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학의 개혁, 오늘의 개혁
이 이 화(역사학자)
오늘날 개혁은 혁명보다 더 어렵다고들 말한다. 그러면 혁명을 하지 굳이 개혁을 왜 하려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옳은 말이다.
실학은 조선 후기에 풍미하였던 현실개혁의 이론이었다. 조선 후기, 여러 제도의 문란으로 국가적 위기의 국면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런 시대모순을 해결하고 제도를 개혁하려 많은 학자와 문사들이 일어나 이론을 내놓았던 것이다.
이런 시대의 전제군주였던 영조와 정조는 실학의 이론을 상당 부분 수용하여 현실정책에 반영하였다. 특히 정조는 위로는 벼슬아치와 수령의 부정행위를 막고 아래로는 죄수의 인권을 보장하려 노심초사한 끝에 많은 성과를 올렸다.
실학의 개혁론 뒤늦게나마 수용 분명히 실학은 위기의 시대인 조선 후기 시대정신의 산물이었다. 지금부터 250년 전부터 일어난 풍조였다. 실학의 개혁이론을 뭉뚱그려 보면, “양반과 상놈을 없애자”라거나 “농사짓는 토지를 고루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슬로건에 맞추어졌다. 곧 이론의 중심이 신분제도와 토지제도의 개혁에 두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 추진 핵심인 정조가 죽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오랜 과정을 거치면서 양반 상놈의 차별적 신분제도는 사라졌다. 특히 동학농민전쟁으로 실시된 집강소(執綱所)에서 신분타파의 운동이 세차게 일어나자 갑오개혁에서 이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였다.
하지만 개화정권과 조선총독부에서도 지주제를 옹호하였다. 이승만정권은 민주주의를 역행한 독재정권이었으나 조봉암 농림부장관을 통해 농지개혁을 단행하였다. 비록 유상매수와 유상분배를 기준으로 농지개혁이 어설프게 실시되었으나 법제로 지주제가 사라지고 농민들이 농사지을 농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때의 농지개혁은 북한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기초로 하여 토지를 분배한 데에 자극을 받아 실시하였으나 긴 흐름으로 보면 실학시대 토지제도 개혁의 이론을 뒤늦게 수용하여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참여정부의 여러 개혁조치에 신선미가 떨어진다고도 하고 신물이 난다고도 하고 심지어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개혁이냐”고도 말한다. 사실 한번 짚어보자. 참여정부가 들어선 뒤 정치개혁 등 많은 성과가 있었다. 더욱이 과거사 부분에 있어서는 극회 입법을 통해 개혁조치가 이루어졌다.
그 동안 우리의 근현대사는 오욕과 파행으로 점철되었다. 19세기 말 민족적 모순이 여러 분야에서 전개되었고 식민지를 겪으면서 민족의 고통이 가중되었으며 해방 후 역대 독재정권 아래에서 민주질서가 왜곡되어왔다.
실학적 전통은 결코 죽지 않았다 줄기찬 민중항쟁을 통해 민주질서가 회복되었다. 그런 뒤 민주적 민중적 요구가 분출하였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뒤 과거사 청산의 요구는 드세었다. 그리하여 역적으로 규정되었던 동학농민혁명, 식민지시기 강제 동원, 독재정권에서 자행된 의문사 등 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참여정부에 들어서는 더욱 과거사 청산을 위한 시민사회의 요구가 분출되어 반민족행위 진상규명과 해방 후 자행된 여러 정치적 음모사건과 한국전쟁시기 민간인 학살 등의 사실 규명과 조사 등을 위한 위원회가 발족되었다. 분명히 이런 역사의 치욕을 청산하려는 의지는 진실을 바탕으로 하여 화해를 이룩하고 미래사회의 통합을 위해서 한번 청산하고 넘어야 할 과제였다.
그런데도 과거를 덮어두는 것이 통합의 길이라거니 먹고 살기도 바쁜데 과거사 규명에 돈을 쏟아 붇느냐고 물고 늘어졌다. 이런 주장은 모두 괴변이요 억지이다. 실제로 돈이 들어보아야 큰 다리 한두 개 설치하는 수준이다.
실학파의 개혁이론을 두고 실패했다고 보는 관점은 잘못이다. 당시의 현실개혁을 주도한 세력은 영조나 정조가 아니라 민중의 처지를 살핀 실학자였듯이 오늘날의 과거사 청산은 노무현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아니라 민주의식에 투철한 시민사회와 민주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실학적 전통은 결코 죽지 않았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
글쓴이 / 이이화 · 서원대 석좌교수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 저서 : 『조선후기의 정치사상과 사회변동』,『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한국사 이야기(전 22권)』등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