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
도종환 (1954~ )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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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넘으면 무엇이 있나. 아무것도 없을 수도, 더 높은 벽이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벽보다 더 숨 막히는 황야가 버티고 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는 잊지 못할 자유의 실감이 묻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벽은 무언가를 가두는 것이겠지만, 더 많은 이들에게 그것은 넘기 위해 존재한다. 진정 갇히는 것은 넘으려고도 하지 않을 때이므로 담쟁이는 핏줄이 온몸으로 뻗어가듯 벽을 오르고 벽을 나아간다. 이 엄연한 사실에 한 모금의 갈증과 의지를 보태어 쓴 것이 이 시다. 그런데 누군가 교과서에서 ‘담쟁이’를 걷어내려 한다고 한다. 이 참담한 생각이 가두려는 자의 것인지 깊이 갇혀버린 자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도처에서 사람이 비명(非命)에 가도 비명이 안 들리는 사회, 한 인간을 삼백 일이 넘도록 공중의 크레인에 세워두고도 슬픔에 젖지 않던 이곳이, 어떤 눈에는 벽 없는 낙원으로 보이는가 보다. 시인은 아플 자유도 없는가. 돈도 아니고 힘도 아닌 시라는 것에 들이대는 눈먼 칼, 이래 가지고야 어디 ‘쪽팔려서’ 계속 쓰겠나.
이영광 (시인)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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