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처용암(處容岩)과 주변의 모습들 (울산)

문근영 2011. 9. 20. 08:52

 

 용연과 국가산업단지 사이의 처용암

 

  처용암 안내입간판 처용가비. 정자

 현재 세워져 있는 처용가碑는 황태강撰. 김동욱書. 울산문화원과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  1985년12월8일 공동 立.

 

 

  이른 아침 출조행선

 

 처용암 위에 빽빽하게 들어선 팽나무 사철나무 등의 상록수와 이름모를 철새들, 갈매기떼들이 어우러져 애처러울 뿐이다.

 

 

  망해사지석조부도(望海寺址石造浮屠)  보물  제173호      울산 울주군  청량면 율리 산16   
  이 2기의 팔각원당(八角圓堂)의 부도는 망해사의 법당 북쪽에 東,西로 자리하고 있는데,
  신라(新羅) 헌강왕(憲康王)(875∼886, 재위) 때 건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망해사 축대 한켠에 놓여져있는 불두없는 석불.  안타까워 머리와 비슷한 돌을 본인이 올려놓았다.

 울산 처용암(處容岩)     울산 남구  황성동 668-1
울산 황성동 세죽나루터 앞바다 가운데에 놓여 있는

처용랑(處容郞)과 개운포(開雲浦)의 설화와 관계가 있는 바위섬이다.

신라 49대 헌강왕(875 - 886재위)이 이곳 개운포에 놀이를 와서 쉬고 있을 때

갑자기 운무(雲霧)가 가려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바다용(海龍)의 조화이니 좋은 일을 해주어 풀어야 한다고 했다.

왕은 즉시 영을 내려 이 근처에 용(龍)을 위한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현 울주군 청량면 망해사)
그러자 운무는 씻은 듯이 그치고 해가 나 이곳을 개운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동해 용왕이 크게 기뻐하며 바다에서 일곱왕자를 거느리고 춤을 추었는데 이중

처용이 왕을 따라 서울(경주)로 가서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맞고
급간(級干)이란 벼슬을 얻어 정사를 도왔다고 한다.

이때의 처용이 바위 밑에서 나왔다고해서 이를 처용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울산군 처용암 조에도 ‘고을 남쪽 37리 개운포 가운데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때 동해 용왕의 아들이 거기서 나왔으며,
모양이 기괴하고 가무를 좋아하여 사람들이 처용옹이라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처용암이 있는 세죽나루는 90년대 초까지는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는데. 공단이 들어서면서

횟집이 들어서기도하였지만 오염때문인지 지금은 나루터 인근에 식당 한집이 있을 뿐이며

나루터에는 출조인들을 위한 배와 유람선인듯한 작은 배들이 떠 있으며,

처용가시비와 정자, 화장실 등이 세워져있다.

처용암 위에 빽빽하게 들어선 사철나무 등의 상록수와

이름모를 철새들, 갈매기 떼들이 개발의 무게에 짓눌려 애처러울 뿐이다

 

☎처용가 (處容歌)   삼국유사》 기이편 “처용랑과 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49대 헌강왕 때 처용이란 인물이 지었다고 하며

역신이 그의 아내를 흠모하여 동침하고 같이 잠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돌아와서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러자 역신은 처용이 노하지 않은 것에 감동하여 그 앞에 나타나 꿇어앉았다고 한다.
그 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역신을 쫓았다고 한다.

 

동경명기월랑(東京明期月良)서울 밝은 달밤에
야입이유행여가(夜入伊遊行如可):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입랑사침의견혼(入良沙寢矣見昆):들어와 자리를 보니
각오이사시랑라(脚烏伊四是良羅):다리가 넷이로구나.
이혜은오하오질고(二兮隱吾下於叱古):둘은 내 것이지만
이혜은수지하이고(二兮隱誰支下焉古):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의오하시여마오은(本矣吾下是如馬於隱);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탈질랑을하여위리고(奪叱良乙何如爲理古):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출처 : 참 나를 찾아 산사로의 여행
글쓴이 : 木 石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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