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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늘, 그 순정한 치유의 시간 / 홍성란

문근영 2013. 10. 14. 01:19

 

 

그늘, 그 순정한 치유의 시간 / 홍성란

 

 

시란 한숨 같은 것 


시가 뭐냐 묻는 어린 기자에게 팔순의 초정은 ‘나도 그걸 몰라 여태 시를 쓰노라’ 했다.

젊은 기자가 내게 와서 느닷없이 “도대체 시가 뭡니까?” 그래요. “여보, 기자 양반!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놓고 내가 당황하기를 바랐나? 시가 뭐냐는 그따위 질문에는 초등학교 이 학년만 되면 누구나 정답을 말할 줄 안다. 또 평생 시를 써온 노인도 답하지 못하는 게 바로 그 질문이다. 나도 그걸 알려고 아직도 노력하는 중이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 그랬어요.


— 《그 뜨겁고 아픈 경치》(초정 김상옥 기념회, 2005) 260면.

 

 

문득 누가 나에게 시가 뭐냐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 글쎄……. 시란 살며 내뱉는 한숨 같은 건 아닐까.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한숨이거나, 날숨 같은 것. 사느라고 들이마신 일들 뱉어내지 않고는 살 수 없어 내뱉는 한숨 같은 것. 시란 그런 것 아닐까. 한숨.


그러니까 시는 잡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 그 자체여야 한다. 한숨에 어디 잡것이 섞일 수 있겠나. 다만 들숨이 내 몸을 돌아 나올 때는 보이지 않는 마음만이 묻어나온다. 마음. 시는 누가 쓰는가. 마음이 쓰는 것 아닌가.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거짓 없어야 진정한 시가 아닌가.

 

아니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시도 있다는 것이다. 진정성 있는 시가 되려면 마음에서 우러나는 시여야 한다는 것이다. 삿됨(邪)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공자님도 《시경》의 시 삼백 편은 한마디로 말해서 나타낸 생각에 사악함이 없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子曰 詩三百에 一言以蔽之하니 曰思無邪니라).


용서는 나에게 베푸는 호의

상처가 났다
온몸 구석구석 그늘이 졌다

상처에 가시가 돋아
내가 나를 찌르고

겹겹이 쌓였던 시간
와르르 무너진다


다시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넉넉한 햇살과 부드러운 입술에

상처가 꽃이 될 수 있을까
꽃 필 수 있을까 


—김선화 〈사랑할 수 있을 때 좀 더 사랑할 걸〉(《불교문예》 봄호)


사랑할 수 있을 때 좀 더 사랑할 걸 그랬다. 그땐 그것이 사랑인 줄 몰랐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는 이토록 그리운 사랑이었다. 산다는 건 어찌 보면 후회다. 내 그림자를 떼어버릴 수 없는 것처럼 후회도 내 삶에서 떼어버릴 수 없어, 후회하며 살아가는 게 인생. 다시는 붙이고 다니지 말아야지 해보지만, 해가 나면 또 내 곁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업처럼 따라붙는 후회. 누가 살아가며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으리. 오죽하면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할 바에야 해보고 후회하자’는 말이 있을까.

 

이 나무의 꽃이었던 시간들과 넉넉한 햇살과 부드러운 입술로 다가오던 시간들이 왜 상처가 되었을까. 상처가 제 몸에 가시를 만들고 그 가시가 제 몸을 찌르는 동안 사랑의 시간들은 무너져 내리고 온몸이 어둠으로 덮였으리. 그늘의 시간들. 그러나 다행이다! 그 그늘의 시간들이 있었기에 사랑이 사랑인 줄 몰랐던 그 시들했던 시간들이 그리워지는 건 아닐까. 그늘의 시간은 이 나무를 성숙하게 한 시간들이다.

 

이 그늘의 시간을 지나는 동안 제 몸의 상처에서 난 가시가 제 몸을 찌르는 고통을 체험했다. 누군가 원망하고 미워하는 시간들은 결국 자신을 해치는 시간들이다. 상처를 생각하고 상처가 꽃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이미 상처 준 그를 용서했다는 건 아닐까. 용서는 내 마음 편하기 위해 내가 나에게 베푸는 호의다. 용서하는 마음은 시를 쓰게 하고 상처가 꽃이 되게 하리. 조개의 상처가 진주가 되듯이. 그늘, 그 한숨 속 치유의 시간들이 고맙다.

 

시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들이마신 일들 참을 수 없어 내뱉는 한숨 같은 것. 이 한숨 속에 용서가 있고 화해가 있다. 지난해 《시조시학》 여름호에 실린 〈정경(情景)〉에서도 이 화해와 용서 그리고 감동의 순수를 본다. 
 
햇살도 술렁대는 교도소 안마당에/ 가족과 함께하는 운동회가 열렸다/ 손꼽아 기다리던 날 발그레한 얼굴들// 청백군 편을 나눠 달리기, 줄다리기/ 어릴 적 운동회로 돌아가 맘껏 뛰며/모처럼 푸른 함성이 울타리를 넘는다// 이제는 부모님을 등에 업고 달릴 차례/ 온 힘을 쏟아 부을 오늘의 하이라이트/ 아무도/ 달리지 않고 걷는다/ 주르륵, 봄비 내린다


— 김선화 〈정경(情景)〉(《시조시학》 2012년 여름호)

 

 

아무런 꾸밈없이 본 대로 느낀 대로, 교도소 안마당에서 펼쳐지는 눈물겨운 운동회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 순간만은 수인(囚人)임을 잊고 천진하게 부모님을 업고 달리는 경기. 이 용서와 사랑을 담은 오늘의 하이라이트에서 누구도 힘껏 달리지 않는다. 행여 늙으신 부모님을 등에 업고 넘어질까, 조심조심 걷는다. 하늘도 감동하셨나 보다. 목메어 흐르는 눈물처럼 주르륵, 봄비가 내린다. 나도 눈시울이 뜨뜻해진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동안

세상에 날 밀어 넣고

황급히 올라가신,

오늘은 어머니 기일

제사떡 돌리듯이

담 넘어 동냥젖으로

낯붉히던 홍기삼촌


— 강경훈 〈엘리베이터〉(《시조시학》 봄호)

 

 

어떤 참조도 없이 문자만으로 시를 읽는다. 어머니는 날 낳아 놓고 세상 뜨셨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세라, 열린 문밖으로 날 밀어 넣고 황급히 하늘로 가신 어머니. 오늘은 어머니 목숨자리에 내가 올라앉은 그날이다. 제삿날 제사떡 돌리듯이 담 너머 이웃 젖어미에게 홍기삼촌은 낯붉히며 동냥젖을 구하였겠다. 미안하다. 고맙다.

어떤 감정도 배제한 채 생사의 갈림길에 선 모자를 묘사하고는 놀랍게도 “엘리베이터”라는 제목을 달았다. 문이 열리고 문이 닫히는 동안 한 생명이 태어나고 한 생명은 목숨을 거두었다. 강보에 싸인 나를 안고 다니던 시절이 동냥젖을 구하였을 홍기삼촌에게는 낯붉히던 시간이었음을 알겠으나, 어머니를 본 일이 없으니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없겠다. 하지만 “황급히”라는 말에는 핏덩이 내려놓고는 젖 한번 물리지 않고 올라가신 어머니에 대한 슬픈 원망이 담겨 있다. 죄스런 미안함이 담겨 있다.

 

같은 지면에 발표한 〈소방수첩 7-어느 봄날〉에는 시인의 이런 마음이 배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에는 한밤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도 아들에겐 연락을 말라는 어머니 이야기가 나온다. 아들 걱정하는 어머니의 사연 하나가 복어의 맹독보다 아프다는 것이다. 해독제도 없다는 복어의 테트로도톡신이라는 독은 봄에서 여름에 이르는 산란기에 최고조로 깊어진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는 “깊어져서”를 4회나 반복하고 있는데 이 깊어만 가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긴 한숨을 낳았고, 이 긴 한숨들이 모이고 모여 〈엘리베이터〉와 같은 절박하고도 간명한 가편이 되었으리라.


몸으로 때워 갚는 빚

복수초 필 무렵엔 신바람 절로 나서
쑥 따라 냉이 따라 매운 눈을 부비며
가난도 기죽지 않고 퍼렇게 살아온다

출생이 빚인 것을 목숨으로 갚고 살자
고지 먹는 봄에도 눈부신 금빛 태양
희망은 죽을 줄 몰라 그 둘레에 싹튼다


— 서연정 〈고지 먹는 봄〉(《열린시학》 봄호)

 

 

출생이 빚이라니! 고지 먹는 봄이라니! 고지는 논 한 마지기당 일정한 삯을 정해 놓고, 모내기부터 마지막 김매기나 수확할 때까지 일을 해주기로 하고 미리 받아 쓰는 삯, 또는 그 일을 뜻한다. 땅 주인은 ‘고지 준다’ 하고 일꾼은 ‘고지 먹는다’고 한다. 미리 삯을 받아 쓰니 일꾼은 빚쟁이다. 몸으로 때워 빚을 갚아야 한다. 고지 자리품을 팔아야 하는 것이다. 옛날 땅 한 뙈기 없는 촌부들은 보릿고개에 쌀 두 섬을 고지 먹고, 추수 때까지 자리품 파느라 봄부터 가을까지 내내 허리 펼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 옛날 누가 이렇게 노래했으리. 우리 같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춥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냐. 불 때지 않고 솜옷 털옷 입지 않아도 살 것 같은 이 봄날. 복수초 꽃피면 쑥도 냉이도 퍼렇게 살아올 것이니, 산나물 들나물 나물이라도 해먹고 살 수 있는 게 어디냐. 허수아비처럼 남의 논일 밭일 해주고 얻어먹을 수 있는 것만도 어디냐고, 출생이 빚인 것을 목숨으로나 몸으로나 갚고 살자 했으리. 목숨이 무엇이라고 고지 먹는 봄에도 눈부신 금빛 태양처럼 희망을 품고 살았으니, 목숨이 무엇이라고!


그 옛날에는 고지 먹는 봄이 와서 일 년을 몸으로 때우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엔 신용카드를 기계에 넣고 현금서비스를 받아 고지를 먹고 산다 해도 한 달을 넘어 살 수가 없다. 자리품 팔아 때울 수 없는 오늘의 고지는 어떻게 막아야 하나, 시인이 묻고 있는 건 아닐까.

매화를 좋아해서 봄이면 “섬진마을에 가” 매화(매실)를 사다가 “꽃잎”서껀 “부신 햇살”서껀 매화 “항아리를 묻”는다는 이 시인은 “천 겹 어둠 속에서 매화가 익는 동안” 속내 “웅크리고 앉은 이도/ 혀 밑의 바늘 쌈지를 녹여내게 되리라”(〈매화 항아리〉《문과 벽의 시간들》 2001) 했다. 매화를 좋아하는 만큼 달콤하고 향기로운 매화주를 좋아하는 시인은 혀 밑의 바늘쌈지 같은 말도 녹여낼 줄 아는 것이다. 그러기에 “가난도 기죽지 않고 퍼렇게 살” 수 있고 “고지 먹는 봄에도 눈부신 금빛 태양”은 떠올라 “희망은 죽을 줄” 모르고 “싹트는” 것이다. 매화가 살을 녹여 맛과 향기가 우러나듯이 시인이 마음을 녹여 시를 쓰는 것이다. 순정한 시를 쓰는 것이다.


순정한 마음, 천불천탑

자네, 천불천탑을 운주사에 가야만 본당가
내 눈엔 천지사방이 다 천불천탑이대
궤짝에 지성으로 쌓아올린 저 사과도 천불천탑이고
저기 저 리어카에 폐지 주워 쌓아올린 것
저것이 천불천탑이 아니면 뭐랑가
부처님 마음으로 보믄 다 천불천탑이제
그런다고 사람들 일만은 아니제
가지에 찢어지게 매달린 저 홍시
저것은 감나무가 쌓아놓은 천불천탑 아니것는가?


— 이해완 〈천불천탑〉(《유심》 4월호)

 

 

천불천탑. 천 좌(座)의 부처를 모시고 천 기(基)의 탑을 쌓아올리는 것은 무언가. 천불천탑은 무량무수의 여래를 표상한다. 깨달음의 완성에 도달한 부처. 이 부처가 무량무수 가득한 세상. 부처의 마음이 지극한 세상. 세상 바라는 바가 있으면 천 좌의 부처를 모시고 천 기의 탑을 쌓아올려 발원한다. 이것이 중생의 마음이다. 부처의 자비가 지극한 세상에서 부처님 가피처럼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치성을 드리는 것이 중생의 순정한 마음이다.

 
“자네, 천불천탑을 운주사에 가야만 본당가.” 그렇지,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쌓아올린 마음자리를 운주사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건 아니지. 충북 영동 장시인네 사과밭이거나 가락동 청과시장이거나 궤짝에 지성으로 쌓아올린 저 사과도 한 해 사과농사를 결산하는 마지막 천불천탑이며, 일 없고 돈 없는 가난한 노인들이 폐지를 주워 쌓아올린 옹색한 리어카의 폐지탑도 천불천탑이다.

 

한 푼이라도 내 힘으로 벌어 사람답게 써보려는 중생의 마음도 천불천탑이다. 아무렴 천불천탑이지. 그런다고 사람들 일만 천불천탑인가. 가을 감나무 가지 찢어지게 매달린 홍시도 천지자연의 덕을 받아 한 해를 잘 살아낸 감나무의 천불천탑이고, 가지 치고 벌레 잡아 곁에서 따뜻한 눈길 보내던 농군의 마음도 천불천탑이다. 가을 감나무 흐드러진 홍시를 보며 길가는 나그네들의 “아, 좋다! 아, 곱다!”는 순정한 마음도 천불천탑이다. 가을 감나무가 고맙고 이 땅의 농심이 고맙다.


그렇지, “부처님 마음으로 보믄 다 천불천탑이제.” 일찍이 “귀뚜라미여,/ 잠시/ 울음을/ 그쳐다오// 시방/ 하느님께서/ 바늘귀를/ 꿰시는 중이다// 보름달/ 커다란 복판을/ 질러가는/ 기/ 러/ 기/ 떼(〈가을밤〉)”라고 참신하게 노래한 이 시인은 부처님이나 하느님만 상대하는 것 같다. 이 〈천불천탑〉을 보시고 부처님도 기특하다 하실 것 같다.   


 

시의 기준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가릴 수 있는 기준이란 없다고 했다. 각자의 기질에 따라 각자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의견이 달라질 뿐이며 또한 그것들은 결국 각자의 생각일 뿐이라 했다. 인도의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시론에 적용할 수 있다. 어떤 이는 한숨같이 흘러나오는 시를 쓰고 어떤 이는 연구하여 시를 쓴다. 어떤 이는 말을 버리는 시를 쓰고 어떤 이는 말을 가꾸는 시를 쓴다. 이런 시도 좋고 저런 시도 좋다. 다만 참고할 것은 연암 박지원의 충고다. 


연암은 〈공작관문고자서(孔雀館文稿自序)〉에서 이명과 코골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린아이가 마당에서 노는데 갑자기 피리 부는 듯 생황 부는 듯 신기한 소리가 들렸다. 제 귀에서 나는 소리를 같이 놀던 친구에게 귀를 맞대며 들려주려 했으나 친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아이는 제 귓속에서 나는 소리를 친구가 알아듣지 못한다고 답답해하며 한탄했다. 제 귓속의 이명 현상을 어떻게 남들이 알아볼 수 있을까.

 

저만 아는 시를 써놓고 이 멋진 작품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경우와 같다. 코 고는 사람은, 잘 때 아주 드라마틱하게 코를 골아 옆 사람이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지경인데도 정작 자신은 모른다. 남들은 다 알지만 정작 코 고는 당사자는 모르는 것이다. 제 시에서 뭔가 부족하거나 잘못된 점을 누가 알아보고 일러주면 불쾌하게 생각하고 원한을 가지는 경우와도 같다.

 

이럴 땐 ‘양약(良藥)은 고구(苦口)이나 이어병(利於病)이라, 충언(忠言)은 역이(逆耳)이나 이어행(利於行)이라.’ 공자님 말씀을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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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란
srorchid@daum.net / 시인.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으로 등단. 시조집 《겨울 약속》 《바람 불어 그리운 날》 《춤》 등이 있고, 시조선집 《명자꽃》 《백여덟 송이 애기메꽃》 시조감상에세이 《하늘의소리, 땅의소리―백팔번뇌》 등이 있다. 유심작품상, 중앙시조대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 수상. 현재 성균관대 강사, 유심시조아카데미 원장.

출처 : 함시 복수초
글쓴이 : 김정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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