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04) - 비극의 대상화
고정된 사내
여 정
벽에 붙박인 그 사내는 사각의 틀 속에 갇혀 정육점의 고기마냥 걸려 있다. 머리 윗부분이 잘린 오른쪽 귀가 잘린 그는 시선을 왼쪽 아래에 두고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는다. 입술에는 초승달을 베어 물고 왼쪽 새끼손가락에는 링반지를 끼고 턱을 괴고 있다. 링반지 속에는 그 사내의 영혼 같은 한 여자가 가루가 되어 섞여 있다. 그 사내는 하반신이 없다. 그녀에게 갈 수 있는 길은 하반신과 함께 사라졌고 그녀 또한 그 길과 함께 사라졌다. 그는 늘 벽에 붙박여 꿈결 같은 그 길을 그녀와 함께 걸었던 그 마지막 길을 다시 거닐곤 한다. 그 길에는 풀냄새가 초록초록 싱그럽고 그녀의 젖빛 살냄새 또한 향긋하다. 간혹 그 사내가 뜬눈으로 가위에라도 눌리는 날이면 도로를 이탈한 트럭이 풀들을 짓누르고 그녀의 젖빛 살냄새를 붉은 피로 물들이며 달려온다. 그럴 때면 풀들조차 비명과 함께 하반신이 잘려나간다. 그런 날이면 벽에 붙박인 그 사내의 고정된 두 눈 속에서 피눈물이 마른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를 내며 흘러나오고 그 사내가 붙박인 그 벽조차 붉게 붉게 물들어 노을이 된다.
# 죽은 비유는 상투적 관용어의 무덤이다. 시가 살아 숨쉬기 위해서는 시어의 다의성이 필요하다. 다의성은 시에 입체감을 부여하고 해석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열어 놓는다. 그러나 관용어는 다의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규정된 정서와 의미만이 출입하는 낡고 오래된 건물이다.
여 정은 사유의 방식과 표현의 기법이 독특하다. 여러 시편을 통해 고유한 시적 영토를 개척하여 그만의 개성적인 세계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 「고정된 사내」는 중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구조이다.
액자 속에 있는 사진의 주인공은 한 사내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실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내의 외모는 온전한 모습이 아니다. “정육점의 고기”처럼 만신창이의 형상을 하고 있는 대상을 화자는 바라본다. “머리 윗부분이 잘린 오른쪽 귀가 잘린” 사내는 사진 속에 갇혀 있다. 외형적으로는 실제의 사진 같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사고 후 참혹한 모습이 덧씌워진 형상으로 보인다. “사각의 틀”도 현실적으로 보면 하나의 액자이지만 손괴된 육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구속의 공간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사내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은 한 여자이다. 그녀는 한때 사내의 영혼 같은 존재였으나 현재는 실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하반신과 함께 사라진 존재로서 지금은 애틋한 추억의 대상일 뿐이다. 사내는 그녀와 함께 했던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풀냄새가 초록초록 싱그럽고 그녀의 젖빛 살냄새 또한 향긋”했던 과거를 산다. 그러나 그 시간은 지극히 짧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현재의 고통과 악몽을 지우는 역할을 하지만 곧 사내를 해일처럼 덮치는 것은 끔찍했던 사고의 현장이다.
“도로를 이탈한 트럭” 으로 인해 “비명과 함께” 사라진 사내의 다리와 죽음의 상황에 이른 여자의 모습은 견디기 힘든 악몽이다. 그러나 사내는 “피눈물”을 흘리며 현실을 견딘다. 화자가 바라보고 있는 정황은 상상 속에서 견인된 비극적 모습이고, 이 시에서 사내와 여자는 시종 객관화 되어 나타난다. 바로 이 점이 시의 비극성을 고조시키는 기능을 한다. 철저하게 객관적 대상의 사건으로 설정하여 화자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일관한다. 자칫 정서 과잉의 상태로 흘러 시의 감동을 줄일 수 있는 소재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묘사하여 시의 감동을 증폭시키고 있다.
또한 「고정된 사내」는 실제와 상상 사이의 거리를 조절하여 시적 효과를 높인 작품으로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열린 구조의 텍스트이다. 상반신만 보이는 사진 속 모습과 “그 사내는 하반신이 없다”의 실제 상황이 공교롭게 연결되어 의미의 영역이 확장된다. 살아 움직이는 풍경을 잘라내는 것이 사진의 속성이라고 볼 때 다리 절단의 이미지는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풍경에 대한 일방적 폭력으로 야기된 절단, 죽음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연계되어 시에 입체성을 부여하고 비극을 객관화한 작품이 「고정된 사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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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 '문화저널 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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