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70 호 |
| 타버린 ‘들꽃 정치학’ |
| 차 미 례(언론인/번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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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유의 꽃과 나무들로만 조성된 강원도 진부 인근의 한국자생식물원에서 10월9일 새벽, 원인미상의 불이 나서 2층 전시관과 세미나실 건물 2314m²가 전소되었다. 뉴스를 접하고 달려간 사람들의 눈 앞에 나타난 화재현장은 2층 통나무건물이 몽땅 소실된 채 고열로 뒤틀리고 녹아내린 강철빔만 남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세미나장 의자들 수백 개의 앙상한 철골과 시커멓게 탄 우리 꽃 팜플렛의 잿더미가 골조만 남은 철계단 주위에 덩어리로 쌓인 채 빗물에 젖어있었다. 무심한 가을비 아래 청보라빛 시든 채꽃의 가는 목들은 쓸쓸히 흔들리고, 짙게 단풍 든 숲을 배경으로 이미 져버린 구절초와 쑥부쟁이의 뿌연 군락지들은 보는 이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어렵게 일군 자생식물원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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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월정사 직전의 샛길로 2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한국자생식물원은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식물로만 조성된 산림청 지정 사립식물원 제1호이다. 엉뚱하게도 이 자생식물원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도 등장하는 외국 에델바이스 종자로 시작되었다. 에델바이스로 알려진 우리나라 자생 솜다리가 마구 채취되어 설악산 등지에서 표본으로 팔리는 것을 본 한국자생식물보호운동가(우리나라에서는 좋은 일을 먼저 하면 다 ‘운동’이 된다) 김창렬씨가 솜다리의 멸종을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 에델바이스 종자를 구해다 강원도 진부에 땅을 빌려 대량 재배를 시작한 것이다. 예쁜 에델바이스 액자 덕분에 한국산 솜다리들은 표본 신세와 멸종을 면했고 원래 정치학도였던 그는 들꽃 농사꾼이 되었다. 솜다리 뿐 아니라 한국의 수많은 자생화와 풀, 나무들이 서식지를 잃고 멸종해가는 현실에 주목한 것이다. 가장 흔한 한국꽃조차 이제 한국인들에겐 “이름 모를 나무 밑에 핀 이름 모를 꽃”이 된 것을 본 그는 구절초 개미취 감국 등 들국화류를 대량 재배해 진부 일대 영동고속도로 가로화로 심었다. 코스모스보다 오래 피고 향기가 진동하는 들국화 꽃길은 평창군의 명물이 되었다. 전국의 학교화단, 고궁, 공원과 도심 로터리만이라도 외국꽃을 몰아내고 우리나라 꽃으로 채우자는 캠페인을 시작한 그는 전국을 다니며 화훼업계 동조자들, 야생화 연구가, 식물학자, 조경가, 야생화 전문 사진작가들 2백여 명을 발굴 조직해서 한국자생식물협회를 만들고, 해외의 자생식물박람회나 행사에도 참여하는 등 놀라운 정치력(?)을 발휘했다. ‘들꽃 정치학‘의 개가였다. |
따뜻한 사회 복지논쟁이 들꽃에까지 미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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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위기 천연기념물 섬백리향, 천연기념물 미선나무와 울릉국화의 증식에 성공한 그는 첨단 유리온실을 마련해 99년부터 일반 공개를 시작했다. 이 식물원은 수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천연기념물과 희귀 멸종위기식물, 한국 특산 약용식물 등 1200종 이상을 자연 생태계에 가깝게 종류별로 보존하고 있어 20년 넘게 많은 탐방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둥글레, 은방울꽃 기린초, 하늘나리 등의 초본이 전시된 조경소재관, 220여종의 고유 자생식물을 관상용으로 개발하는 분경분화관, 약용식물 독성식물 향기식물등 독창적 분류를 해놓은 주제원도 마련했다. 입장료 대신 풀꽃사진 엽서에 기르는 법을 인쇄해서 꽃씨와 함께 주는 등 보급과 홍보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폐철도 침목을 손수 가져다 오솔길 계단으로 썼고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흙 한 줌까지도 피와 땀과 정성을 쏟아부었다. 신출한 창의력과 몸으로 때우는 헌신 덕에 지금은 수많은 광팬(?)들을 갖고 있는 자생식물원은 그러나 보험에 들지 못했다. 스턴트맨같은 위험직종이나 치유된 암환자 등 보험이 절실하게 필요한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외진 산속에 있는 목조건물과 대량의 고유 식물자원에 대한 보험가입을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눈 앞에서 불을 뿜는 화재현장과 소방차의 물이 떨어져 가지러 갈 때마다 도로 거세지는 불길을 보며 그는 이제 그만 식물원을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발가락을 심하게 다쳤다고 무릎을 절단해선 안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수많은 착한 사람들과 할미꽃, 분홍바늘꽃, 꽃창포, 구절초들과 느티나무, 팽나무, 구상나무, 소나무들이 자생식물원의 화재를 안타까와하고 복구를 염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들꽃 정치학 아닌 사람의 정치학으로 복지사회가 이뤄져 보험의 사각지대가 해소될 날도 올 것이다. 그러면 30대 청년으로 첫삽을 들었던 들꽃의 대부가 60 넘은 나이에 저 많은 꽃들과 평생의 목표를 버리고 떠날 일은 없게 될 것이다. 온 사회에 복지논쟁이 뜨겁다. 우리 꽃도 복지가 필요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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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차미례 |
· 언론인/번역가/서평가 · 前 중앙일보,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 前 출판저널 주간 · 前 문화일보 문화부장, 북 리뷰 편집장 · 前 KBS-TV 등 영화번역자 · 서울대 문리대 영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卒 · 저서: <미술 에세이> · 번역서: <강철군화 (잭 런던 작)>, <빅토르 하라 (조안 하라 저)> <성자와 학자 (테리 이글턴 저)> 등 · 번역영화: <가시나무새>, <야망의 계절>, <홀로코스트>, <코스비가족만세>,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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