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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1949년 7월에 대학의 학부졸업 논문으로 쓴 「반계 유형원 연구- 실학 발생에서 본 이조사회의 일단면」은 그 자체로 독보적이요, 실학연구의 단초를 연 것으로 역사학계의 전설로 남아있다. 그런 그가 학계를 떠나 임시수도 부산에서 언론계에 몸 담기 시작한 것은 우선은 다급한 생계 때문이었지만, 장지연∙박은식∙최남선∙신채호∙안재홍∙정인보∙문일평과 같은 언론인이면서 역사학의 선각자들을 사표로 삼았던 것과 무관치 않다. 과연 그는 지사풍 언론인의 맥과 전통을 이은 마지막 세대의 언론인이었다.
그는 “신문은 오늘의 역사요, 역사는 어제의 신문”이라면서 언관은 곧 사관(史官)이어야 한다는 언론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언론인의 가난과 고달픔을 맹자의 “하늘이 대임을 내릴 때는 먼저 심지와 근골을 괴롭힌다”는 말에 비추었고, 언론인의 자세를 “부귀도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빈천도 그 뜻을 바꾸지 못하며, 위무도 굴복시킬 수 없는 대장부”의 기상에 견주었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를 시작으로 전 언론계로 확산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두고 “과연 언론은 일어섰다. 그것도 국내외에 그 소신을 떳떳이 밝힘으로써 이제는 후회가 없다는 것을 다짐하면서 일어섰다. 이 몇 해 만의 통쾌인가”하며 환호했다. 그러나 그 몇 달 뒤인 1975년 3월 새벽, 농성 중인 동아일보 기자들을 끌어내기 위해 회사측이 2백여 명의 폭도들을 동원했을 때 그는 “이 놈들아, 내가 다 보고 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외치며 그 현장을 모두 다 지켜봤다.
회사에서 축출당한 기자들이 기협회관 복도에서 “동아의 정통성은 폭도를 고용한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언론을 사수하는 우리에게 있다”면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했을 때, 그는 이들 해직기자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이었다. 해마다 이들 동아∙조선투위 기자들에게 친필로 연하장을 보내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어느 해던가, 그는 청초(淸初)의 사상가 고염무의 ‘염치’라는 글을 인용, “송백은 추위가 와도 끝까지 시들지 않고, 닭은 비바람이 쳐도 울 때는 운다(松柏後凋於歲寒 鷄鳴不已於風雨)”라는 말로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주려 애썼다.
1971년 4월 19일, 그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주도적으로 결성, 김재준∙이병린과 함께 3인 대표 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그것을 끝까지 지키고 이끈 것도 그였다. 유신정변 이후에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곧 그였고, 그가 곧 민주수호국민협의회였다. 스스로 원지를 긁어 성명을 발표한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가 있어 민주화 투쟁의 명맥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는 천도(天道)를 아는 역사학자였고, 직시(直時)의 비판을 사명으로 하는 당대의 언론인이었으며, 폭압의 시대에 민주화의 길을 개척해 온 선각자였다. 그가 한 마디 변명도 없이 청빈으로 일관한 것은 그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가 만년의 행지(行止)로 같은 시대를 살았던 우리 모두의 영원한 사표로 되지 못한 것은 못내 안타까운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