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을 위하여
그렇다. 우리는 날마다 죽으면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삶 또한 무의미해질 것이다. 삶의 배후에 죽음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날 수 있다.
우리는 순간 순간 죽어가면서 다시 태어난다.
그러니 살 때는 삶에 전력을 기울여 뻐근히 살아야 하고,
일단 삶이 다하면 미련 없이 선뜻 버리고 떠나야 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나그네인지 시시로 살펴보아야 한다.
-법정 스님 수상집 <인도 기행> 중에서
*
강원도 산골로 거처를 옮기면서 법정 스님은 <버리고 떠나기>란 제목의 수상집을 내셨다. 그 글들 속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강원도행은 세상으로부터 도피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지키고 점검하기 위한 수도자다운 선택이었다.
이따금 스님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지난 여행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그분과 내 자신이 여행한 경로들이 많이 일치하고 있음을 알고 놀라곤 한다.
지난 해 겨울 스님은 네팔에 다녀오신 뒤, 카투만두 교외의 나가르콧 정상에서 맞이한 일출의 장엄함을 말씀하셨다. 나 역시 나가르콧에서 바라보던 히말라야의 아침 풍경을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어떤 사진기나 붓으로도 그려내기 어려운 자연의 위대함이었다.
아울러 내가 곧잘 들러 명상음악을 구입하곤 하는 카투만두 시내의 필그림 서점에 대해서도 언급하시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스님은 네팔 엽서도 사고 인도 음악도 구하신 듯했다.
스님은 또 미국 캘리포니아에 가실 때마다 들르는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명상센터의 아름다움에 대해 자주 말씀하신다. 그곳은 아열대의 꽃들과 나무들과 호수가 어우러져 있어서, 누구나 그 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저절로 명상적인 분위기에 젖어드는 그런 장소이다. 명상 센터 앞으로는 끝없는 해안도로와 툭 트인 바다가 유혹한다.
나 역시 일 년에 한 달씩 미국에 가서 머물 때면 곧잘 그 명상 센터에 가서 앉아 있곤 했다. 그러면 갑자기 평온을 되찾고, 호수에 일렁이는 꽃 그림자들 틈새에서 침묵의 무게가 느껴졌다.
또한 나는 크리슈나무르티가 생애 마지막까지 살았던 캘리포니아의 오하이 밸리에 갔을 때, 그곳에 펼쳐진 귤밭 너머로 지는 저녁 석양을 넋을 잃고 바라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크리슈나무리티가 강연 뒤에 바하의 음악을 즐겨들었다는 방도 구경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스님께서도 똑같은 경험을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남인도 마드라수의 스리 오로빈도 아쉬람과 그 옆의 넓다란 바다 풍경, 바라나시의 일렁이는 갠지스 강물, 네팔 포카라의 서늘한 아름다움까지도 스님과 나는 공유한다.
또한 신지학회 본부에 서 있는 커다란 바냔 나무, 샌프란시스코의 울창한 레드우드 숲에 대해서도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내심 나는 놀랄 수밖에 없다. 그분은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으려 하신다. 그것이 그 많은 여행지를 홀로 다니시는 주된 이유이다. 여행자이고 나그네임을 숙명으로 여기고, 구차한 삶의 어느 구석에도 머물지 않으신다. 진정한 자유인의 행로가 아닐 수 없다.
불일암이나 강원도 산중에 홀로 계시지만, 그분은 또 갑자기 스위스의 산정이나 북인도 다르질링의 칸첸중가 히말라야 앞에 서 계신다. 그리고는 또 돌아와 산중의 얼음을 깨고 물을 길어 오시는 것이다.
-류시화
떠남을 위하여.
가을이 왔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오히려 가을이 들어서니까 책이 읽히지 않는다. 다른 이유보다도 이 청청한 날씨 때문이다. 맑은 공기와 푸르른 날씨 때문에 방안의 책상 앞에 버티고 앉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무 아래서 서성거리기만 해도 존재가 넉넉해지는데 굳이 좁은 방안에 들어앉아 책장을 넘기는 것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
독서의 계절이란 말이 적어도 나한테는 해당이 안 되는 듯하다. 그럼 가을은 무슨 말로 메울 수 있는가. 떠남의 계절이다. 가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
가을은 잎이 가지를 떠나고, 열매가 나무를 떠나는 계절이다. 사람이 길을, 먼 길을 떠나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다시 말해 반복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계절이다. 따라서 여행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이기보다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그 일차적인 의미가 있다.
가끔은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볼 일이다. 떠나보면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새삼스럽게 자기 존재의 무게를 헤아릴 수가 있다.
§
떠나는 것을 불교적인 용어로 출가出家 또는 출진出塵이라고 한다. 출가는 집에서 나온다는 뜻이고, 출진은 티끌에서 벗어난다는 것, 곧 욕심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어디로 떠나는가. 속박의 굴레에서 떠나고, 무뎌진 타성의 늪에서 떠나고, 집착하는 마음으로부터 떠난다. 이것이 출가이다.
§
수도승이 되기 위해 입산 출가한 사람들을 보면, 살던 집을 버리고 똑같이 나온 사람들인데 봄철에 온 사람들과 가을철에 온 사람들이 다르다. 계절적인 분위기가 작용함인지, 들뜨기 쉬운 봄에 나온 사람들은 뿌리내리지 못한 채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을이나 겨울철에 집을 나온 사람들은 어지간해서는 물러갈 줄 모른다.
§
사람들은 곧잘 내게 '왜 스님이 됐는가?' 하고 묻는다. 신부들과 수녀들도 곧잘 이런 질문을 받을 것이다.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세상이 무상해서,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뜻에서 출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나대로 살고 싶어서, 내식대로 살고 싶어서 출가를 했다. 자기식대로 사는 것, 나대로 사는 것을 위해서다. 그것이 세상의 윤리권 밖에서 제멋대로 사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만큼 무거운 짐이 내게 주어진 것이다.
어떤 출가의 경우라도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선택 당한 길이 아니고 선택한 길이다. 적어도 자살에 비길 만큼 철저한 자기 부정을 거쳐 선택한 길이다.
§
무엇에 대한 부정인가.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부정이다. 철저한 부정 없이 긍정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철저한 절망을 통해서, 자기 부정을 통해서 인간은 거듭날 수 있고 삶을 재구성할 수 있다.
따라서 종교적 세계에서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일 수가 없다. 오히려 절망은 거듭날 수 있는 계기이고, 자기 인생을 재구성하기 위한 진통이다. 종교적 체험은 자기 부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대긍정에 그 의미가 있다.
§
떠난다는 것은 소극적인 도피가 아니라, 보다 높은 이상을 위한 적극적인 추구이다.
§
인도 사람들은 고대 베다 시대부터 인생의 목적을 세 가지에 두었다.
첫째는 애욕 곧 육체적인 쾌락이고, 둘째는 재산 곧 물질적인 부이고, 셋째는 종교 곧 정신적인 자유이다.
육체적인 쾌락과 물질적인 부는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들이다. 성질은 다르지만 동물도 육체적인 쾌락이나 물질적인 부를 누리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사람만이 유일하게 정신적인 자유를 갈구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또한 인도에서는 인생을 네 시기로 나누었다. 고대 인도인들뿐만 아니라 현대의 일부 힌두교들인들도 이 네 시기에 따라서 인생을 살고 있다.
그 첫번째 시기는 범행기梵行期라 하여, 스승의 집에서 살면서 베다 성전 등의 고전과 학문을 배우는 시기이다. 그 다음은 가주기家住期라 하여, 집에 머무는 기간이다. 집으로 와서 결혼을 하고 가정과 사회 생활을 영위하는, 시민적인 의무를 다하는 기간이다.
세번째 시기는 임서기林棲期로 가산을 자식에게 넘겨주고 숲속으로 들어가 검소한 종교 생활을 실천하는 기간이다. 경전이나 베다 서에 보면 아내와 함께 수행하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네번째는 유행기遊行期로, 모든 집착에서 떠나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걸식하면서 수행하는 기간이다. 자기 완성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 가는 생애의 마지막 단계인 것이다. 가진 것은 밥그릇, 지팡이, 물병 뿐이다.
이러한 네 주기는 바라문의 전통적인 행로였고, 후기에 와서 그 전통이 희미해졌다.
§
출가는 네번째 시기인 유행기遊行期에 해당한다. 모든 집착과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길로 가는 것이 출가이다. 고타마 싯달타의 경우를 보라. 그에게 외적인 조건은 풍족했다. 결혼을 해서 야소다라라는 아름다운 부인과 봄, 여름, 가을 세 채의 궁전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 물질적인 부와 세속적인 권력이 확실하게 보장된 삶이었다.
학자들은 싯달타의 출가 원인을 여러 가지로 말한다. 코살라와 마가다 왕국의 국가적이고 정치적인 불안 때문에 출가했다는 설도 있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라고 불교도들은 말한다. 이것은 결과를 혼동한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다음의 관점에서 보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인 듯하지만, 사실은 자기 하나의 무게를 어쩌지 못해 출가한 것이다. 외적인 여건은 풍요로웠지만 내적인 상황은 자기 집을 뛰쳐나오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절박했다. 그에게는 자살에 견줄 만한 대결단이었다.
§
모든 것들이 갖추어진 풍요로운 조건 속에 살면서도 출가한 것을 두고 불교학자들은 위대한 포기, 위대한 내던짐이라고 말한다.
흔히 고타마 싯달타의 출가를 유성踰城 출가, 성을 넘어서 출가했다고 표현한다. 카필라 왕궁의 집착과 속박의 성을 넘어서 출가했다는 뜻이다. 표현을 달리하면 비본질적인 성이기 때문에 출가한 것이다.
§
사실 고타마 싯달타는 출가를 한 번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러 번의 출가를 했다. 그는 29세 때 처자와 왕궁을 버리고 출가했다. 육신의 출가이다.
그 후 그는 여기저기 스승을 찾아 헤매고 길고 긴 구도 행각을 했다. 그 대표적인 스승은 알라라 칼라마, 웃다카 라마풋다 두 사람이었다.
이들은 2천 5백 년 전 인도에서 최고로 꼽히는 수행자들이었다. 그 문하에 수천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던 대표적 수행자들이었다.
싯달타는 그들 밑에서 피나는 수행 끝에 두 사람과 같은 경지에 도달했다. 스승은 이보다 더 높은 경지는 없다면서 함께 교단을 이끌자고 하지만 싯달타는 만족하지 않고 그곳에서도 떠난다. 이것이 두번째 출가이다.
최고의 경지, 궁극의 경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곳에서 나온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대개 스승과 함께 주저앉는다.
간디 자서전은 말하고 있다.
'세속적인 의미에서는 불완전한 스승도 용납될 수 있지만, 진리의 세계에서는 불완전한 스승은 용납될 수 없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완전한 스승만이 요구된다.
완전한 스승은 어디 있는가. 외부 세계에 완전한 스승은 없다. 자기 스스로가 완전한 스승이 될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처럼 본인을 잘 알 수는 없다. 고타마 싯달타는 이렇듯 어디에도 완전한 스승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스스로 혼자 완전한 스승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그는 보리수 아래서 가부좌를 하고 피나는 정진 끝에 마침내 깨달음에 이른다. 이것이 세번째 출가이다. 모든 고뇌로부터 출가한 것이다. 이 출가를 위해서 그는 왕궁도 버리고 스승 밑에서도 벗어난 것이다.
§
출가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해후이다. 거기 만남이 있었다. 본질적인 자아와의 해후가 이루어졌다. 비본질적인 일상의 자기에서 떠난 본래의 자기로 돌아온 것이다.
§
떠난다는 것은 곧 새롭게 만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남이 없다면 떠나도 무의미하다. 출가는 빈 손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다. 크게 버림으로써 크게 얻을 수 있다. 크게 버리지 않고는 결코 크게 얻을 수 없다.
적게 버리면 적게 얻을 수밖에 없다. 어중간하게 버리면 어중간하게 얻는다. 이것이 소유의 법칙이다. 아무 것도 갖지 않을 때 온 세상을 다 차지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가졌을 때 가진 것만큼 속박을 당한다.
§
크게 버릴 때 크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두고두고 생각해 볼 과제이다. 그래서 출가를 가리켜 위대한 내던짐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역사 속의 어떤 한 사람의 예가 아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곧바로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예수의 자취가 2천 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로 남아 있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생애의 의미가 우리 자신의 삶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거듭날 수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부활할 수 있다.
§
속박의 굴레에서 우리는 벗어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이 요구하는 필수적인 과제이기 때문이다. 타성의 늪에서 떨치고 일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승려가 아니고, 신부나 수녀가 아닌 사람일지라도 저마다 자기의 일상 생활이 있다. 자기의 세계가 있다. 그 일상의 삶으로부터 거듭거듭 떨쳐 버리는 출가의 정신이 필요하다. 머리를 깎고 산이나 절로 가라는 것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들을 거듭거듭 버리고 떠나는 정신이 소중하다.
§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출가는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탐욕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자기 그릇 밖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둘째는 미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후세 역사가들이 오늘의 시대를 뭐라고 표현할 것인가. 아마도 증오의 시대라고 기록할 것이다. 서로 믿지 못하고 서로 미워하지 않는가.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의 조건인가. 그것은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이 충만할 때 그는 비로소 사람이며, 사랑이 메마르고 증오가 가득찰 때는 그는 사람이 아니다.
사랑과 고통은 함께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랑과 고통이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예수가 죽은 날 비로소 알았다고 한다. 사랑과 고통이 포개어져 있음을 비로소 체험한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 역시 포근하고 따뜻한 것인 동시에 그 속에는 아픔이 깃들어 있다. 그것이 자비慈悲이다. 자애로움과 슬픔이 함께 있는 것이다.
셋째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를 불교적인 용어로 바꾸면 무명이다. 밝음이 없다는 뜻이다.
§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형성해 가는 데 있다. 자기 자신을 출가시키려는 끝없는 노력에 있다. 이것을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이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다. 알다시피 이 영화는 억울하게 갇힌 죄수 빠삐용이 자유와 평화를 찾아서 끝없이 탈출하는 이야기이다.
빠삐용에게 실의와 좌절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끝없이 탈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한 그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때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 그러나 절망과 실망, 좌절은 죽음을 의미한다. 벌레를 잡아먹으며 독방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좌절을 경험한다. 그때 죽음의 환상이 그에게 나타난다.
§
속박과 불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존재만이 진정한 인간이다. 많은 죄수가 있지만 그 사람들은 하나의 짐승에 불과하다. 그들은 노예이며,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다. 비굴한 노예가 아니면 나약한 짐승에 불과하다.
영화 <빠삐용>은 이 시대의 우리에게 많은 암시를 주고 있다. 너희들이 정말 인간인가. 인간답게 사는 길은 무엇인가. 더없이 메마르고 답답하게 살아가는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 빠삐용은 바다를 건너 탈출하면서 이렇게 고함을 친다. 너희들은 속박과 굴레의 성에서 어서 탈출하라. 그 늪에서 죽어 있지 말고 어서 출발하라.
§
어떤 이유와 인연으로 출가한 구도자가 되었든,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 순간 사는 일이다. 현재의 이 순간 속에 자신을 불태우는 것, 그것이 곧 출가자의 자세이다. 사람이 불행하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마지못한 삶, 순간 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 버리는 삶, 그것이 불행한 삶이다.
꽃처럼 거듭거듭 피어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즐겁게 살되 아무렇게나 살지 말아야 한다. 한 개인의 삶은 그 자신 뿐 아니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출가는 일상적인 타성의 늪, 집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본질적으로는 자기답게 살기 위해서, 본래의 자아와 만나기 위해서 출발하는 일이다. 자기 혼자 도피하기 위해 떠나는 것은 가출이지 출가가 아니다. 진정한 출가자가 되려면 그러한 늪에서 벗어나 당당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갇혀 있는 한, 그는 비겁한 짐승이거나 나약한 노예일 수밖에 없다. 그는 진정한 인간이 아니다. 이것은 생존권의 문제다.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 내 세계를 개척하지 않을 수 없다. 매순간 속박과 굴레의 늪에서 탈출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그는 비로소 한 사람의 인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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