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19) 파괴와 일탈의 시학
블랙커프스홀
─ Pour Malena
김하늘
망가져야 해
거울에 반사된 내 알몸이 식상해 그럴 때면 애인의 물건을 훔치곤 하지 대리운전 번호가 찍힌 라이터나 면도기 또는 자위를 하고 난 뒤의 휴지뭉치 그게 아니어도 좋아 잘 입지 않는 드로즈 팬티나 페라리 블랙 냄새가 미미하게 묻어나는 커프스 한 짝 비교적 작고 사소할수록 좋아 눈치 채지 못 할 정도의 가벼운 것들
훔쳐온 가위는 유용했지 내 흑발 머리를 들쭉날쭉하게 만들었어 생머리 여자들은 주로 간교하거나 신경질적이지 올곧은 몸을 돌보거나 지키지 난 그런 여자들에게서 매너리즘을 느껴
지겨워지겨워지겨워(데이트가) 지겨워지겨워지겨워(브래지어가) 지겨워지겨워지겨워(흔들리는 젖가슴이) 지겨워지겨워지겨워(지겨워)
더 망가져야 해
훔쳐온 식칼에 내 이름을 쓰고 싶어, 기억이 안 나, 사람들이 나를 말레나라고 불러, 그제야, 내 이름을 나는 영영 몰라, 섹스는 질려, 자궁으로 식칼을 밀어 넣는 편이 낫지, 거기엔 환멸이 없어, 뻔하지 않은 상처와 흉터는 아름다워
오늘밤,
난 드로즈 팬티를 입고 장미 덩굴을 밟아
살갗을 터트리는 그 수많은 가시들,
발바닥에 엉기는 피가 속살거리며 되묻곤 해
넌 아직도 죽지 못했니?
병신,
오,Merde!
나날이거부하는것들이많아졌고그거부에내가있고네가있어(도대체얼마나더저질이어야하는거지?)거울은깨졌고사실난점점사라지는연습중이야죽을날짜를고민하는여자는까다롭지도않아깨진거울의파편에침이나뱉자개같이똥이나빨아!(항문이주는구원도퍽낭만적이지않아?)
내일은 또 어떤 방식으로 미쳐볼까
담배는 어디다 뒀는지
# 폭발 직전의 수류탄이다. 어디로 튀어 날아갈지 모르는 폭탄이다. 안정적인 보법과 상투화된 전략으로 표피적 수사에 열중인 다른 시들과 비교할 때 확연히 눈에 띄는 작품이다. 폭탄의 제조자도 낯선 이름, 신인이다. 자기만의 고유한 색깔이 뚜렷하여 시의 존재 목적이 교란이라고 한다면 그 목적에 아주 충실한 텍스트이다. 동질의 정서가 아닌 이질의 정서로 무장한 김하늘 시인은 파괴적 언명으로 첫 발을 뗀다.
“망가져야 해”
그렇다. 망가지지 않고 환멸과 오욕의 세계를 어떻게 건널 것이며 미지의 공간을 어떻게 열어갈 것인가. 시인이 선택한 방법론이 거칠더라도 그 손끝에서 태어나는 세계는 전율과 매혹으로 다가오는 신천지인 것이다. 익숙한 몸에 대한 “식상”함은 애인의 사소한 물건을 훔치는 등 일탈의 행위로 이어진다. 훔친 가위로 검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쑹덩쑹덩 자르고 자학과 파괴의 행동도 불사한다. 그리고 “올곧은 몸을 돌보거나 지키”는 보통의 타성에 젖은 여자들에게서 환멸과 염오의 감정을 갖게 된다. 현상에 대한 감정의 표현은 “지겨워지겨워”의 반복으로 나타난다. 직설적 언술을 랩처럼 되풀이하면서 더 망가져야함을 강조한다. 시의 안팎을 흐르는 정조의 강도가 고조된다. 일상적인 섹스조차도 이제 지겹고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는 극도의 환멸 속에서 “자궁으로 식칼을 밀어 넣는” 섬뜩한 도착적 행위로 발전한다. 그러한 행동을 선택하게 되는 배경에는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된 일상의 질서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된다.
“뻔하지 않은 상처와 흉터는 아름다워”
화자가 지향하는 실체가 명료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타자와 유사한 경험조차도 화자에게는 거부의 대상이 된다. 집요하게 존재의 정체성을 지향하는 화자는 “발바닥에 엉기는 피”로부터 “넌 아직도 죽지 못했니?”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결국 화자는 죽음의 상황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강력한 거부와 세계와의 대결을 통해 존재의 정체성을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거부의 욕구가 강렬해지고 현실 파괴와 저항에 대한 의지는 시적 주체를 극한의 상황까지 몰고 나간다. 이러한 자발적 일탈과 거부의 행위의 종착지는 파괴를 통한 재생의 욕구 실현이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슬그머니 딴청을 부리며 시적 현실로부터 발을 빼는듯 보이는 것은 정서의 수위 조절을 통해 한 발자국 비켜서서 현실을 조망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시적 전략이다.
김하늘 시인은 낯선 행성은 아니다. 지금 그녀는 김언희, 김민정, 김이듬 시인 등 뛰어난 선배시인들이 개척한 길 위에 서 있다. 무임승차하여 편하게 가는 길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 김하늘 시인은 곧 잊혀지는 시인이 될 것이다. 두 선배시인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그것이 김하늘 시인의 최대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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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 문화저널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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