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높고 습기가 많은 장마철은 차 맛이 떨어진다. 이 구석 저 구석을 정리하다가 까맣게 잊어버린 차 덖는 프라이팬을 찾아냈다. 자루에 ‘차 전용’이라고 표시까지 해 놓은 것이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는 말도 있듯이 차 덖는 기구를 본 김에 차를 덖었다. 우선 뭉근한 불에 프라이팬을 데우면서 사나흘 마실 차를 덜어서 덖는다. 이때 조그만 대수저로 차를 저어야 차가 타지 않고 고루 덖어진다.
차 덖는 향기가 나기 시작하면 이내 프라이팬을 불에서 내려놓고 식혀야 한다. 자칫 때를 놓쳐 차를 태우면 헛일이기 때문이다. 식은 차는 차 통에 넣어 때에 따라 꺼내어 쓴다. 같은 차인데도 맛이 산뜻하다. 차 덖는 향기는 차 맛에 못지않다. 요즘은 시중에 차 향로가 있어 묵은 차를 넣고 티라이트를 켜 차 덖는 향기를 차와 함께 음미할 수 있다. 이때도 가끔 차 향로에 올려놓은 차를 뒤적여 주어야 차가 타지 않는다. 햇차는 아까우니까 이미 향기와 맛이 떨어진 묵은 차를 차 향로용으로 쓰면 된다. 15년 전 인도여행 끝에 인도양의 진주로 불려지는 스리랑카에 들렀을 때였다. 실론티의 명산지 누와라 엘리야, 해발 1,500에서 1,700미터 고지에서 질 좋은 홍차가 생산된다. 한 차 공장에 들렀을 때 건조실에서 생엽을 말리는 풋풋한 차 향기와 마주했다. 인도 평원을 다니면서 지칠대로 지친 나그네의 몸과 마음이 그 고마운 차향기로 인해 큰 위로를 받았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차 향기! 인도 출신으로 녹색운동의 영성적 지도자인 사티쉬 쿠마르가 지난 봄 녹색평론사의 초청으로 우리나라를 다녀갔다. 그 때 그가 한 강연의 내용이 <녹색평론>에 실렸다. 그가 20대의 젊은 시절, 어느 날 신문을 읽다가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 경이 핵무기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는 기사를 보고 큰 자극을 받는다. ‘그는 90세의 나이에 세계평화를 위해 감옥에 갇혔다. 26세의 젊은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티쉬 쿠마르는 자신은 26세의 노인이었고 그는 90세의 젊은이였다고 술회한다. 그는 이날의 충격으로 한 친구와 함께 인도의 뉴델리를 출발하여 모스크바, 파리, 런던, 워싱턴으로 세계여행을 떠난다. 그것도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두 발로 걸어서 가기로 결심한다. 2년 반 동안 8천 마일을 걸으면서 땅을 밟고 꽃향기를 맡으면서 나무와 강을 바라보고 산과 사막을 지나다니면서 그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경험한다. 그가 러시아를 여행할 때 여성 두 사람에게 평화의 메시지가 적힌 전단지를 건넨다. 왜 우리가 걸어서 여행을 하는지, 우리의 목적이 무엇인지, 왜 돈 한 푼 없이 여행을 하는지 등이 적힌 사연이다. 전단지를 받아 본 그들은 인도에서 모스크바까지 돈 한 푼 없이 걸어서 왔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자신들이 근무하는 차 공장으로 데리고 가 차 대접을 한다. 그곳에서 나올 때 네 개의 차 묶음을 주면서 그들은 말한다. 하나는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수상에게 주고, 한 묶음은 프랑스 대통령에게, 한 묶음은 영국 수상에게, 마지막 한 묶음은 미국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메시지도 함께 담아 부탁한다. “저희가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핵무기의 단추를 눌러야겠다는 미친 생각이 들 때 잠시 멈추고 이 신선한 차를 한 잔 마시라는 것입니다.” |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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