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고 싶은 법정스님의 글

[스크랩] (4) 눈고장에서 또 한 번의 겨울을 나다 -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에

문근영 2012. 8. 4. 12:28

법정스님의 모습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에


첫눈이 내렸다.

거추장스런 잎들을 훨훨 떨쳐 버리고 알몸을 드러낸 나무와 숲에 겨울옷을 입혀주려고 눈이 내렸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달력에 의하면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닌 달'인 11월. 그 11월에 들어서면 나무들은 여름과 가을철에 걸쳤던 옷을 미련없이 훨훨 벗어버린다. 나무들이 모여서 이룬 숲은 입동立冬 무렵이면 겨울맞이 채비를 다 끝내고, 빈 가지에 내려앉을 눈의 자리를 마련해 둔다.

누가 시키거나 참견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물러설 줄 아는 것이 오묘한 질서, 이게 바로 어김없는 자연의 조화調和다.

첫눈이 내리던 날 숲은 잠잠히 흰옷 입은 길손을 맞아들였다. 내 오두막 난로의 굴뚝도 연기를 피워 올리면서 겨울 친구를 반갑게 맞이했다.

사람들은 첫사랑을 못 잊어한다. 때묻지 않아 그만큼 순수한 마음으로 닦여진 아름다운 인정이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승달 같은 애틋함과 저녁 종소리 같은 여운을 지닌다. 어떤 관계는 초이틀 달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사이는 초사흘 달일 수도 있을 것이다. 초나흘이나 초닷새에 이르면 그만큼 애틋함과 풋풋함은 덜하고 서서히 자기 고집을 드러내어 무뎌지기 시작한다.

계절만 하더라도 처음 맞이할 때가 가장 신선하다. 초봄과 초여름과 초가을, 그리고 초겨울은 신선한 계절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한여름이나 한겨울, 봄과 가을이 무르녹게 되면 처음 그 산뜻했던 느낌과 분위기는 소멸되고 만다.

화엄경에, '초발심시 변성정각 初發心時 便成正覺'이란 말이 있다. 최초에 한 마음을 냈을 때 곧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 다시 말하면 맨 처음 먹은 그 한 생각이 마침내 깨달음을 이룬다는 뜻이다.

한 송이 꽃이 피어나면 뒤를 이어 가지마다 꽃들이 피어난다는 소식이다. 꽃이 필 때 매화가 됐건 일시에 다 피어나는 것은 아니다. 맨 처음 꽃망울을 터뜨리고 한 송이가 피어나면 이 가지 저 가지에서 수런수런 잇따라 피어난다.

첫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초지일관初志一貫, 처음 세운 뜻을 굽히지 말고 끝까지 밀고 나가야 그 뜻을 이룰 수 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다. 내 자신에게도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해당될 말이기 때문이다.

"중놈 새끼들 또 지랄이야!"

얼마 전 총무원장 선출을 두고 조계사에서 일부 승려들이 난동을 부린 장면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바로 그 무렵 서울 강남에 볼 일이 있어 안국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양재 쪽으로 가는데, 내 옆자리에서 신문을 펼쳐보던 40대 남자가 자기 친구에게 신문을 건네 주면서 내뱉듯이 한 소리다.

"중놈 새끼들 또 지랄이야!"

같은 옷을 입은 나더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귀에는 몹시 거슬렸지만, 사실이 사실인지라 잠잠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랄은 지랄병의 준말로 간질을 의미한다. 간질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주기적으로 도지는 질병이다.

조계종 승려들의 종권을 둘러싼 난동은 이번에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 잊어버릴 만하면 주기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지랄병처럼 자주 되풀이되고 있다. 이런 사실은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부끄러운 작태다.

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조계종 대웅전 입구에서 기자를 만난 74세의 박순주 할머니는 이번 사태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잿밥에만 눈이 어두운 스님들은 전체 스님들 중에서 한 줌밖에 안되거든. 고것들을 어떻게든 쪼까내야 할 텐데...... ."

그 할머니의 지적대로 무슨 명분에서건 잿밥(종권)에 눈독을 들인 승려들은 소수다. 미꾸라지 몇 마리가 온 강물을 흐려 놓는 그 소수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한 마디로 출가 수행자로서 일상적인 정진이 결여된 출가 정신의 부재자들이다. 절에 들어와 머리를 깎고 먹물옷은 걸쳤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운 바도 없고 선원에서 안정된 정진의 수행도 없이 지극히 세속적인 업만 익혀 왔을 뿐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그들의 용모와 언어와 동작에 그대로 나타난다.

누구나 처음 입산 출가할 때는 비장한 결심으로 세속의 집을 등지고 절에 온다. 그러나 수도 생활이란 겉으로 보면 한가하고 편한 일 같지만 자기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에서 이겨내야 하는 가시밭길이다. 세속적인 자아와 출세간적인 자아와의 갈등에서 단호히 떨치고 일어나야 한다. 누가 낱낱이 참견하거나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타락의 함정이 여기저기 입을 벌리고 있다.

긴말할 것 없이, 세속의 집을 등지고 나올 때의 그 첫마음을 잘 지키고 가꾸는 피나는 정진이 따르지 않으면, 그 누가 됐건 '잿밥에만 눈이 어두운 한 줌의 중'으로 전락되고 만다.

맨 처음 먹은 그 한 생각最初一念을 잊지 말아야 한다. 수행자는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이다. 새롭게 태어남이 없으면 범속한 일상사에 물들어 마침내 부패하고 만다. 이건 수행자만이 아니다. 스승과 제자, 아내와 남편, 친구 사이도 처음 만났을 때의 간절하고 살뜰했던 그 첫마음을 지키고 가꾸면서 항상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은 거저 되는 일이 아니고 끊임없는 인내와 노력이 받쳐주어야 하는 인생의 길이다.

첫마음을 잊지 말라. 그 마음을 잘 지키고 가꾸라.

1998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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