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에 짐승이 사라져 가고 있다. 노루와 토끼 본 지가 언제인가. 철 따라 찾아오던 철새들도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여느 해 같으면 지금쯤 찌르레기와 쏙독새, 휘파람새 소리가 아침 저녁으로 골짜기에 메아리를 일으킬 텐데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없어 산과 들녘뿐 아니라 산에 사는 사람의 속도 가뭄을 탄다.
라고 물었다. 노인은,
“예,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주 오랜 옛날 이 산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수행이 뛰어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 하고 묻기에 제가 답하기를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5백 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큰스님께서 바른 법문으로 이 여우의 몸을 벗게 해 주소서.”
라고 간청했다. 스님은 그때처럼 다시 물으라고 일렀다.
“수행이 뛰어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스님이 답했다.
“인과에 어둡지 않다(不昧因果.”
노인은 이 말끝에 크게 깨닫고 스님께 말했다.
“큰스님의 한마디로 저는 여우의 몸을 벗게 됐습니다. 벗은 몸은 이 산 너머에 있으니 원컨대 죽은 스님을 천도하는 법식대로 해주소서.”
백장 스님은 대중을 맡아 돌보는 유나에게 점심 공양 후에 죽은 스님의 장례식이 있을 거라고 일렀다. 앓는 사람이 없었는데 장례식이라니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공양이 끝나자 큰스님은 대중을 이끌고 뒷산 바위굴로 가 주장자로 죽어 있는 여우를 끌어내어 그 자리에서 화장했다.
그날 밤 백장 스님은 위의를 갖추고 법상에 올라가 낮 동안에 있었던 전후 사정을 대중에게 말씀했다. 이 때 큰스님의 맏제자인 황벽 스님이 물었다.
“노인은 그 옛날 묻는 말에 잘못 답하여 5백 생 동안이나 여우의 몸을 받았다는데, 만약 그 때 바르게 답했다면 그 노인은 무슨 몸을 받았을까요?”
황벽은 큰스님 곁으로 가까이 다가서면서 갑자기 스승의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이때 벽장 스님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달마의 수염이 붉을 거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 곳에도 붉은 수염의 달마가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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