유년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여기쯤이다
시름시름 폐광 된 생 고쳐 눌러앉을
한 뙈기 화전밭 같은 여자, 그 여자네 집
날마다 푸른 대문 열어 붉은 등을 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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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水菊 (수국)
박옥춘
한여름 그늘막이 아래
흰 꽃숭어리 무리져 피어있다
머리 위 숯불 다 사위고
허물어진 입술 위 시간은 졸며 지나고
런닝 바람에 홀쭉한 젖무덤 꽃판 일다
둘러앉아 마흔여덟 패를 돌린다
열두 달이 왔다 가며 끝물 화투 무르익다
희희낙락, 흐물거리는 잇몸 사이로
돌아보면 하루 같은
날들, 흰 꽃술로 피어나는 해름
패가 폈다 접히는 동안
막걸리 잔이라도 들면 그만
묻어둔 비가 한차례 긋고 지나면
평상 위 더위는 한풀 꺾여
시간은 저대로만 흐르고 흘러
긴 하루 저 입으로 들고
도타운 향기 멀리 길 밝다
<가져온 곳 : 디지털 도서관>
http://wsl.kll.co.kr/element_express/pg_serialview.php?no=6523&pg=101&pn_0=2&pn_1=20&sn_0=2&sno=85354
<심사평>
시의 연옥에서 금강석으로 살아남기
응모자의 이름을 가리고 익명으로 예선 심사를 한 후 그대로 본심에 마흔 명의 작품을 올리는 수주문학상 심사 방법은 사뭇 이채로웠다. 알음알음으로 심사하는 다른 문학상에 비하여 그 공정성이 돋보였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너무 살벌한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아주 없지도 않았다.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을 쓴 사람의 시인의식과 어떻게 결부되고 있느냐 하는 점도 잣대가 될 수 있을 텐데, 등단 여부를 구분하지 않고 받은 응모작은 결과적으로 익명으로 심사를 받을 때는 운명적으로 <신인>의 눈금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는 한계성도 있었다.
응모작들의 수준은 매우 고른 편이어서 다들 나름대로의 장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시적 상상력이 너무 세분화 되고 세밀화 되어 삶의 자질구레한 요소들을 나열해 놓은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관습화된 상상력을 그냥 추종한다거나 이미 낡아버린 비유를 그대로 반복하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띄었다. 사물의 진정한 참모습은 이미 보이는 것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그것을 전복시키고 파괴하여 이제까지 아무도 보지 못한 사물의 모습을 파악하는 것이다. 자신만이 작동할 수 있는 시의 새로운 엑스레이를 발견해 내는 일인 것이다.
대상으로 뽑힌 '밥 한 그릇의 자서전'(이성훈)은 모성에 대한 눈물겨운 사랑을 담담하게 그리면서도 아주 신선한 비유로 서정시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되었다. 우수작으로 뽑힌 '고로쇠나무'(배우식)는 대상과 끝까지 겨룬 작품으로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상상력의 궤적이 참으로 신선하였고, '태백 가는 길'(황정순)은 활달한 어조와 참신한 비유가 돋보였으면서도 너무 고지식하게 구성을 끝낸 것이 아쉬웠고, '水菊'(박옥춘)은 한 폭의 문인화처럼 곱다랗고 야무지지만 약간은 안일한 시선으로 사물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좋은 시를 쓰는 일은 괴로운 일이다. 좋은 시인이 되는 일은 불행한 일이다. 연옥과도 같은 시인의 생애에서 누구는 재가 되고 숯이 되고, 또 누구는 금강석이 된다. 시여! 악마여!
- 황동규&오탁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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