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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패의 근거지였던 청룡사 청룡사는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청룡리에 있다. 고려말 나옹선사는 청룡사를 중창하면서 한 마리 푸른 용이 오색빛 찬란히 빛나는 상서로운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르내리는 것으로 보았다. 이적에 한껏 고무된 나옹선사는 산이름을 서운산, 절이름을 청룡사라 고쳤다고 한다. 그 옛날 청룡사는 사당패의 근거지였다.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과 김윤배의 장시 <사당 바우덕이>는 다같이 청룡사 사당골에 터를 잡았던 사당패를 소재로 삼고 있다. 소설 <장길산>에서 청룡사는 주인공 길산의 연인인 묘옥이 끼어있는 고달근 패의 근거지로 나온다. 허구적 인물이긴 하지만 묘옥은 바우덕이를 연상케 한다. 남사당패의 여성 꼭두쇠였던 바우덕이(본명 김암덕, 1847~1870)는 흥선대원군에게 당산관 정 3품의 옥관자를 받을 정도로 기예가 출중했던 재인이었다. 폐병에 걸려서 꽃다운 나이인 스무 세살에 그만 세상을 떠난 그의 삶은 삶의 근거를 뿌리 뽑힌 채 이곳저곳을 부초처럼 떠돌아야 했던 조선시대말기 민초들의 삶의 전형이었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물길 따라/ 사람 따라/ 하염없이 흘러온/ 서럽고 비천한 세월// 길에서 태를 자르고/ 길에서 배시시 솜털을 벗고/ 길에서 초경을 맞으며/ 길에서 살아와/ 길은 밥이고 잠이며/ 길은 꿈이고 강이며/ 길은 정분이고 산맥이며/ 길은 장단이고 한숨이며/ 길은 가락이고 눈물이며/ 길은 너름이고 채찍이며/ 길은 버슴새였나니/ 사당패 떠돌이 연분홍 길은/ 저승패 삭정이 가슴에 나 있는/ 하염없는 물길 몸길"김윤배 장시 '사당 바우덕이 57~58쪽) 황석영의 <장길산>을 처음 읽었던 저 1970년대 중반부터 청룡사는 늘산 내 여행 목록의 첫머리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1990년에 나온 김윤배 시집 <떠돌이의 노래>와 한참 뒤에 나온 김윤배 시인의 또 다른 시집 <사당 바우덕이>를 읽고나자 내 희망은 더욱 간절해졌다. 무슨 일이나 그렇지만 여행은 특히 계획이나 순서대로 이뤄지는 법이 드물다. 여행이란 본시 우연이나 충동에 의해 이뤄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내 여행은 우연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고은의 시 '청진동에서'의 한 구절을 빌리자면 "우연은 어느 날보다 잉잉 거린"다. 안성 시내에서 얼마나 달렸을까. 청룡 저수지를 지나자 길 가운데 버티고 선 오래된 비 하나가 나와서 길손을 맞는다. 청룡사의 중수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다. 청룡사로 오르는 길은 아무런 관문이 없는 싱겁기 짝이 없는 길이다. 일주문은 물론 금강문이나 천왕문도 없다. 부지불식간에 절 안으로 불쑥 발을 들여놓게 된다. 너무 쉽게 드나듦을 허락한다 싶었을까. 입구에는 일주문 대신 아담한 문간채 한 채가 서있는데 문간채 가운데로 난 통로를 통과하면 깜짝할 사이에 부처의 땅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다.
자연에 기댄 민중적 건축방식 청룡사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건물로 추측된다. 앞면 3칸·옆면 4칸으로 된 팔작지붕 건물이다. 측면이 정면보다 한칸이 더 크다. 다른 절의 대웅전 기둥처럼 청룡사 대웅전 정면의 기둥들 역시 반듯하고 곧다. 그러나 측면과 뒤로 돌면 사정이 딴판이다. 기둥들은 죄다 땡볕쬔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위 아래의 굵기마저 같지 않다. 마치 두 사람의 장사가 무너지려는 지붕을 떠받치려고 온힘을 다해 두 팔을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은 사찰의 중심 전각이다. 당연히 최상품의 재목을 써서 지어야 원칙이다. 그렇다면 왜 청룡사 대웅전을 지은 도편수는 이런 못생기고 구부러진 나무를 기둥으로 썼던 걸까. 저렇게 구부러진 형태로 어떻게 청룡사 대웅전은 몇 백 년동안이나 온전하게 그 틀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절의 재정이 어려워서 곧고 바른 나무를 구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재정에 구애받지 않을 만큼 큰 절인 구례 화엄사는 왜 울퉁불퉁한 모과나무 원목을 그대로 써서 구층암을 지었단 말인가. 이런 건축이 가능했던 것은 한국인이 가진 원초적 미의식을 빼놓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다소 길지만 허균이 쓴 <선인들이 남겨놓은 삶의 흔적들>이란 책에 나오는 '마음의 자로 지은 건물'이라는 글의 일부를 인용해보기로 한다. 조선시대 무가(巫歌) 중에 '성주풀이'라는 것이 있다. '성주풀이'는 집과 집터를 맡아보는 성주신을 노래하는 것인데, 가사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높은 산에 남글 찍고 낮은 산에 터를 닦아 / 휘여진 남근 굽다듬고, 굽은 남근 휘이게 다듬어 / 횡포(橫?) 대포를 먹여 내여, 아흔 아홉 궁(宮) 지을 적에…." 이 짧은 노래 한 대목에 한국인이 지닌 선천적 대의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용마루, 도리, 기둥 재목은 소나무 씨앗이 싹터 자라서 된 것이다. 소나무는 자라면서 휘거나 굽기도 한다. 그러나 기둥이나 대들보로 쓰는데 별로 아쉬움이 없다. 휜 나무는 굽다듬고 굽은 나무는 휘이게 다듬어 쓰면 되기 때문이다. 현실로 나타난 결과는 사람의 능력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능력을 내어 쓰게 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좌우된다. 청룡사 대웅전의 기둥이나 대들보가 비정형인 것은 목수가 올곧게 치목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굳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결과이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 안될 것은 이런 건물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직접 집을 지은 목수뿐만 아니라 부처님을 뵈러 절을 찾는 수많은 불자들, 그 법당에서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드리는 스님들, 나아가 이 절을 후원했던 많은 사람들까지도 법당의 그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청룡사 대웅전은 우리에게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차이가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그 차이란 창조적 사고 유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측면이 더 아름다운 청룡사 대웅전은 우리에게 사물을 바라볼 적에 정면보다는 측면을 살피라고 권고한다. 우리가 청룡사 대웅전에서 확인하는 것은 직선 아닌 곡선의 아름다움이다. 투박하고 거칠어서 오히려 역동적으로 보여지는 아름다움이다. 거칠고 투박하고 꾸밈이 없는 성정이야말로 민중이 가진 속성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가는 덕목이다. 조선시대 천민집단들의 집단인 재인들의 근거지에서 가장 민중적인 건축과 마주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필연인 것이다.
제화갈라보살은 연등여래로 의역하기도 한다. 과거세에 출현하여 석가모니불에게 수기를 준 석가모니의 전생불이다. 반면 미륵보살은 미래불이다. 청룡사 대웅전은 이렇게 과거와 현재, 미래불 3세불을 함께 봉안하고 있다. 옆에서 바라보면 보면 세 분 부처님 모두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있는 모습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와 소리의 울림을 도와준다는 대나무 모양의 음통에는 역동적인 모습의 용이 새겨져 있다. 특히 용뉴에 새겨진 포효하는 듯한 용의 모습은 극사실적이다. 종의 어깨와 아래 입구 부분에는 연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어깨 띠 아래에는 사각형 모양의 대가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보살상을 새겼다. 범종의 연구와 승장들의 사회 및 사원 경제구조 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아마도 천왕문이나 금강문이 없다보니 법당의 추녀에나마 금강역사를 그려두고 잡귀의 침입을 막고 부정을 다스리게 한 것이다.
바우덕이가 꿈꾸던 대동 세상은 이뤄졌을까 청룡사는 단촐한 절이다. 전각이래야 대웅전과 관음전, 관음청향각, 명부전 등이 있을 뿐이다. 절이 꼭 크고 웅장해야만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대형화를 지향하는 세태 속에서 이렇게 단촐하게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흔치 않은 덕목이다. 청룡사에 와서는 그저 대웅전의 구부러진 기둥만 보고 가도 위안이 된다. 못난 소나무, 못난 사람도 쓰일 모가 있을 뿐 아니라 잘만 쓰이면 더욱 빛날 수도 있다는 매우 희귀한 가능성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매호씨!/ 네에이!/ 내가 뉘뇨?/ 녹두장군입죠!/ 녹두장군이 뉘뇨?/ 상것들의 속 붉은 가슴입죠!/ 속 붉은 가슴은 뉘뇨?/ 아랫것들의 천지개벽입죠!/ 비천한 백성들에게 꿈이었느뇨?/ 그렇습죠! 그렇습죠!/ 우리네 꿈이었습죠!/ 상기도 깨지 못한 우리네 꿈이었습죠!”(102~103쪽)김윤배 장시 '사당 바우덕이' 일부 매호씨는 남사당패에서 줄타는 사람과 재담을 주고받는 어릿광대이다. 제 입으로 말하기 차마 쑥쓰러워서일까. 줄을 타고 있는 어름사니는 매호씨에게 "내가 누구냐"고 묻고 매호씨는 대답한다. 당신은 바로 녹두장군이라고. 다시 "녹두장군이 누구냐?"고 묻는 어름사니는 매호씨에게서 "상기도 깨지 못한 우리네 꿈"이라는 대답을 이끌어내고야 만다. 바우덕이가 살던 때로부터 벌써 10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바우덕이가 꿈꾸던 대동세상은 이뤄졌을까. 청룡사 대웅전 기둥같이 휘어진 몸뚱아리로 자신에게 부과된 힘든 세상을 받치던 민중들의 고단한 팔은 이제 아래로 내려도 될만한 세상이 되었을까. 청룡사를 내려와 다리를 건너 우측에 있는 부도밭으로 간다. 묵조선에 잠긴 부도들은 이런 내 의문에 아무런 대꾸가 없다. 답답한 것은 언제나 산 목숨들 뿐이로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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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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