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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을 질러서라도 하고 싶은 말을 하다 / 강명관

문근영 2011. 8. 2. 07:47

제186호 (2011.3.11)


불을 질러서라도 하고 싶은 말을 하다

강 명 관(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우정조 8년(1784) 9월 5일 우부승지 김재찬(金載瓚)은 정조에게 병조에서 올라온 것이라면서 방화미수 사건 한 건을 보고한다. 사건의 내용은 대개 이러하다. 그 날 저녁 남산의 봉화군들은 잠두봉(蠶頭峰, 지금 한강가의 절두산 천주교 성지가 있는 곳) 근처에 흰 옷에 삿갓을 쓴 사내 하나가 서성이는 것을 발견한다. 어딘가 수상하게 보인다. 금위영의 군사와 함께 출동하여 사내를 잡았다. 사내는 호패도 없었고, 뭔지는 모르지만 10줄 정도 글씨를 끼적여 놓은 작은 종이쪽과 짚단 둘, 그리고 유황을 약간 가지고 있었다. 봉화군들은 불을 지르려는 계획임을 알아차리고 사내를 족쳤다. 사내는 속에 담아두었던 생각을 순순히 털어놓았다.

정치·사회적 폐단과 억울함을 알리고자

사내의 이름은 공천(孔賤)이었다. 공천은 자신이 원래 함경도 영흥(永興) 사람이고, 열세 살 때 중이 되었으며, 작년부터 동래 국청사(國淸寺)로 와서 지내고 있다 하였다(국청사는 필자가 근무하는 부산대학교 뒤 금정산에 지금도 있다). 그가 상경한 것은 민폐와 승폐(僧弊)에 대해서 조정에 알리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은 도성에 들어올 수 없는 엄한 법이 있었다. 4월부터 남대문 밖 훈조막(熏造幕) 부근의 상놈 서검동(徐儉同)의 집에서 넉 달을 머무르며 머리털이 자라기를 기다렸다. 겨우 상투를 틀 정도가 되자 성 안으로 들어와 배오개의 여객(旅客)에서 머무르며 11조의 폐막(弊瘼)을 썼다. 그게 앞의 종이쪽이었다. 봉화군에게 잡힌 그날 불을 질러 주의를 끈 다음 그 종이쪽의 내용을 조정에 알리려고 할 참이었다.

공천은 불을 지르지는 못했지만 체포되어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것, 곧 11조의 폐막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11조의 폐막이란 다음과 같았다. 1) 각 고을의 환곡의 질이 극히 열악한 것, 2) 한정(閑丁)이 모두 포대기에 쌓인 아이로 충원되는 것, 3) 금정산성의 성가퀴를 보수하는 일, 4) 각 고을의 시장에서 음주를 금하는 일, 5) 각 곳의 여점(旅店)에서 빚은 놓고 이자를 지나치게 많이 받는 일, 6) 각 고을 관청에서 재소를 지나치게 많이 받는 일, 7) 각처의 놀고먹는 백성들이 투전에 빠지는 일, 8) 봉산(封山)과 송전(松田) 근처에 묘를 쓰는 것을 금할 것, 9) 선현(先賢)의 후손으로서 유리걸식(遊離乞食)하는 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것, 10) 의승(義僧)의 번전(番錢)의 폐단, 11) 부잣집에서 빚을 놓고 이자를 받는 것을 엄히 금할 것.

공천은 당연히 처벌을 받았다. 김재찬은 공천이 불을 지른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봉화대 근처에서 숨어 있다가 불을 지르려는 계획은 너무나도 못된 짓거리라면서 정조에게 엄하게 처벌할 것을 청했고, 정조는 엄하게 형을 가한 뒤 귀양을 보내라 명했다.

지금엔 방송과 신문이 있긴 한데

공천의 사건이 있고 보름 뒤인 9월 21일에도 잠두봉 근처에 방화한 사람이 있었다. 강화 선한(船漢) 고원제(高元濟)가 저지른 일이었다. 고원제는 자신의 몫인 새로 만든 배를 아전들에게 빼앗긴다. 또 관(官)에서 고원제가 부역에 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을 옥에 가두었으므로 고원제는 옥바라지를 하느라 파산하고 만다.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불을 질러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려 했지만, 억울함을 풀기는커녕 처벌을 받는다.

공천의 11조의 폐막 중 환곡과 환자, 그리고 여점과 부자의 돈놀이는 거대한 사회문제였다. 고원제의 경우, 아전과 관의 백성 착취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결코 자질구레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말은 조정의 관료와 왕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될 무지렁이 백성들이 꺼낸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천의 사건을 처리하면서 김재찬은 이렇게 말한다. “근래 법과 기강이 엄하지 않아 습속이 갈수록 악해져서 번번이 자질구레한 일을 가지고 불을 지르는 죄를 애써 범하는 자가 없는 해가 없다.” 백성이 자신의 생각을 조정에 전하기 위해 방화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예사로 쓴다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는 공천과 고원제의 심정을 갖는 사람이 없었으면 한다. 백성이 불을 지르려 했던 심정을 대신하는 방송과 신문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통이 불통을 의미하는 요즘 세상에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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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명관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2001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소명출판, 1999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길, 2006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소명출판, 2007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등 다수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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