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고 싶은 법정스님의 글

[스크랩] 산에는 꽃이 피네 (9) 진정한 인간의 길

문근영 2012. 9. 1. 16:42
 

법정스님의 모습

 진정한 인간의 길

 

 

   산에서 사는 사람들이 산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다면
   속 모르는 남들은 웃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산승들은 누구보다도 산으로 내닫는 진한 향수를 지닌다.
   산에는 높이 솟은 봉우리만이 아니라 깊은 골짜기도 있다.
   나무와 바위와 시냇물과 온갖 새들이며 짐승, 안개, 구름, 바람, 산울림,
   이밖에도 무수한 것들이 한데 어울려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산은 사철을 두고 늘 새롭다.
   그 중에도 여름이 지나간 가을철 산은 영원한 나그네인 우리들을
   설레게 한다.
                                                    -법정 스님 수상집 <무소유> 중에서

 

*


 

   내가 그동안 법정 스님에게서 배운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능하면 무엇이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소유하지 말고, 남 앞에 나타나지 말고, 일을 벌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 대신 지금 이 순간 자기 자신의 존재를 소중히 느끼라는 것이다.
   불일암에 계실 때도 그랬지만 강원도 산중으로 거처를 옮기신 다음부터는 한 달에 한두 번 서울의 '맑고 향기롭게' 사무실이나 시내에 나오시는 게 고작이었다.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무와 계획을 갖고 스님을 기다렸다. 원고 청탁과 인터뷰 요청에서부터 숱한 일거리들이 그분께 어떤 요구를 해왔다.
   그럴 때마다 스님은 거의 모든 경우를 거절하셨다. 때로는 곁에 있는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가차없이 자르시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분이 지나치게 차갑거나 또는 몰인정하지 않은가 하는 평을 들을 때도 있었다.
   장안의 이름 높던 요정 대원각의 넓은 땅을 주인 할머니가 스님께 기증해 '길상사'라는 이름의 절로 만드는 과정에서도 그분은 몇 해 동안 망설이셨고 수차례 결정을 번복하시기까지 했다. 절이 개원을 하고 언론이 크게 주목했을 때도 스님은 그 흔한 인터뷰 한 번 응하지 않으셨다.
   막상 절이 개원되고 첫 법회가 열렸을 때 그분은 이렇게 선언을 해 좌중을 당황시켰다.
   '나는 이 절이 부유해지거나 화려해지거나 번잡한 행사들을 벌여나간다면 아무 미련없이 이 절을 떠날 것이다. 나는 이 절이 소박하고 가난한 절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그럴듯한 법문에서가 아니라 이 사회의 불교 사찰들과 그 구성원에 대한 강력한 요구였다. 그리고 스님은 단순한 절로서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 모두를 위한 정신적인 쉼터, 자기를 돌아보는 장소가 되기를 바라셨다.
   길상사의 창건주이자 회주이면서도 스님은 절에 방 하나를 만들어 드리겠다는 요구를 한 마디로 뿌리치셨다. 서울에 오시면 여러 이름있는 인사들도 만나야 하니 방 하나쯤은 격조있게 지니셔야 한다는 주위의 권유를 마다하고 사무실 한 켠의 딱딱한 의자에서 사람들을 만나셨다. 그리고는 하룻밤도 머뭄이 없이 곧 산중의 홀로 있는 공간 속으로 떠나셨다.
   어쩌다 날이 저물고 시간이 늦어져도 스님은 기어이 무리를 떠나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셨다. 그렇게 인파와 차량의 행렬을 뒤로 하고 떠나는 그분의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감히 방해할 수 없는 어떤 기상 같은 것이 느껴졌다.
   길상사 개원 후 처음 맞이한 사월 초파일에는 홀연히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 버리셨다.
그 모든 것이 삶의 가치, 존재의 의미를 허투루 써 버리지 않으려는 자세이다. 어느 장소에 가도 오래 앉아 있는 법이 없고, 스님의 말마따나 어느 조직체에도 깊이 몸담는 법이 없으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설교하지 않으셨다.
   이 책을 엮으면서 한 가지 놀란 것은 승려 생활 수십 년인데도 불구하고 법문을 하거나 강연을 한 횟수가 너무도 적어 한 권의 책을 엮기에도 빠듯하다는 점이었다.
   일본의 자연농법가 후쿠오카 마사노부는 <짚 한 오라기의 혁명>이라는 저서에서 '나는 가능하면 무엇을 어떻게 안 할까를 고민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가능하면 무엇을 할까가 아니라 무엇을 안 할까를 고민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게으름 피우려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자연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농사'에 접근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하지 않고 나서지 않고 꾸미지 않는 무위 자연의 삶의 태도가 스님의 일상 생활에서 실천되고 있음을 나는 본다. 그 대신 그분은 더 소중한 것, 이를테면 우리가 죽으면 나무가 되고 대지가 되고 바람이 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또한 우리가 살아 있을 때도 나무이고 대지이고 바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가르친다.
   내가 믿건대, 여기 모아 놓은 이 짤막한 어록집은 끝없이 행위를 추구하고 더 발전하고자 하고 속도 지향적이며 연거푸 생산하고 소비하는 우리의 문명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이다. 우리는 본질로부터 달아나 쓸데없는 것에 몸과 마음이 파묻히려는 습관적인 병에 걸려 있지 않은가.

                                                                                                                      -류시화
 

 

 

진정한 인간의 길

 

   이 세상 모든 것은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기 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존재한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도 여기 오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 상태로서 저마다 존재했다. 그런데 맑고 향기로운 음악회가 있다고 해서 이렇게 한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안 보이는 상태가 원인이고, 보이는 것은 하나의 결과이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이 영원한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늘 변하면서 일시적이다.



§

 

    이 몸이란 무엇인가. 이 육체라는 것은 마치 콩이 들어찬 콩깍지와 같은 것이다. 수만 가지로 그 겉모습은 바꾸지만 생명 그 자체는 소멸되지 않는다. 모습은 여러 가지로 바뀌나 생명 그것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생명은 우주의 영원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들은 다른 이름으로 어디선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것이다. 불멸의 영혼을 어떻게 죽이겠는가.



§

 

    이 우주에 가득찬 에너지는 다른 것끼리는 서로 밀어내고 같은 것끼리는 서로 끌어당긴다. 선하게 대할 때 우주의 선한 요소들이 딸려오고 악하게 대하면 파괴적인 요소들이 몰려든다. 따라서 어떤 삶이 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달려 있다.
   동물은 자연의 목소리인 본능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 지배를 받는다.
   요즘 세상을 돌아보라. 요즘 뿐이 아니다. 인류사 이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 와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는가.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인다. 일찍이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또 보라. 유사종교 광신자들의 작태 같은 것을. 그것은 비단 일본만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해 새삼스럽게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도대체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이럴 수가 있는가.



§

 

    우리가 몸으로 움직이는 동작과 입으로 하는 말과 마음으로 하는 생각 모두가 업이 된다. 업이라는 것은 하나의 행위이다. 좋은 업을 쌓으면, 곧 좋은 행동과 좋은 말씨와 좋은 생각을 가지면 좋은 결과가 얻어진다. 좋지 않은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을 지니면 어두운 업을 짓게 된다. 이것이 자주 되풀이되다 보면 거기에 힘이 생긴다. 그것을 업력業力이라고 한다. 또는 업장業障이 되는 것이다.
   업력이 커지면 이성의 힘으로써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그런 관성 법칙 같은 것이 생겨난다. 내 힘으로 억제할 수 없는, 자제할 수 없는 그런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업력이라는 것, 업장이라는 것이 그렇다.

 


 

§

 

   우리가 수도하고 또는 수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업을 맑히는 일이다. 흔히 번뇌를 끊는다거나 욕망을 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끊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욕망을 끊는다. 번뇌를 끊는다. 말로는 끊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끊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단지 질적인 변화가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에너지의 전환이다. 업의 전환이다. 탐욕으로 흐르는 일을 베푸는 일로 전환하는 것이다. 또 남을 미워하고 화내는 에너지는 연민의 정과 자비심으로 전환될 수 있다.
   내 마음이 지극히 맑고 청순하고 평온할 때 중심이 잡힌다. 내 중심이 잡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온전한 내 마음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중심이 잡히지 않을 때는 늘 흔들린다. 정서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중심이 잡히지 않은 것이다.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없는 일도 저지르게 되고 불쑥불쑥 어떤 충동에 우리가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이 '불쑥'이라는 한 생각이 천당도 만들고 지옥도 만든다. 따라서 한 생각을 어떻게 갖는가 이것이 갈림길이다.



§

 

    세상의 기업체나 정부 관료들은 '무한 경쟁 시대다.'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등의 광고를 한다. 이런 구호들을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한다. 막연히 국제 경쟁력을 강조하기 위한 구호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어떻게 무한히, 끝없이 경쟁만 할 수 있는가. 그런 구호에 속아서는 안 된다. 어떻게 경쟁만 하고 살 수 있는가. 물론 삶의 요소에 경쟁도 있지만 경쟁하지 않고 사는 그런 경우도 있다.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니, 우리는 일류가 아니다. 나 자신도 일류가 아니다. 삼류 사류도 있고 아류로도 살고 있다. 다들 살아남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일류는 빨리 죽는다. 빨리 넘어져 버린다. 어떻게 일류만 존재하는가. 어떻게 일류만을 용납하는가. 또 그들은 말한다. '정복할 것인가, 정복당할 것인가.' 이건 협박이다. 누구를 우리가 정복하는가. 왜 우리가 정복당하는가. 이런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한때의 구호일 뿐이다. 이런 극도의 이기주의를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

 

    한국에 와서 스님이 되어 십여 년 동안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외국 스님들이 몇 사람 있다. 그 사람들과 여행을 하면서 한국 스님들의 좋은 점과 나쁜 점, 우리 국민들의 좋은 점과 고쳐야 할 점을 기탄없이 얘기해 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자 한 영국 스님이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앞서려고만 하지 양보와 겸양, 이런 자비심이 부족하다.'
   또 따뜻한 눈빛을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서울이고 시골이고 가봤자 따뜻한 눈빛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이 말을 들으면서 내 자신이 그렇구나, 이건 바로 내 얼굴이다. 오늘의 내 모습이고 우리 사회의 얼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우리 생애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따뜻한 마음을 얼마나 가졌는가, 또 그 따뜻한 마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아는 일이다.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한생애 동안 따뜻한 마음을 얼마나 지녔는가, 얼마나 친절히 대했는가, 또한 그 따뜻한 마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아는 일이다.



§

 

    친절과 사랑은 우러나는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사람은 친절과 사랑 안에서 성장한다. 자비를 베풀라, 사랑해라, 여러 말이 있지만 친절하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미덕이다.



§

 

    얼마 전에 이런 책을 읽었다.
   종업원 여남은 명 있는 작은 제과점이 있었다. 그 제과점에 열아홉 살 된 여자 종업원이 있었다. 어느 날 어떤 손님이 이 아가씨에게 시집을 하나 주고 갔는데, 그 시집에 이런 구절이 실려 있었다.
   '조그만 가게임을 부끄러워 말라. 그 조그만 가게에 당신의 인정의 아름다움을 가득 채우라.'
   그 가게는 형식보다도 기본적인 생각을 중요시하는 가게였다. 인정을 잃으면 생각과 행동이 기계적으로 된다. 슈퍼마켓에 가보라. 사람이 완전히 기계이다. 단순한 돈과 물건의 교환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정이 배어 있는 곳은 다르다. 만일 인정이 배제된 거래가 참거래라면 굳이 사람이 지켜설 일이 없다. 자동판매기에 맡기면 된다. 여러 계층의 사람을 만나서 그들과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기 때문에 거기서 우리가 일하는 기쁨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인간 관계가 단지 사고 파는 일에 그친다면 너무 야박하고 삭막하다.




§

 

    그래서 이 가게에서는 '조그만 가게임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조그만 가게에 당신의 인정의 아름다움을 가득 채우자.'는 싯귀절에 영향을 받아 다들 친절한 마음씨로 손님을 대했다.
   하루는 이 열아홉 살 먹은 아가씨가 맨늦게 가게 정리를 하고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는데 지붕 위에 눈을 잔뜩 뒤집어쓴 웬 승용차 한 대가 멈칫멈칫 무슨 가게를 찾는 것 같았다. 저만치 가다가 뒤돌아보니까 그 차는 자신의 제과점 앞에 멈춰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가씨는 달려갔다. 달려가서 노크를 하니까 차창이 열리면서 어떤 남자가 이런 얘기를 했다.
   '내가 몇 백 리 밖에서 오는 길인데 내 어머니가 지금 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십니다. 담당 의사를 만났더니 하루 이틀밖에 못 살 테니까 만날 사람 만나게 하고 자시고 싶은 것 자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아들이 어머니한테 '어머니 자시고 싶은 음식이 뭡니까?' 하자 어머니는 '예전에 어느어느 도시에 가니까 아주 맛있는 제과점이 있더라. 그 집 과자가 생각나는구나'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들은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제가 당장 갔다오겠습니다.' 하고 아침에 출발했다. 그런데 눈이 많이 와서 고속도로에 차가 잔뜩 밀리는 바람에 밤 10시나 되어 도착하게 되었다. 가게가 정확히 어딘지도 모를 뿐더러 짐작되는 제과점은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실망하던 차에 아가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설명을 듣고 제과점 아가씨가 말했다. 내가 이 가게 종업원이니까 잠깐 기다리시라고. 아가씨는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난로까지 켠 다음 그 손님을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는 어떤 과자인지도 모르지만 병석에 누워 계신 분이니까 소화가 잘 될 것, 부드러운 걸로 자기가 골라 드렸다.
   과자를 싸드리면서 아가씨는 눈길에 조심해서 가시라고 인사를 했다. 손님이 값이 얼마냐고 묻자 아가씨는 돈을 안 받겠다고 말했다. 왜 돈을 안 받느냐고 놀라서 쳐다보자 제과점 아가씨가 이런 얘기를 했다.
   '이 세상 마지막에 저의 가게 과자를 잡숫고 싶다는 손님께 모처럼 저희가 드리는 성의입니다. 그 대신 혹시 과자가 더 필요할지도 모르니 명함을 두고 가십시오.'



§

 

    손님은 감격한 채 떠났고, 그 아가씨는 자기 지갑에서 따로 과자값을 꺼내 자기가 대신 그날 매상에 추가시켰다. 그날 밤 그녀는 꿈을 꾸었는데, 노인이 과자를 먹다가 목이 메어서 고생하는 불길한 내용이었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마음이 집히는 데가 있어 명함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귀로에 길이 막혀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는데, 아들이 도착하기 30분 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맑은 정신으로 숨을 거두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그 가게 참 좋은 가게로구나' 라는 것이었다.



§

 

    그 말을 전해 듣고 아가씨는 물었다. 장례식이 언제냐고. 그래서 내일이라고 하니까 이 아가씨는 자세한 얘기도 하지 않고 가게 주인한테 휴가를 얻었다. 그리고는 따로 공장에 가서 장례식에 가지고 갈 과자를 주문했다. 자기가 과자값을 내고, 그 길로 장례식에 참석을 했다. 과자를 갖고 장례식에 간 것이다.
   어제 과자를 사갔던 그 손님이 깜짝 놀랐다. 그 고마웠던 아가씨가 장례식에까지 찾아온 것이다. 영단에 향을 사르고 이 아가씨는 마음 속으로 말했다.
   '처음 뵙는 손님, 이 세상 마지막으로 우리 가게의 과자를 먹고 싶다고 말씀하신 분, 미처 시간을 대지 못해 서운하셨겠어요. 좋아하시는 과자를 떠나시는 길에 갖고 가시라고 인사차 왔습니다.'
   이렇게 축원을 했다.



§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 비록 조그만 가게이지만 그 제과점 아가씨의 모습에서 앞치마를 두른 천사와 보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상인의 길은 곧 인간의 길이다. 단지 물건만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상품이기 때문에 인정이 오고가야 한다. 다시 말해 사고 파는 차디찬 그런 거래가 아니라 인정이 오고갈 수 있는 인간의 길이 되어야 한다.



§

 

    그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당신의 오늘 일은 단 한 사람이라도 당신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마음으로부터 인사를 하고 싶어하는 그런 친구를 만드는 일이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있는 일터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나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마음으로부터 인사를 하는 친구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

 

    이웃을 기쁘게 해주면 내 자신이 기뻐진다. 이웃을 괴롭히면 내 자신이 괴롭다. 이것이 마음의 메아리이다. 사랑이 무엇인가. 남녀간의 그렇고 그런 것이 사랑이 아니다. 동정과 이해심을 지니는 것이다. 나 아닌 타인에게, 내 가족이든 친구이든 남모르는 사람에게까지 동정심과 이해심을 지니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웃을 돕는 일이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서 거드는 일이다.



§

 

    사랑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소한 마음씀이다. 낯선 이웃에게 너그러워지는 일이다. 낯선 이웃에게도 우리가 너그럽게 대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따뜻한 미소를 보내는 것, 이것도 사랑이다. 부드럽고 정다운 말씨를 쓰는 것, 이것도 사랑이다.
   우리의 마음만 열리면 늘 그렇게 살 수가 있다. 마음이 겹겹으로 닫혀 있기 때문에 그런 씨앗을 내 자신이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걸 펼쳐 보이지 못하는 것이다. 너는 너, 나는 나, 그렇게 단절되어서 살고 있다.
   바로 이런 일상적인 실천들이 사랑이며 친절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으로서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 친절이고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자칫 파괴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그 자신까지도 파멸시키고 만다.



§

 

    삶이란 우리가 누구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듣고 이해하면서 새롭게 펼쳐가는 어떤 기운 같은 것이다.
   우리가 산다는 게 세 끼 밥 먹고 직장 왔다갔다 출퇴근길에 고생하며 사는 것, 이것이 사는 게 아니다. 그건 숨쉬는 것일 뿐이다. 삶은 누구에게서 배우는 게 아니라, 직접 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순간순간 이해하면서 새롭게 펼쳐가는 것이다.



§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된다.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는 곧 우리 가슴에 평화를 이룬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좀더 친절해지는 것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친절해지는 것이다. 그 다음날은 더 친절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친절에 한도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모든 삶에 기초가 된다. 우리가 더 친절하고 사랑한다면 우주가 확장된다. 보이는 것만이 우주가 아니다. 끝없는 우주이지만 우리가 보다 더 친절하고 사랑한다면 우리들의 우주가 그만큼 확장이 된다. 이웃에게 좀더 친절하고 우리 서로 사랑하자.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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