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07) - 사랑의 부재와 소멸
안개주의보
이용임
먼저 당신의 코가 사라진다
물렁한 벽으로 나누어진 두 개의 검은 방에서
채 스미지 못한 내 체취가 흘러나온다
당신의 입술이 사라지자
망설임은 맨발로 배회한다 허공을
눈 가리고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당신의 귀가 하나씩 흘러내린다
나의 목소리가 차가운 물방울로 고인다
당신의 심장까지 도착하지 못한 말들이
천천히 얼어붙는 사이
당신의 눈에 담긴 내가 녹는다
손발이 뭉그러지고 머리카락이 나부끼고
숨결이 아득한 윤곽이 되는 동안
당신은 뼈만 남은 얼굴이 된다
바람도 없이 삭는
당신은 검었다가 희었다가 이제 투명하다
당신의 부스러기들이 창을 가득 메운다
불투명한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발소리가 들린다 저벅,
저벅
# 무료 시식 코너에 시가 있다. 아무나 와서 먹을 수 있다. 공짜다. 무료다. 거저다. 개도 와서 먹을 수 있고 소도 와서 먹을 수 있다. 게다가 먹다 맛이 없으면 뱉어버리면서 욕을 한다. 무한천국이다. 시의 신세가 망쪼다. 노래 한 곡 듣는 데도 돈 몇 푼이 필요한데 시는 무한리필이다. 와서 먹어주는 것만도 고마워한다. 블로그나 카페에 떠돌면 인기스타라도 되는 줄 안다. 시인들을 모두 연예인으로 만들면 좋겠다. 자존이 없다. 당당히 저작권을 요구해야 하는 마당에 너무나 싸구려로 취급받는 데도 별 고민이 없다. 갈수록 시는 한낱 자위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죽어라고 시를 써서 길거리 노점에 공짜니까 아무나 가져가라고 내던져 놓은 개뼈다귀나 소뼈다귀 쯤인 것이다. 공짜 맛에 길들인 독자는 시집을 사보지 않는다. 인터넷에 떠도는 시 몇 편을 읽고 그 시인을 평가한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이것이 우리 시단의 현주소다.
아름다운 시간들의 무덤, 그 후의 극도의 상실감과 아픈 기억을 되짚으며 걷는 상흔의 편린들이 「안개주의보」에 가득하다. 지금 이곳에 사랑은 부재한다. 부재의 공간에 남아있는 것은 다만 몇몇 추억과 “당신”에 대한 감정의 조각들이다. “당신”은 사라지고 기억의 곳간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나’의 흔적이다. 대상의 육체에 스미지 못한 좌절과 실의가 화자를 휩싸고 돈다. 불길하고 어둡다. 소멸로 향하는 기억들은 죽음의 그림자를 동반한다. 시인은 고기 굽는 자리에서 “화장장의 연기”를 맡는 특이한 후각의 소유자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당신”의 코, 입술, 귀가 차례로 녹아 휘발하고 화자의 길고긴 방황의 시간은 이어진다. “나”의 목소리로 또한 “차가운 물방울”로 남는다. “당신의 심장까지 도착하지 못한 말”들 탓이다. 이제 대상과 나는 분리된 존재로 서로가 너무나 멀리 있는 객체이다. 화자는 낯선 외계로 대상을 추방한다. 그것이 자신이 사는 방법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토록 간절하게 다가갔던 “말”들은 지금은 한 점 “물방울”로 고여 있을 뿐이고, 화자는 죽음의 공간으로 진입한다. 이번에는 대상이 아니라 주체의 소멸이다. 완벽한 상호 적멸이다. 서로의 기억 속에서 깨끗이 소멸하는 뼈아픈 과정이다. 내 안에서 죽은 “당신”은 이제 한낱 육탈한 뼛조각일 뿐이고, 비바람에 썩고 삭아가는 차가운 물질로 변환되어 “불투명한 풍경 속으로” 사라진다. 화자는 지금 그 발소리를 들으며 현실의 질곡과 통증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난다.
아픈 사랑의 기록이다. 그러나 이 시는 또 다른 직관을 내장하고 있다. 「안개주의보」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안개’는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사물이다. 사랑만이 아니라 삶 전체가 늘 오리무중의 안개임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안개는 잡을 수도 없고 내 의지대로 머물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안개는 신의 숨결처럼 우리에게 조용히 다가와 비극적 삶의 양태를 낮은 어조로 속삭이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을 ‘무료 시식 코너’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필자의 마음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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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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