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25) 경계의 무화
플라타너스
임곤택
나무에게는 생활이 없다
다만 정중해서 저게 나를 위해 서 있다는 생각
온종일 나를 기다렸다는 생각
오늘 아침 하늘은 가을 하늘 같고
계단을 오른 무릎이 다음 계단의 모서리같이 단단할 때
모서리가 숨이고 근육이고 얼굴이라는 생각
누가 나를 기다린다는 생각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
그렇게 한없이 정중한 나무를 보고
울컥 눈물 쏟아지려는데
내 안에는 그늘도 빛도 없어 슬플 이유도 없고
맹장을 떼어낸 자국이 가장 큰 상처인, 나를
누가 기다려 주고 있다는 생각
그가 기다린 것은 뻣뻣한 몸이고 단단한 모서리라는 사실
그렇게 계속 기다려 나무가 풍선이 된다면, 나무가 하얀 사탕이라면
세상은 변하는 것이어서 나도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
달라지고 달라져서 문득 나무인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섰다는 느낌
앉지도 눕지도 않고 단단한 모서리로 꽉 차서는
기다린다는 기다렸다는
그 한 생각
# 시는 늘 현실의 공고한 질서를 파괴한다. 둘 사이는 상극이다. 나무를 나무로한정하지 않고 그 너머를 기웃거린다. 그리고 멀어진다. 관습과 변화를 모르는 습성으로부터 일탈을 시도하여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다. 그곳엔 이곳의 표정과 이곳의 감정이 없다. 낯설고 이물스러운 풍경들이 곳곳에서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난장이다. 멋대로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과 원시의 숨결이 뜨겁게 붐비는 곳이다.
하나의 사물에 시선을 집중하는 시는 답답하다. 단정하고 가지런한 모습을 형상화하지만 고정된 이미지에 갇힌 시는 광장을 잃고 골방에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시는 무한히 확장하는 생물인데 하나의 틀을 만들어 대상을 가두어버리는 경우 시는 질식사한다. 물고기가 아니라 생선이나 동태가 되는 순간이다. 시 안에서 대상이 자유롭게 숨 쉬고 뛰어놀게 해야 하는데 수족을 잘라버리고 규정해버리는 순간 그곳에 시는 없다.
임곤택 시인은 나무에 대한 생각을 시작으로 포문을 연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정조준이다. 시의 밀도가 높고 치밀하여 화자에게 포획된 나무는 부동의 자세다. 그런데 그 부동이 왠지 슬프고 아프다. 나무가 사물의 한계에 구속되지 않고 정서의 분열을 일으키며 파장을 일으키는 순간이다. 이때 나무는 나무를 떠나 제3의 공간으로 이동한다. “온종일 나를 기다렸다는 생각”을 갖게 한 나무, 그래서 화자가 “눈물”까지 짓게 하는 나무의 정체는 무엇일까. 독자의 상상력이 자유롭게 발동한다. 그러므로 답은 각자의 몫이다.
이어서 아무 조건 없이 한없이 정중하게 화자를 기다려주는 나무에 대한 사유는 반전의 전기를 맞는다. 나무가 “풍선”과 “하얀 사탕” 으로 몸을 바꾸는 변신의 국면이다. 시의 숨통이 탁 터지는 순간이다. 몸이 무거웠던 시가 날개가 돋아 날아오른다. 화자의 상상력은 현상의 이면으로 더 깊이 진입하여 “나”가 “나무”로 돌변한다. “앉지도 눕지도 않고 단단한 모서리로 꽉 차서는”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도발적 사유가 경이롭게 빛을 발하는 찰나이다. “나무”와 “나”의 자리가 전도되어 현상의 질서는 새롭게 재편되고, 두 사물의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에서 존재의 생기가 이채롭게 반짝인다.
플라타너스를 바라보면서 화자는 오랜 시간 여러 가지 생각을 궁굴린다. 주체의 시선으로 바라본 대상이 의식의 층위로 유입되면서 발효와 생성의 과정을 거쳐 나타난 새로운 존재의 얼굴은 단순한 현실 복제나 재현이 아니라 창조의 영역에 나타난 낯선 풍경이다. 임곤택 시인이 변신 모티브에 착안하여 유연한 상상력으로 그려낸 “플라타너스”는 해방과 초월의 표지이며 제한적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욕망의 표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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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편집위원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 '문화저널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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