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스크랩] 인조의 외교 의례 [김문식]

문근영 2012. 4. 26. 01:02

제 264 호
인조의 외교 의례
김 문 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인조 대에 있었던 호란(胡亂)은 중원을 지배하는 세력이 명에서 청으로 교체되면서 일어난 국제 전쟁이었다. 청의 역사는 1616년에 누르하치가 만주족을 통일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청이 중국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1644년 순치제가 북경을 점령하고, 1683년 강희제가 삼번(三藩)의 난을 진압함으로써 가능했다. 청이 중국을 장악해 가는 동안, 명과 우호 관계를 유지했던 조선은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두 차례의 침략 전쟁을 경험한 것은 물론이고 오랜 우방이었던 명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기까지 했다. 1637년 1월에 남한산성을 내려온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면서, 명과의 공식적인 외교는 단절되었다. 그러나 조선과 명의 은밀한 협조는 계속되었고, 이를 우려한 청은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했다. 인조는 청의 강압적인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명의 입장을 고려하는 외교를 펼쳤다.

조선시대 외교는 국상보다 더 우위

중국의 황제가 외교문서를 보내면, 조선의 국왕은 교외까지 나가 맞이하고 궁궐의 정전에서 엄숙한 의례를 통해 문서를 접수하는 것이 관례였다. 황제와 국왕은 군신(君臣) 관계에 있었으므로 군주가 내리는 문서를 신하가 받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인조는 명의 외교문서를 접수하며 이러한 관례를 충실히 따랐다. 가령 1626년(인조 4) 6월에 명 사신이 외교문서를 가지고 오자, 인조는 모화관에 마중을 나갔고,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에서 문서를 접수했다. 정묘호란을 앞두고 중원의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던 시점이었다. 이 때 인조의 관복은 익선관에 곤룡포였는데, 기존의 외교 의례를 따른 결과였다. 그러나 당시 인조는 생모인 인헌왕후가 사망하여 상복을 입는 상황에 있었음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복식이었다. 조선의 국상보다 명과의 외교가 우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에 해당한다. 병자호란 직전인 1636년(인조 14)에도 비슷한 사례가 나타났다. 감군(監軍) 황손무가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오자, 인조는 모화관에 나가 맞이하고,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에서 문서를 접수했다. 이때 인조는 창경궁에 거처하고 있었지만, 상대를 예우하기 위해 일부러 인정전으로 온 것이다.

국가 외교에는 예우와 격식, 그리고 자존심이 있어야

인조가 청의 외교문서를 받은 것은 1637년 11월의 일이었다. 청 황제가 인조를 조선 국왕으로 봉하는 문서와 인(印)을 보내는 중요한 행사였다. 이 때 인조는 교외에 나가 칙사를 맞이하고 인정전에서 외교문서를 접수했다. 명의 외교문서를 접수할 때와 같은 방식이었다. 그러나 청 사신이 무리한 요구를 했다. 조선으로 귀화한 중국인과 청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달아난 조선인을 모두 돌려보내라는 요구였다. 1639년 6월에 파견된 청 사신은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를 왕비로 봉하는 문서를 가지고 왔다. 그는 귀화한 중국인을 돌려보내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인조가 직접 입조(入朝)하여 청 황제에게 답변하라고 요구했다. 이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있던 상황에서 인조까지 청으로 가면, 국왕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인조의 외교 의례에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1639년 9월에 파견된 청의 사신은 병이 심각하다는 인조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인조는 방 안에서 사신을 만나 다례(茶禮)를 하고 숙소로 돌려보냈다. 병중이라고는 하지만 3개월 전의 의례와는 매우 다른 방식이었다. 그 해 11월에는 황제의 칙서를 가진 사신이 도착했다. 이번에도 인조는 신병을 이유로 방 안에서 사신을 만나 다례만 했고, 칙사가 돌아갈 때에는 승지를 보내 병 때문에 직접 만나서 이별하지 못한다는 뜻을 전하게 했다. 1640년(인조 18) 10월에 다시 칙서를 가진 사신이 파견되자, 인조는 창경궁의 편전인 양화당으로 나와 외교문서를 받기만 했다. 인조가 정전이 아닌 편전을 택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청 사신이 국왕의 질병 정도를 염탐하려 하자, 인조는 내관의 부축을 받으며 이불과 베개도 치우지 않고 접견했다.

인조는 청이 무리한 요구를 계속하자 외교 의례를 변경시켰다. 병 때문에 의례를 제대로 거행할 수 없다고는 했지만, 실제는 예우의 수준을 낮춤으로써 자존심을 지키는 방안을 택한 것이다. 조선이 청에 대한 외교 의례를 예전대로 회복시킨 것은 18세기에 들어가서였다.

▶ 글쓴이의 다른 글 보기
글쓴이 / 김문식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저서 : 『조선후기경학사상연구』, 일조각, 1996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문헌과해석사, 2000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
『 조선후기 지식인의 세계인식』, 새문사, 2009 등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