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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박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없다〉

문근영 2013. 9. 25. 08:29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
박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없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박준의 시편들에는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꾀병〉)이라고 말하는, 사뭇 조숙한 아이가 겪어내는 슬픔으로 자욱하다. 그 슬픔은 같은 밥을 먹고, 가난이라는 중력을 함께 견딘 까닭에 어느덧 “서로 핏속의 염분이 비슷”(〈동지(冬至)〉)해져버린 가족에게서 비롯한다. 이 염분은 눈물의 짠맛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연상되었을 것인데, 그것은 감정 농도를 지시한다. 가난이 곧 불행은 아니지만 그것은 자주 다양한 형태의 불행에 노출시키는 원인이다. 박준은 가난이라는 말 대신에 “결핍의 누대(累代)”(〈유성고시원 화재〉)라는 말을 쓴다. 가족은 결핍의 누대 속에서 그것이 만든 모욕과 억압을 견딜 동력을 만든다. 아버지-어머니-형-누나-나로 이루어진 그 연대의 한 축이 무너진다. 시집에 따르면, 먼저 떠난 것은 아버지와 누나다. 그중에서 누나의 죽음은 서정적 주체의 마음에 슬픔으로 깊게 팬 골을 남긴다. 〈오늘의 식단〉은 죽은 누나를 벽제의 화장장 화구 속으로 밀어 넣고 느낀 슬픔에 대해 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 하는 것이 별리 뒤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한다. 이를테면 죽은 자를 화구에 밀어 넣고 나온 살아남은 자들은 식당에 몰려가 “할머니보쌈이나 유천칡냉면”을 시켜 꾸역꾸역 먹는 것인데, 슬픔에도 불구하고 산 자는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산 자가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 해야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겨우 “달게 자고/일어난 아침/너에게서 받은 생일상을 생각”하는 것과 같이 소소한 기억들의 잔해를 끌어안고 슬픔을 견디는 일뿐이다.

시인은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과 “폐가 아픈 일”, 그리고 “눈이 작은 일”, “눈물이 많은 일”을 가치의 기준에서 동렬에 놓는다. 이것들이 동렬에 놓일 수 있는 가치의 기준은 “자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작은 눈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시인은 “좋지 않은 세상”에서 그 “당신의 슬픔”에 대해 생각한다. 그 생각함의 바탕 감정은 애틋함이다. 시의 화자는 “당신의 슬픔”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갖고 있다. “당신”은 시인이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고 믿은 슬픔의 주체인데,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모호하다. 시인이 사랑했던 사람일 것이란 추측은 가능하지만 그게 애인인지 가족 중의 한 사람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둘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지만 슬픔의 방계(傍系)로 엮인 것은 분명하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왜 “좋지 않은 세상”인가? 애도의 무의식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의 정의와 도덕 그 자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순간 세상은 정의와 도덕이 부재하는 좋지 않은 세상으로 전락한다. 시의 화자는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신의 부재가 만든 슬픔에 젖어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 슬픔은 ‘나’의 슬픔에 ‘당신’의 슬픔이 얹어진 것이기에 두 겹이다. 슬픔을 슬픔 속에서 관조하는 일은 두 배로 버겁고 힘들다. 시인은 그 힘듦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같이 “아득하다”고 말한다. 아득함은 슬픔의 복잡함에서 연유한다. 또한 그 아득함은 견뎌야 할 슬픔의 무게에서 생긴 아득함이고, 이전 삶과 이후의 삶의 거리가 멀어서 생긴 아득함이다. 그것이 아득하기에 당신을 오래 생각하는 일은 “이를 악물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불가피한 감정이라는 측면에서 슬픔은 삶이라는 선물에 대한 대가다. 아무도 슬픔에 젖으려고 하지 않지만, 슬픔은 삶에 틈입하고 삶을 적신다. 슬픈 사람은 대개는 혼자다. 그래서 슬픔과 외로움은 짝이다. “모든 슬픔은 누군가로부터 남겨지는 것과 관련이 있으니, 사람들이 극심한 슬픔의 고통 속에서 혼자라고 느끼는 것은 물론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슬픔을 이야기하고 슬픔을 깨달을 때, 사람들이 뼛속 깊이 외로움을 느낀다는 점이다.”(론 마라스코 《슬픔의 위안》) 슬픔은 살아남은 자에게 정서적 면책특권을 준다. 슬픔은 살아남은 자가 먼저 떠난 자에게 보내는 사랑과 연민을 표현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슬픔을 통해 살아남은 것의 수치와 상실의 상처를 견딜 힘을 얻는다. 슬픔이 자랑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타인에게 무해한 것이고, 마음이 아름다운 자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슬퍼하는 자는 슬픔의 큰 바다에서 헤엄치는 자와 같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그 바다를 가로질러 건너편의 언덕으로 갈 수 없는 듯하다. 그들은 분노와 타협, 메마름, 그리고 정서적 암흑상태를 겪는다. 하지만 슬픔은 날이 갈수록 옅어지고 묽어진다. 슬픔에도 유효기간이 있으니까 슬픔의 태풍은 마침내 잠잠해진다. 언제까지 슬퍼할 수만은 없다. 꾸려야 할 생계가 있고 이어가야 할 관계들이 있는 까닭이다. 박준은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고 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고, 일기장에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고 적는다. 이게 슬픔 이후의 삶이다.


박준(1983~ )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2008년 계간지 <실천문학>으로 등단하고, 2012년 문학동네에서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펴냈다. 이제 서른 살이고, 막 첫 시집을 펴낸 이 젊은 시인에 대하여, 나는 아는 바가 없다. 오직 이 펼쳐진 시집 한 권밖에는. 이 시집에서 가난에 얽힌 가족 서사를 읽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일제 코끼리 전기밥솥으로 밥을 해먹는 반지하 집”(〈관음(觀音)〉), 경주로 떠난 “수학여행에 못 가고 벤치에서 몸을 김밥처럼 말아 넣는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천마총 놀이터〉), 누이라고 짐작되는 “간호조무사 총정리 문제집을 베고 누운 미인”(〈미인처럼 잠드는 봄날〉), 죽어서 “밤이 되었을 것”이 분명한 아버지, 자정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선탄(選炭) 일을 마친 둘째 형”(〈태백중앙병원〉), 공업고교에 진학을 앞두고 금속 세공사의 아들, 아파트 수위 아들, 덤프트럭 기사의 아들과 어울리는 “머리색을 노랗게 바”꾸고 “대중목욕탕에서 남성용 스킨을 훔쳐” 나온 사춘기 소년(〈잠들지 않는 숲〉) 같은 구절들을 퍼즐 조각처럼 맞추면, 가난이라는 중력을 함께 견디고 있는 한 가족의 서사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ㅡ 출처 :『톱클래스』 (2013. 9)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이온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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