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시비 앞에서
서쪽 창으로 비쳐드는 오후의 햇살이 아늑하고 정다운 11월. 창밖으로 가랑잎 휘몰아 가는 바람 소리가 내 손등의 살갗처럼 까슬까슬하다.
숲에 빈 가지가 늘어가고 개울가에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바빠진다. 아궁이와 난로에 지필 장작을 패서 처마밑에 들이고, 고추밭에 얼어서 시든 고춧대도 뽑아내야 한다. 서릿바람에 허리가 꺾여 어지러운 뜰가의 해바라깃대도 낫으로 베어내고, 밤송이를 주워다가 쥐구멍도 몇 군데 막을 일이 내 일손을 기다리고 있다. 날씨가 추워지면 들쥐들이 집안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해가 기울어 뜰에 찬 그늘이 내릴 때 개울물 소리는 한층 시리게 들려온다. 아궁이에서 군불이 타는 동안 등잔에 기름을 채우고 램프의 등피를 닦아둔다. 이제는 밤으로 등불이 정답게 여겨지는 계절이 되었다.
등잔의 심지를 손질하다가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떼 소리를 들었다. 산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맘때가 되면 감성의 줄이 팽팽하게 조여지고 귀가 아주 밝아진다. 가지에서 '뚝' 하고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고 숲속에서 짐승의 푸석거리는 소리도 귀에 들어온다.
요즘 나는 등잔불 아래서 허균許筠의 <한정록閑情錄>을 다시 펼쳐 들고, 옛사람들이 자연과 가까이 하며 조촐하게 살던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음미하고 있다. 몇 해 전에 이 책을 처음 읽고 나서부터 허균을 좋아하게 되었다. 우선 사나이다운 그의 기상과 독서량에 압도되었고, 임진왜란을 전후한 파란만장한 생애가 불우했던 지난 왕조사를 되돌아보게 했다.어느 시대이고 귀재들은 현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얼마 전에 허균의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강릉에서 주문진 쪽으로 뚫린 7번 국도를 가끔 내왕하면서, 명주군(현재는 강릉시로 흡수) 사천면에서 그의 시비詩碑 안내판을 보고도 스치고 지나쳤는데 그 날은 마음먹고 찾아갔었다.
시비는 왼쪽으로 멀리 동해 바다가 내다보이는 소나무 숲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1983년 국문학자들이 주축이 된 '전국 시가비 건립 동호회'가 주관하여 허씨 문중의 도움을 받아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허균의 외가 애일당 愛日堂이 바로 이 언덕 아래 있었다. 지금도 그 마을 이름으로 남아 있다. 허균이 1569년 여기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꿈을 키우면서 살았고, 임진왜란 때 잠시 어머니를 모시고 머물던 곳이 또한 이곳이다. 경포대 가까운 초당 마을에 지금은 주인이 바뀌었지만 그 집안의 본가가 남아 있다.
왜란을 전후하여 허균에게는 불운이 닥친다. 20세 때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둘째 형이 죽고, 그 이듬해에는 누이 난설헌이 세상을 떠난다. 24세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7월에 첫 아들을 낳았지만 피난통에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해 사랑하는 부인이 스물두 살의 꽃다운 나이로 죽는다. 아이도 뒤따라 죽었다.
상처받은 사람이 찾아갈 곳이 어디겠는가. 고향땅일 수밖에 없다. 그해 가을 이곳 애일당에 내려와 어머니를 모시고 지낸다. 오대산에서 뻗어 나온 나지막한 이 산줄기가 교산蛟山인데, 허균은 이를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교산 시비는 그의 '누실명陋室銘'이란 글에서 몇 구절 뽑아 옮겨 놓았다.(누실명의 전문은. 위대한 한국인 시리즈 중 이이화의 <허균>에 번역으로 실려 있는데 몇 군데 표현을 고치면 다음과 같다)
남쪽으로 두 개의 창문이 있는 손바닥만한 방 안
한낮의 햇볕 내려 쪼이니 밝고도 따뜻하다.
집에 벽은 있으나 책만 그득하고
낡은 베잠방이 하나 걸친 이 몸
예전 술 심부름하던 선비와 짝이 되었네.
차 반 사발 마시고 향 한 가치 피워 두고
벼슬 버리고 묻혀 살며 천지 고금을 마음대로 넘나든다.
사람들은 누추한 방에서 어떻게 사나 하지만
내 둘러보니 신선 사는 곳이 바로 여기로다.
마음과 몸 편안한데 누가 더럽다 하는가.
참으로 더러운 것은 몸과 명예가 썩어 버린 것
옛 시인도 떼담집에서 살았다네.
군자가 사는 곳을 어찌 누추하다 하는가.
이 글에서도 우리는 허균의 넘치는 패기와 당당한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참으로 더럽고 누추한 것은 거처에 있지 않고 몸과 이름을 함부로 파는 그 처신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집의 가치는 그 크기나 실내장식 또는 가구 등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사는 주인의 인품에 달린 것이다.
옛글에 '길인주처 시명당 吉人住處 是明堂'이란 구절이 있는데. 명당이란 산 좋고 물 좋은 좌청룡 우백호의그런 지형이나 지세에 있지 않고, 어진 사람이 사는 그곳이 바로 명당이란 말이다.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명산이 되고, 물이 깊지 않아도 용이 있으면 신령스러운 것이다.
옛사람들은, 특히 안으로 여문 사람들은 자신이 몸담아 사는 주거공간에 대해서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 손바닥만한 방이 됐건 됫박만한 방이 됐건 또는 게딱지 같은 집일지라도 마다하지 않고, 주어진 비좁은 공간에서 사람의 도리를 배우고 익히면서 삶을 조촐히 누릴 줄 알았다.
수십 억짜리 호화저택에 살아야만 성공한 인생으로 착각한 후예들이 있다면 이와 같은 옛 거울에 오늘의 자신을 비춰볼 수 있어야 한다. 과연 이런 집에서 살아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가. 호화로운 저택만큼 자신의 속사람도 제대로 여물었는가.
그 시대의 귀재요, 저항아인 허균은 주변의 시기를 받아 몇 차례 탄핵을 받고 그때마다 관직에서 물러나지만 그의 신념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
"내가 세상과 어긋나 죽거나 살거나 얻거나 잃거나 간에 내 마음에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내가 오늘날 미움을 받아 여러 번 명예를 더럽혔다고 탄핵을 받았지만 내게는 한 점의 동요도 없습니다. 어찌 이런 일로 내 정신을 상하게 하겠습니까."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구절이다. 그는 광해군 10년, 역모를 꾸몄다 하여 처형된다. 그의 나이 50세 때다. 허균은 두 차례나 북경에 사신으로 따라가 가재를 털어 4천 권이나 되는 많은 책을 구해온다. 그의 탐구정신과 방대한 독서량의 원천이 여기에 있다. <한정록>의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다음 언젠가 숲 아래에서 속세와 인연을 끊고 세상을 버린 선비를 만나게 될 때, 이 책을 꺼내어 서로 즐겨 읽는다면 내 타고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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