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산 허위비각
구미의 대표적인 서예인 중암 김오종 書

정휘창撰 박병규書 1975년 10월 21일 碑建

비각에서 채미정으로 내려가는 길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왕산 허위선생 유허비
이 고장이 낳은 한말의 의병대장 허위 선생은 고종(高宗) 22(1855)년 임은동 현 행정동명은
임오동(林吳洞)에서 청추헌조(聽秋軒祚)의 사남 중 네째로 태어나시니 김해인(金海人) 불고헌 돈(不孤軒 暾)이
임은동의 산수에 반하여 솔권(率眷)하여 거하니 위로 가락국(駕洛國)의 수로왕을 시조로 하여
왕산에게는 증조가 되고,
사형제중 맏형 방산 훈(昉山 薰)은 한말 대학자로 퇴계학통(退溪學統)을 이은 거유(巨孺)였으며
둘째가 신(藎)으로 요절했고 세째가 성산 겸(性山 兼)이니 아우 왕산을 도와 같이 의병에 가담한 분이고
네째가 왕산 위(旺山 위)이니 그는 어려서 남달리 총명하여 글 짓기를 좋아 했는데 특히 병서를 즐겨 읽었다.
고종황제께서는 그의 인품 됨됨을 알고 특배(特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를 거쳐
의정부참판(議政府參贊)으로 봉직할 때 일제는 광무(光武) 9년 (1905)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제로 체결하니
나라의 외교권은 박탈되고 내정에 깊숙이 간섭을 받아야 했고 끝내는 고종황제도 강제로 양위를 당하고 나니
전국 유림에서는 통분을 참지 못해 방방곡곡에서 창의(倡義)의 기세가 드높을 때 선생은
전국 유림(儒林)에 격문(檄文)을 띄워 분기할 것을 선동하니
전국에서 뜻을 같이하여 분기하더라,
이에 각국 대사관에 통문을 보내 대한제국의 정식군으로서 일본과 싸울 것을 선언하고
전국 의병과 연락하여 일본통감부를 쳐부술 것을
약속하고 경상도 의병 300명을 이끌고 선봉대로 동대문 밖에 이르렀으나
각도의 의병이 약속한 날짜에 당도하지 않아 먼저 일본헌병과 접전이 개시되니
중과부족이라 결사의 투쟁을 벌였으나 끝내는 밀리다가 양평군 유동에서 1908년 6월에 체포되어
그 해 9월 15일 공소원에서 첫 신문이 시작되었으니 누가
' 의병을 일으켰느냐'는 물음에 '내가 일으켰도다' '누가 대장이냐' '내가 대장이다'하고는
일체 입을 열지 않았고
10월 21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유언을 물으니 '내나라 위해 싸우다 잡혔으니
죽을 뿐이지 무슨 유한이 있으랴' 하고 아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국사가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무엇하리! 내 지금 그것을 얻었노라' 라고 썼으니
그의 아들들도 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만주의 간도와 노령(露領)의 블라디보스톡 등지에서 숙부 성산 겸(性山 兼)과 같이
구국의 일선에서 활약 했으니 임온 허씨 일족이 구국 항쟁에 나서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거족적으로 나선 것은 논밭 3000두락을 팔아 군자금으로 내어놓고 격려를 아끼지 않은 백형인
방산 훈(昉山 薰)의 공헌한바가 지대하였음이 세상에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가산을 팔아 아우를 도와서 죄다 내어놓고는 청송으로 이거하여 그 곳에서 세상을 마쳤다하니
'그 형제 그 아우라' 선비로서의 憂國忠精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광복후 정부에서는 왕산의 격전지인 동대문에서 청량리로 통하는 길을 왕산로(旺山路)라 하였으니,
이는 왕산선생의 아호를 따서 명명했으니 이 강토 다 마르고 닳는 그 날까지 그의 구국의 혼은 영혼 할지며
이 길을 지나는 길손의 가슴에도 구국의 정이 메아리치며 울릴 것이다.
이를 기리고자 순국기념비가 세워지고 이 곳 금오산에 유허비가 서게되어
금오산을 찾는 이들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하고 있다.
채미정입구를지나 마지막 주차장가는길의 왼쪽에 비각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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