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녘의 자화상
- 채수영 시집 『사랑, 울렁이는 그 이름에게』
최선옥
1. 전제
'시는 노래이자 동시에 울음이다.'
이 명제 앞에서 곰곰 생각해볼 때 시는 세월을 빼놓고 논할 수 없을 듯하다. 세월은 시인의 개인적 체험의 시간이자 삶을 지탱해온 고단한 기록의 기간이며 동시에 여정의 기간이기 때문이다.
위의 진술대로라면 시는 온전히 삶에서 온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삶이 시이며 세상이 온통 시라는 말이리라. 어울리지 않는 것들, 부조화의 것들이 무질서 속에서도 질서와 평정을 이루며 나름 섞이지 않는 모습의 삶이 한통속이 되어가는 것이리라.
시가 지극히 일상적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정신이 깃들어 있는 어떤 것, 즉 존재론적 의미를 담기 위해서 시인은 생활 속에서 공유한 경험에 대하여 나름의 운행질서를 좇아 의미를 찾아 전달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현실 속에서 시를 찾는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세계에 대한 탐닉이기보다는 일상적인 현실, 달리 말하면 구체적으로 삶의 애환을 맞아 감싸 안는다는 것이다. 깊고 정교하게 삶을 들여다보고 드물고도 색다르게 삶의 의미를 찾아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시인의 시가 전하는 감동의 파장은 은근하면서도 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2-1. 생의 반추에서 오는 일련의 감정들
채수영 시인의 시는 시인자신의 삶의 기록이다. 삶의 기록이라 함은 시인의 자전적 보고서라는 말과도 통한다.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모든 것을 이루고 난 후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과정, 즉 노년의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자화상을 들여다보면서 자기 안의 다른 타자를 인식하기도 하도, 삶의 진리내지는 순리를 터득, 이를 간결하고 솔직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생의 일련의 과정 속에서 오는 이런저런 감정과 의미를 담는 것이 시라고 할 때, 시는 죽음으로 가고 있는 인간의 존재조건에서 비롯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을 들여다보면서 삶의 의미는 물론 자신의 본모습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기억을 반추하는 것이다.
시인의 시세계는 시적 대상의 다양함과 접속하면서 결국 시인자신의 존재가치 내지는 성찰, 혹은 의미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시적대상과 나와의 융합 내지는 동화이며 결국 시인자신의 존재론적 성찰을 할 수 있게 하는 생의 무늬인 것이다.
시적 대상과 시인은 별개가 아니라 상호관계망 속의 통일, 혹은 동일화다. 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이행의 역설적 논리가 아니라 소멸에 대한 안쓰러움 내지는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에서의 대상의 쇠락에 대한 위무이자 슬픔을 다독이는 과정에서의 자화상을 돌아보는 일이다.
창공을 짊어지고 매달려
대봉이나 홍시로 태어나지 못해
욕망의 입맛에서 외면된 채
시린 풍경으로
기껏 한입 쪼고 날아가는 새들의
짧은 오장을 채우기 위해
조롱조롱 매달린
땡감
내 삶의 풍경화
-「숙명」전문
시간은 침묵으로 깊이가 되고
하루가 꼬리를 잇는 다시
하루가 이어지면
조을음을 감추지 못해 흔들의자에
육신을 맡긴 아버지의 하루 이젠
멀리 강 안개가 자욱하고
건너고 건너면 닿을 수 있는
길은 언젠가 열리겠지만
초조가 눈 뜨는 날은
먼 산조차 조은다
산으로만 가는 길이 아니다
외로움의 기둥을 붙잡고
응시로 바라보는 초점의 향방
시름은 끝내 문을 열고 다가오는
멀리 있는 자식들은 아버지의 고독 옆에
서 있기를 두려워하는 오늘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여전히 흔들리는 의자에는
바람이 차갑다.
-「아버지의 의자」전문
'대봉이나 홍시로 태어나지 못해'도, '조롱조롱 매달린/땡감'이어도, '창공을 짊어지고 가는 '숙명'을 받아들이고 수긍해야 하는 것이 생이다. 시인의 시적 표현이 겸손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알지만 생은 이렇게 '매달리고' 버텨가는 것이리라. 그 생의 과정과 숙명은 시 「아버지의 의자」에서 잘 드러난다.
'아버지'가 마침내 가 닿는 '길'이란 생의 마지막 길, 즉 죽음일 것이다. 그 길이 '언젠가 열리'겠지만 시인이 아버지의 그 길로 가는 과정은 '초조'의 감정을 감출 수 가 없다. 이는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감정이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고독'과 두려움 또한 아버지와 동일시되어가는 과정에서의 감정이다. 아버지의 자리가 위태로움은 '흔들리는 의자'로 대변되고 있다.
'황혼'은 소멸이자 기움이다. 그러나 황혼은 '첫사랑' 같은 울렁임이며 시작이다. '황혼 앞에서' '붉어지는' 시인의 처연한 긍정이 가슴 한편을 시리게 한다. 그래서 시인은 '황혼'과 '사랑'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황혼 앞에 서면 울렁이는 마음이
붉어지는 첫사랑 같네
보일 길 없었던 아득한 깊이도
돌아보아 멀리 있는
뒷자락이 마냥 그리운데
채색 깃든 캔버스엔 어스름으로
먼 마을 불빛이
어둠과 입을 맞추는데
다시를 선택할 수 없는 화면에
가득해지는 사랑만을 위해
꿈을 그리고 싶네
내 황혼 앞에만 서면
긴 여정으로
꿈길 넓히는 노동에 이 밤은 마냥
행복해지는 이름이 될 것 같네
-「황혼 앞에서」전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골목길이었네
가도 가도 끝나는 길이 없어
서성이다 서성이는 발길 마침내
바람 지난 자리에 남아있는 향기
만나는 일조차 침침한 이제
돌아보는 일이 추억인데
몇 개의 강물과 몇 고비의 언덕에
허기진 노래 가슴 저미는
가락으로 다가왔던
그리움 묻은 손짓들을 찾고 싶네
사랑은 사랑만큼 갈증이었고
떨어지면 그 거리만큼 애타는, 하여
돌아보아도 다시 떨어지지 못해
울렁이는 사연을
어디에 묻어야 하는가
모르는 일만 가득해라
-「사랑, 울렁이는 그 이름에게」전문
2-2. 자연과의 동화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환경이며 시적 주요소재인 자연. 자연은 이미 서정시의 역사가 되어버린 친숙한 존재이며 또한 가장 친근한 시적 대상이다.
시에서 자연을 빼놓는 것은 핵심을 외면하는 것과 같다. 그만큼 자연은 일상에서, 시에서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자연그자체로 시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 기댄 인간이 그것을 인간사에 대비하고 대입해, 신비하고 순수한 자연을 소통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소통의 대상이란 인간이 자연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을 의미함이다. 자연을 시적으로 표현했다함은 자연을 생명자체로 보고 인간과 동등한 자격으로 대함은 물론 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얻은 것들을 시적으로 가져왔다는 말과 같다. 자연과 감정을 나눈다 함은 인간의 감정이 자연의 장구한 틈새로 스며들어 상상너머의 가치나 절대성에 대한 희망을 섞어 넣었음이다.
이렇게 볼 때 자연은 이미 인간을 포함한 지상 모든 만물을 가리키는 것이며 운명을 지닌 모든 존재의 통칭인 것이다.
산에 오르면
산은 내가 되고 나는 다시
산이 된다. 땀을 흘리고
가파른 호흡을 재우면
기어이 산은 정상을 지워주고
내려가는 길을 보여 주는
산은 항상 거기 있을 뿐
말을 감추고 자태만 보여주는
변화의 그림이 항상 아름답다
-「산」전문
'산에 오르면/산은 내가 되고 다시/산이 된다'는 것은 물심동체이자 물아일체이며 동시에 자연과의 동화다.
산과 내가 하나가 되었을 때 비워주는 산의 '정상'은 내가 생의 어느 지점에서 정상에 섰음이고, 다시 산이 '내려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은 내가 다시 정상에서 내려감을 의미한다. 그 길은 늙음일 수도 있고, 죽음일 수도 있고, 모든 욕심을 비움으로 봐도 무방하리라.
'말을 감추고 자태만 보여주는/변화의 그림'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시인의 자각이자 자아성찰이며 따스한 시적 시작이다.
꽃이 바람을 만나
피어나는 이름일지라도
문 열어 세상을 떠도는 향기
가슴에 집을 짓네
바람이 꽃을 만나면
풀숲에 숨었다 웃고 있는
흔들림으로, 이웃에 소식을
전하는 길 따라 모두
함께 가기를 재촉하는 손짓인데
꽃이 바람이고, 바람이 꽃이 되는
세상 가득 채우는
흔들림조차 가벼워도
바라보는 마음에서는
숨 쉬는 일조차 황홀해지네
-「꽃과 바람」전문
걱정이라네, 바람 부는 날은
바라고만 있어도 초조한
꽃들의 안부
흔들리는 멀미에
마음 조바로워 안절부절, 멀리
언덕에는 푸른 옷깃이 날리는데
(바라봄은 그렇게 흔들리고 있네)
작별만의 아쉬움이 아니네
깊이 깊이 사랑했던 여정은
바람에도 다칠까 저어스런 흔들림
이별이사 운명이래도 두 눈에 담겨진
사랑의 깊이를 띄워 보내는 마음에
바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라, 하여
어머니같은 눈으로 하냥 바라볼 뿐
걱정이라네, 바람 부는 날은
꽃들의 안부가
-「꽃들의 안부」전문
'꽃이 바람을 만나'도, '떠도는 향기'일지라도 '가슴에 집을 짓'는 시인의 자각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바람'은 부정적, 역설적 관념을 내포하고 있지만 시인에 의해 긍정으로 탈바꿈하는 사고의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의 진술은 꽃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적 시각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바람의 입장에서의 진술인 2연에서 본다면 '꽃을 만나' '웃고 있는' 스밈의 작용이라 할 수 있다.
'꽃과 바람'은 결국 '꽃이 바람이고' '바람이 꽃이 되는' 혼연일체, 물아일체의 '황홀'의 경지에 드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 두 항목을 가만 들여다보면 모두 생명이라는 탯줄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채수영 시인의 시의 바탕을 들춰보면 자연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 차있어 독자의 가슴을 질퍽거리게 한다. 시인의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시는 단순히 자연물에 대한 예찬이나 재충전의 힘의 대상이 아니라 삶과 연결된 동격체인 것이다.
2-3. 희망을 향하여
과거는 현재를 지탱해나가기 위한 거울이다. 과거를 돌아보고, 또한 과거를 비판하거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현재의 상황까지 살펴내는 것은 단지 지난 시절의 회한이나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나를 위한 것, 아니 미래의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 그 과정이 부끄럽고 비관적이고 비판거리지만 그것은 든든한 자의식을 세우는 일인 것이다.
현실과 현존이 불안하고 불안전하더라도, 불만과 부끄러움과 회의에 들더라도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 과정을 거치며 작품 곳곳에 희망을 섞어 넣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지러운 일이 다반사
진실은 항상 루머에 재빨리 포장되어
어둠을 생산하는 디지털시대
차라리 원시시대의 뼈있는 진실이
아쉽다
괴물들이 대로를 활보하고
시시콜콜 곁가지를
날마다 키우는 일로 주장이 실종되었고
진실은 다시 오합지졸의 전유물이 되어
바보가 존경받는 생산물목이
되었다
(중략)
가슴이 아픈 사람들은 가슴앓이를 멈출 수가 없다. 그래도
희망의 불은 가슴에서 타올라야 한다. 진정한 사람의 가슴은
희망의 불길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목마른 사람들은 오늘도 해지기 전에
마지막 기도를 올리는 일로 가슴이 탄다.
내가 사는 세상은 혼돈과 아우성이 혼재하여
흔들리는 이름으로도 기도의 제목은 충분하다
-「내가 사는 시대」부분
내 시엔 마침표를 가급적
찍지 않는다
끝나는 일이야 어차피 다가오는
순서의 함지(咸池)라
배회하고
방황해도
어디가 종점인지 길이 길로 이어진
서로의 얼굴을 익히는 이별, 다시
기대의 풍선을 띄우는 날마다
쉼표를 껴안고 잠이든 내 얼굴
언젠가 마침표가 될 것
-「마침표」전문
새 옷을 갈아입는 날은
몸이 가벼웠다 마음
출렁이는 소리와 함께
바다처럼 흔들리고
멀리서 오는 소리가
빛나는 기억으로 오려는데
몇 번의 내왕이면 나와는
작별일까 알 수 없는
그 고백의 찬란한
소란을 위해 오늘은
이름만을 되뇌인다
-「봄을 기다리며」전문
작금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모순과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한 부정의 시각 내지는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적 자각이다. 비판의 날카로운 칼날이 다시 희망으로 돌아서고, 결국은 그것을 향해 가고자 하는 외침이나 바람이다.
'디지털시대' 문명이 좋다하지만 그것은 때로 부정과 모순의 '어둠을 생산'한다. 그렇기에 순수와 무공해와 천연의 상태인 '원시시대'를 동경하고 그 시대의 '뼈대 있는 진실'을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대는 의견은 많지만 쓸 만한 '주장이 실종'된 '오합지졸'의 '바보'가 존경받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머뭇거리거나 멈출 수는 없는 일, 비록 '가슴앓이'를 한다 해도 '희망의 불'이 타오르도록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시인의 자신의 시에 '마침표를'찍지 않음은 결국 끝없는 자기갱신이라 할 수 있다. 끝없는 도전이다. 달리 말하면 창작상의 자기개발이다. 조금은 쓸쓸하지만 시인자신의 감정을 뒤로 감추고 긍정으로 가고자 하는 의연한 몸짓이다. 마침표를 찍지 않음은 '봄'을 기다림이다.
3. 결어
인간사가 늘 그렇듯 기쁨을 조우하지만 근원적인 우울과 슬픔, 환멸과 욕망 등 부정적인 것들과도 매일 얼굴을 마주대해야만 한다. 그런 일련의 감정들과 조우하면서 시인은 치열한 삶의 현장을 벗어나 생의 극적 단면을 시로 가져오기도 한다.
그 극적 단면이라는 것이 결국 삶에서 채용한 것이기에 파도치는 바다처럼 격정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다 물러난 모래벌처럼 고요하기도 하다. 그런 속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삶을 응시하고 성찰하여 자신만의 보기 드문 언어로 시의 성을 쌓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은 물론 시적대상의 본질과 함께 본질 속에 숨은 속내까지도 탐색, 시적으로 드러낸다.
채수영 시인의 시들은 격정적인 생의 기간을 지나 깊고도 고요한 삶의 성찰의 시간을 거침으로써 시가 주는 울림은 더욱 깊은 파장을 일으키며 다가온다.
한 몸속에서조차 갈등과 조화를 반복하며 수없는 다툼이 지속되는 것이 인간사인 것처럼 생은 수많은 사연과 갈등의 연속이지만, 시인 노년 즈음의 시는 교요와 평정 속에서 삶의 여운을 농도 짙게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고 세상 앞에 무릎 꿇는 자아를 드러내는 허무주의를 드러내기보다는, 부정하고 외면하기보다는 현재의 상황을 긍정으로 받아들여 스스로를 다독이며 혼란스러운 것들 속에 질서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는 혼란 속의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질서가 아니라 질서를 의식하고 창조하려는 명중한 작가적 의식이며 태도이다. 이것은 정신적 엄격과 명료한 세계관을 시인이 오랜 세월동안 터득했음이다.
그 터득의 과정에 동화되어 가르침을 주는 대상은 시인의 일상이며 시인주변의 자연이다. 시인의 시가 지극히 일상적이라 함은 현재의 생활 속에서의 감정의 공유라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삶의 진정성 내지는 삶의 의미에 닿고자 한목소리를 낸다.
자연이 시적대상이라 함은 자연의 의미성, 즉 훼손되지 않는 자연이 시인의 시적 원형이 되고 있음이다. 시인의 시적 대상의 원형인 자연은 시인과 감정을 나누는 공간이자 화합의 공간이다. 자연이 품은 생물과 무생물이 어우러지고, 거기에 인간의 본성이 맛닿아 맑고 천진스런 공간이 생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창조의 화합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과장하지 않고 보여지는 그대로의 속에서 독자가 스스로 파악하고 느끼게끔 감정공유의 징검다리를 놓는 시인의 역할이야말로 혼란스런 이 시대의 소중한 본보기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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