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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형도] 바람은 그대 쪽으로

문근영 2013. 7. 22. 11:24

바람은 그대 쪽으로

 

기형도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단편의 잠속에서 끼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生의 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燈皮를 다 닦아내는 薄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

 

출처 : 시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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