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고 싶은 법정스님의 글

[스크랩] (4) 눈고장에서 또 한 번의 겨울을 나다 - 등잔에 기름을 채우고

문근영 2012. 8. 6. 09:13

법정스님의 모습

등잔에 기름을 채우고


허균이 엮은 <한정록>에는 왕휘지王徽之에 대한 일화가 몇 가지 실려 있다. 중국 동진 때의 서예가로 그는 저 유명한 왕희지王羲지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산음山陰에서 살았다. 밤에 큰 눈이 내렸는데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자 사방은 눈에 덮여 온통 흰빛이었다.

그는 일어나서 뜰을 거닐며 좌사左思의 '초은시招隱詩'를 외다가 갑자기 한 친구 생각이 났다. 이때 그 친구는 멀리 섬계라는 곳에 살았는데, 서둘러 작은 배를 타고 밤새 저어 가서 날이 샐 무렵 친구집 문전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는 무슨 생각에선지 친구를 부르지 않고 그 길로 돌아서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이상하게 여기고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흥이 나서 친구를 찾아왔다가 흥이 다해 돌아가는데, 어찌 친구를 꼭 만나야만 하겠는가."

흥이란 즐겁고 좋아서 저절로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흥은 합리적이고 이해타산적인 득실이 아니다. 그때 그곳에서 문득 일어나는 순수한 감정이 소중할 따름이다.

매사를 합리적으로만 생각하고 손익 계산을 따지는 요즘 사람들은 눈이 내리는 날, 밤을 새워 친구를 찾아나선 그 흥겨운 기분과 삶의 향기로운 운치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때 만약 친구집 문을 두드려 친구와 마주하고 담소를 나누며 아침을 얻어먹고 돌아왔다면, 그 흥은 많이 줄어들고 말았을 것이다. 시와 산문의 세계가 다른 점이 바로 이런 데에 있다.

왕휘지가 서울을 떠나 시골에 있을 때다. 그전부터 환이桓伊라는 사람이 피리의 명인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서로 만나지 못했는데, 때마침 수레를 타고 가던 중인데, 동료 중에 그를 아는 이가 있어 환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서로 알고 지내기를 바라면서 피리소리를 한 번 들려줄 수 없느냐고 청했다. 피리의 명인인 환이는 평소 왕휘지의 인품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즉시 수레에서 내려 의자에 걸터앉아 세 곡조를 불었다. 그리고 나서 급히 수레에 올라 떠나갔다.

이와 같이 나그네와 주인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피리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이에게 피리를 들려주고, 듣고 싶었던 소리를 듣는 것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교감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피리를 불고 나서 번거롭게 수인사를 나누지 않고 그대로 떠나간 환이의 산뜻한 거동이 피리의 여운처럼 우리 가슴에까지 울려온다.


전통적인 우리네 옛 서화에서는 흔히 '여백의 미'를 들고 있다. 이 여백의 미는 비록 서화에서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끼리 어울리는 인간관계에도 해당될 것이다. 무엇이든지 넘치도록 가득가득 채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여백의 미가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두루 헤아려 보라. 좀 모자라고 아쉬운 이런 여백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숨통이 트일 수 있지 않겠는가.

친구를 만나더라도 종일 치대고 나면, 만남의 신선한 기분은 어디론지 새어나가고 서로에게 피곤과 시들함만 남게 될 것이다. 전화를 붙들고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우정의 밀도가 소멸된다는 사실도 기억해 두어야 한다. 바쁜 상대방을 붙들고 미주알 고주알 아까운 시간과 기운을 부질없이 탕진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고 자신의 삶을 무가치하게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직한 인간관계에는 그리움과 아쉬움이 받쳐주어야 한다. 덜 채워진 그 여백으로 인해 보다 살뜰해질 수 있고 그 관계는 항상 생동감이 감돌아 오랜 세월을 두고 지속될 수 있다.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웠더니 심지를 줄여도 자꾸만 불꽃이 올라와 펄럭거린다. 가득 찬 것은 덜 찬 것만 못하다는 교훈을 눈앞에서 배우고 있다.

1999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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