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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거나 빌리면 열 일 제치고 당장 몰입하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다. 한창때는 더구나 밤을 새워야 맛이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성을 쌓는 따위 형이하학적 유열(愉悅)은 범접조차 못할 충족감이 첫새벽의 박명과 더불어 뻐근히 피어올랐다. 밤을 지새우고도 끄떡없는 체력과 밤 사이에 지식이 부쩍 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아, 기쁨 두 배의 자기 도취를 고의적으로 얌냠거렸다.
지금의 나는 어림없다. 감동은 박제되고 속도는 느려터져 삼매경을 지속적으로 누리기 어렵다. 그럼에도 늘 무얼 읽으려고 애쓴다. 독서를 안하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 경지를 감히 상상하기보다는 읽고 쓰기로 업을 삼는 자의 일상에 그냥저냥 굳은 버릇이다.
최근 구입한 철학책 최근에 구입한 임마누엘 칸트의「순수이성비판 1·2권」(백종현 옮김·아카네 발행)은 소시적에 일역판을 기웃거리다 질겁한 것이어서 적잖이 반가웠다. 20년 걸려 완전 번역한 역자의 지구력이 놀랍고, 오성을 ‘지성’으로, 선험성을 ‘초월성’으로 바꾸는 등 일본식 번역 용어를 탈피한 점이 독자의 한 사람으로 드디어 흐뭇했다.
그때나 이때나 철학은 참 어렵다. 용어 자체가 난삽하여 섣부른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예전의 일본 철학도들 간에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를 한 두름에 엮은 탄식의 노래가 그래서 유행했다고 듣는다. 이른바 ‘데칸쇼부시(타령)’다.
“데칸쇼 데칸쇼로 반 년을 보내고 나머지 반 년은 자면서 지낸다네.“
어째서 그 동네 말은 처음부터 이해하기 힘들까. 백 퍼센트 문외한의 객쩍은 우문으로 돌릴지언정, 일본에서도 철학의 난해는 자구(字句)의 난해라는 불만이 없지 않았다.「나의 이와나미(岩波) 이야기」의 저자 야마모토 나쓰히코가,「선(善)의 연구」로 유명한 니시다 기타로를 두고 터뜨린 불평이 가령 그렇다.
“니시타 철학의 키워드는 ‘절대모순적자기동일’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자기동일이 영어의 아이덴티티라는 걸 알면 다들 애걔걔 할 것이다. 아이덴티티 카드는 신분증명서 아닌가. 그것을 자기동일로 번역한 것은 명역 같지만 아니다. 니시다 본인과 그 책을 필독서로 삼은 학생만 알고 일반 독자는 모르는 말이다.”
경우는 전혀 다르지만, 일어판「조선민요집」,「조선동요선」,「조선시집」등을 낸 김소운 역시 “손톱이 들어가지 않는 니체니 쇼펜하우어 같은 이의 철학서와 혼자 씨름하다가 18세 되던 해에 음독을 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아무려나 철학은 2차대전 이전의 일본과 한국의 청년 지식인들이 꼭 거쳐야 할 ‘교양과목의 첫단추’ 구실을 했다. 깊이 팔수록 불가해한 사유의 자장(磁場)으로 그들의 박래품 욕구를 부추기며 댄디 기질마저 키웠다고 볼 수 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입에 담는다던가, 철학자를 ‘초원에서 마른 풀을 뜯는 동물’에 비유한 메피스토펠레스의 조소를 꼬소하게 읊조리도록 만들었다.
일종의 유행성 포즈로 보지말란 법 없다. 빌려 입은 옷 같은 관념의 고뇌를 지적 응석으로 치장한 감이 있을 망정 당자는 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철학의 빈곤은 곧 인텔리겐차의 실격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문사철’의 쇠퇴 중에서도 철학은 한층 입지가 좁아진 듯한데 근자에 와서 조금씩 나아지는 기미가 보인다.
사는 일의 기본과 바탕에도 눈을 돌려야겠다 백종현 교수의 ‘순수이성비판’ 번역은 130쪽에 달하는 ‘해제’를 맨 앞에 따로 내세워 나 같은 독자도 접근하기가 쉽다. 그 부분만 읽어도 소득이 크려니와, 나는 실상 웬만한 책을 그런 식으로 소화한 지 오래다. 게으르고 힘이 부쳐 여간해서 독파를 마음먹지 못한다. 덕택에 눈치껏 차례를 훑어 이리저리 꿰맞추는 요령만 늘었다. 하물며 덜컥 겁부터 주는 철학서적임에랴. 세계문학전집을 순서껏 대하다가 내키는대로 뽑아 읽은 수법이다. 왕도가 따로 없는 독서 기법의 개인화를 짐짓 누린다.
묵묵히 전공 분야를 천착하는 ‘오리지널 학구파들’의 각고면려에 감복한다. 책사에는 21권짜리 니체전집도 있다. 그속에는 소설처럼 읽다가 혼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물론 들어 있다. 요즈막엔「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도 나왔다. 한편 걱정스럽다. 얼마나 팔릴까 싶어서다. 그러나 든든하다. 이만한 축적이 있어 믿음직스럽다는 낙관에, 가볍기 짝이 없는 말꼬리 이어달리기조 풍토에 대한 실망이 겹친다. 가다가는 사는 일의 기본과 바탕에도 눈을 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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