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土亭 李之涵
| (2) 土亭의 奇行 : '周遊天下'하며 명사들과 교유, 쇠갓 쓰고도 당당했던 '奇人異才' | |||||||||||||||||
토정은 어디에 뛰어난 인물이 있다면 만사 제쳐놓고 찾아가 만났는데, 花潭 徐敬德, 南冥 曺植, 牛溪 成渾, 栗谷 李珥 등과의 交遊가 그렇게 이루어졌다.
박현석의 ‘사우록’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토정이 젊었을 때 화담의 학식이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배우고자 송도(개성)로 찾아갔다. 낮에는 화담에게 글을 배우고
밤에는 객사에서 잤다. 객사의 바깥주인은 행상이었는데 그의
아내가 젊고 예뻤다.
어느 날 안주인이 서방더러 장사 나가기를 권했다. 지아비가 행상을 떠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누라가 전에 없이 아양을 떨며 장삿길을 재촉한 것이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멀리 떠난 척하고 마을을 빠져나온 다음 그날 밤 몰래 집으로 돌아가
바깥에 숨어 동정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여우같은 여편네가 짐작했던 대로 토정의 침소에 들어가 갖은 교태를 부리며 열심히 꼬리를 치고 있었다.
서방이 일이 어찌 되는가 지켜보자 토정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의관을 바로 갖추고는 엄숙하게 남녀가 유별한 인륜도덕을 깨우쳐주는 것이었다. 온갖 교태로 아양을 떨던 마누라가 마침내 부끄러움에 못
이겨 잘못을 빌었다. 이런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던 서방은 단숨에 화담에게 달려가 말했다.
“소인의 집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사온데 참으로 괴이합니다. 혼자 보기 아까워 감히 아룁니다.” 화담이 그 말을 듣고 객사로 찾아가보니 과연 사내의 말이 틀림없었다. 탄복한 화담이 방안으로 들어가 토정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학업과 수양은 이미 내가 가르칠 경지를 넘어섰구려! 원컨대 돌아가는 것이 좋으리라.” 화담은 토정보다 28세 연상인데, 그때 혹시나 자신이 그 옛날 명기 黃眞伊로부터 유혹을 당했던 사건을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남명과의 만남도 비상했다. 토정이 처음으로 남명을 찾아가니 16세 연상인 남명이 뜰 아래까지 내려와 반겨 맞으며 대접이 극진했다. 당황한 토정이 말했다.
“존장께서 어찌 일개 야인에 불과한 후배를 이토록 후대하십니까?” 남명이 웃으며 대답했다. “범상치 않은 그대의 풍모를 보고 내 어찌 천하에 명성 높은 토정을 몰라 보리오?” 그 뒤 남명이 서울에 왔다가 하인에게 술과 안주를 들려 한강변 토정의 집 토정으로 찾아왔다. 토정이 의관을 갖추고 토굴 같은 토정 안으로 남명을 맞아들였다.
“존장께서 이처럼 누추한 데까지 어인 행차이십니까?” “지나던 길에 들른 것이외다. 술과 안주는 내가 장만해왔으니 상이나 봐오소!” 그리하여 두 풍류고사가 마주앉아 권하고 마시면서 고금의 일화부터 학문과 時事에 이르기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날 토정의 학식과 인품을 눈여겨보고 탄복한 남명이 이르기를 “그대야말로 도연명(陶淵明)에 못지 않은 고매한 선비”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하니, 그 옛날 풍류 군자들의 멋스러움이 이와 같았다.
토정은 남루를 걸치고 삿갓 쓰고 죽장 짚고 팔도강산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런 차림새로 주유하고 당대의 내로라하는 고관대작과 명사들을 만나는데 조금도 거리낌 없었다.
토정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혹인기사’라는 책에 나온다. ‘선생은 키가 보통사람보다 훨씬 컸고 골격도 건장했다. 또 얼굴이 검으면서도 둥글고 살집이 좋았다. 발 길이는 한 자가 거의 다 되었으며, 목소리 또한 맑고 우렁찼다. 말수가 적었으며 기개가 당당했고
위풍이 늠름했다.’
이 책은 또, 토정이 늘 저자와 산수 간을 돌아다니다가 잠이 오면 두 손으로 지팡이에 의지해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숙인 채 잠이 드는데, 코고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소나 말도 놀라 도망치기
일쑤였다고 전한다.
머리에 쓰면 갓, 뒤집으면 밥솥 그렇게 한 세상을 떠돌며 토정은 풍류사에 길이 남을 숱한 전설적 일화를 남겼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일화는 ‘쇠갓’을 만들어 쓰고 다닌 일일 것이다. 冠禮 이후 수십 년간 쓰고 다니던 갓이 망가져버렸는데 선비로서 의관이 없으면 바깥출입을 못하던 당시로서는 큰일이었다.
그런데 낡을 대로 낡아버린 밥솥까지 구멍이 뚫려 더는 못쓰게 되어버렸다. 궁리를 거듭하던 토정은 마침내 기발한 착상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것이 바로 쇠갓이었다.
쇠로 갓을 만들었으니 낡아서 버릴 염려도 없고 뒤집어놓으면 밥솥도 되니 이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닌가. 이런 일화는 토정의 기인다움도 돋보이게 하거니와 그가 얼마나 청빈하게 살았던가를 분명히 반증해준다고 하겠다. 장대한 체격의 사내가 보기에도 괴상한 쇠갓을 쓰고 다니니 그는 이내 서울의
명물로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토정의 부인 전주 이씨는 끼니 때마다 ‘움직이는 밥솥’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을까. 이처럼 토정은 청빈무구하게 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능하고 무기력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사농공상이라고 하여 상인이 가장 천대받던 시대에 그는 이미 상업과 경제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본보기삼아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떼돈을 번적도 있었다.
언젠가는 조각배를 타고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어서 수만 개의 바가지를 만들어 팔아 수천 석의 곡식을 사서 빈민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에는 쌀 한 됫박 들여놓지 않으니 부인이 바가지를
긁을 수밖에 없었다.
토정은 풍류거사였을 뿐만 아니라 앞날을 미리 내다볼 줄 안 도통한 예언가이기도 했다. 서산대사· 이율곡·이순신과 등과 더불어 토정도 임진왜란을 예측한 몇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또 사람의 안색과 음성만으로도 그의 길흉화복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토정은 또한 풍류객답게 음률에도 정통했고 특히 거문고를 잘 탔는데 그의 둘째아들 山輝 역시 知音의 奇才였다고 전한다.
율곡이 ‘경연일기’ 선조 11년(1578) 7월조에 이렇게 썼다. ‘아산현감 이지함이 죽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욕심이 없고 인색함을 몰랐다. 기질을 이상하게 타고나 추위·더위·주림·갈증을 잘 참았다. 어떤 때는 알몸으로 거센 바람을 맞았고, 또는 열흘을 음식 한 번
먹지 않아도 병들지 않았다. 천성이 효성과 우애가 깊었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남의 급한 사정을 잘
도왔다. 명령을 내리는 것은 모두 백성을 사랑하기를 위주로 하니 백성 모두가 그를 흠모했으나 갑자기 이질을 앓아 세상을 버렸다. 나이 62세였다.’
스웨던인 아숀그렙스트가 들은 바에는 그가 문둥병을 치유하고자 지네즙을 먹고 중독을 해독하고자
나무밤을 먹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율곡은 이질로 죽었다고 기록하였으니, 아마도 同時代人의
기록이 맞을 것으로 보인다.
1578년 음력 7월 17일 일세의 풍류기재 토정 이지함이 아산현감 자리에서 세상을 뜨자 수많은 고을 백성이 길을 메우고 마치 부모상을 당한 듯 애통해했다.
[사진]아산시 영인면은 토정이 현감으로 재직 시 아산현 관아 소재지로써 여민루는 토정이 현감을 지낼 때 아산현 관아 문이었다. 그 뒤는 영임초등학교이다.이 곳에는 舊 韓末의 風雲兒였던 김옥균의 묘도 있다.
2. 土亭 李之涵의 墓
(2) 土亭一家의 家族墓園 周交面 高亭里 國師峰 언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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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川海水浴場에서 서쪽으로 隱浦里 松鶴을 지나 포구로 향해 12km쯤 가다보면 保寧郡 周交面 高亭里가 나오고 동구 입구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포구 언덕바지인 고만산에 토정의 아버지 神道碑가 있고 그 오른쪽에 그 두배나되는 신도비가 서있는데 이 비가 李之涵의 神道碑다.
비석은 1965년에 세운 것으로 되어있는데 없어졌던 신도비를 이곳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이 곳에서 언덕을 넘으면 이어있는 산허리에 묘가 즐비하게 자리해 있는데 윗쪽 중앙에 土亭 李之涵의 묘가 있고 그 왼쪽에 부친 묘가 있으며 그 위에 비석조차 없는 요절한 그 아들들의 묘가 있다.
묘비가 남아있는「贈領議政」의 묘만도 넷이나 된다. 조카 李山甫의 묘도 여기에 있으며 맨 아래쪽에 議政府左參贊을 지낸 韓平君 李工의 묘가 있다.
이들 墓所는 주역에 밝은 土亭 이지함이 손수 잡았다는 墓들로서 명당터인데 西海바다가 내려다 보이고 海松으로 둘러쌓였으며 포구로 들어오는 물이 마치 湖水같고 포구앞에 서너개의 암초가 솟아나 있으며 멀리 큰섬이 있어서 그림처럼 아름다운 터다.
土亭 李之涵은 中宗 12년에 태어난 道人이다. 그의 자는 響仲이며 號는 土亭 또는 水山이고 시호는 文康이며 본관은 韓山이다. 高麗朝의 三隱 中 하나인 木隱 李穡의 후손으로 縣令 이치의 아들이며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兄 之蕃에게 글을 배웠고, 그 후 花譚 徐敬德에게 배웠던 사실은 전술한 바와 같다. 土亭集遺事를 보면 그를 가르켜 「키는 크고 건강하였으며 얼굴은 검으면서 둥글고 살집이 좋았으며 발은 커서 한자가 되었으며 눈은 빛나서 사람을 움직이게 하였으며 목소리는 웅장하고 맑되 말수는 적었고 기개가 당당했고 위품이 늠름하였다.」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가 諸家雜術에 능통했던 능력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主氣論者였던 李珥와 친하였는데, 李珥가 性理學을 배우라고 권유했을 때 "나는 욕심이 많아서 배울 수 없다"고 대답한 것도 그 나름대로의 奇智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문과 지리 및 인사에 能通한 道人으로서 청빈함을 자랑으로 삼았고 청빈락도의 길을 택해서 오히려 스스로가 지니고 다니는 양반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서민의 세계로 파고든 민본사상에 뿌리한 도인이었던 것이다.
전술한 바와같이 그는 의학. 복술. 천문. 지리. 음양 술서 같은 기술학에 능통해서 기행, 일담, 예언이 수없이 많으며,경서자전에도 통달한 그가 수학과 이학에도 통달하였기에 민중의 고달품을 어우를 수 없는 학문을 배격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主敬窮理를 학문의 연구방법으로 택해서 전국을 답사하지 않는곳이 없을정도로 방랑하며 民本과 風水를 익혔고 麻浦의 동막부근(현재 토정동) 토막에 살면서 스스로 土亭이라고 불렀었다. 그는 항해술과 물길을 익혀 네 귀퉁이에 큰 박을 단 작은 배를 타고 濟州道를 세 번이나 왕래하였지만 풍랑 한번 겪지 않았었다고 한다.
몸소 염전을 경영하면서 섬들을 왕래하였고 박을 심고 바가지를 만들어 몇 년내에 곡식 수십만섬을 쌓은 일이 있는데 이것을 백성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주민들의 만류를 뿌리치며 다른 곳으로 떠났었을 정도로 愛民思想이 깊었다. 그가 방랑으로 생애전반을 보내게된 동기를 趙重峰은 말하기를 "젊어서 친구인 安名世의 죽음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만년인 선조 6년(1573)에 宣祖가 탁행이 뛰어난 인물 8명에게 육품 벼슬을 내릴때 일원으로 발탁되어 抱川縣監이되고, 이 후 1578년 4월 牙山縣監이 되어서는 관내에 '乞人廳'을 두고 불우한 밑마닥 인생을 도왔었다. 아산현에서 善政을 베풀어 칭찬이 대단하였으나 그 해 7월 17일 이질병으로 아산에서 죽으니 그의 나이 62세때였다. 지금도 그가 善政을 베풀은 牙山郡 靈仁面 牙山里에는 그의 선정비가 남아있다.
그는 누구에게 돋보이기도, 또 부귀영화를 누리기도 싫어서 그 많은 재주로 오직 民本의 極致에 살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 도인이었는가는 牙山縣監으로 在職時에 올린 상소문을 봐도 단적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그는 주변머리가 없어서 토막에서 살은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욕심이 많아서 儒學을 배울 수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가 儒學者 李珥에게 말한대로 "욕심이 많아서 性理學을 배울수 없다"는 苦言은 그가 孔孟의 儒學보다는 자기가 느끼고 깨우치는 民本位의 愛民思想이 깨우친 사상이라 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 길을 가지 않았던것일 뿐이다.
그는 때를 잘 만났더라면 크게 빛났을 不世出의 濟世的 큰 인물이였다고 생각된다. 현재 충남 보령시 청라면 옥계리에 그의 위해를 모시고 춘추제향을 받게한 화암서원이 있다.
(3) 飛鯨入水形 大明堂
천문과 지리 및 인사에 通達했던 토정은 生前에 그의 부모 묘와 자신의 身後之地 및 그의 형 등, 그 一族의 墓를 잡았다고 한다.그가 잡은 자리는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바닷가 야산으로 國사峰 자락이다(최근 충남 문화재 자료 319호로 지정되었으며,보령화력발전소 가는 도로에서 보이는 곳이다). 이 곳에는 그의 부모와 토정 삼형제내외 및 그의 아들내외, 그리고 그의 조카 등 14基, 즉 4代가 한 자리에 밀집되어있다.
國師峰 자락에서 내려오는 來龍이 힘차면서 氣運있게 내려오고 좌청룡과 우백호가 확실하게 혈을 감싸며, 穴 앞의 서해바닷물이 湖水처럼 조용하면서 아름답게 보이고 海岸에서 약 700m 떨어진 案山은 세개의 봉우리가 균형을 이루는 이 곳은 한 눈에 보아도 明堂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곳이다.
이 땅에 관해서 한산모시로 유명한 韓山李氏 先塋山圖에는 "나는 고래가 물 속으로 들어 간다는 '飛鯨入水形' "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 명당은 토정이 기대했던것 만큼이나 확실하게 發福을 시켰주었다.
토정이 그의 부모를 이 곳에 모시고 그의 長兄 之蕃이 청풍군수로 제수되었고, 之蕃의 두 아들 중 맞이인 아계 山海(1539 - 1609)가 영의정으로, 또 山海의 사위인 이덕형이 좌.우.영의정이 되었으며, 之蕃의 둘째 아들인 山光(1559 - 1624)은 문장이 출중하고 지조가 있어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워서 공신이 되었다.
이어서 中兄인 之頭는 외아들 명국 山甫(1559 - 1624)를 두었는데,임진왜란 때 이조판서로 봉직하면서 큰 공을 세우고,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수습하다가 과로로 병사함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하지만, '風水無全美'라고 옥에도 티가 있으니,백호가 내백호뿐이라서 虛하여 藏風이 다소 虛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풍수에서는 靑龍은 長子를,白虎는 支孫을,朝山은 外孫을 의미하는데,이 땅은 內外靑龍은 이중으로 穴을 감싸안았는데 반해서 白虎가닥만은 內白虎 뿐이고 또 끝쪽이 허하여 案山과 右白虎 사이 南南西쪽 바닷물이 보이는 곳이 虛하니 三兄弟 中 막내인 토정의 자손이 그 害를 입게되어있다.그래서 그의 큰 아들 山斗와 셋째 아들은 전염병으로 죽고, 차남 山輝는 범에 물려 죽었다. 또 案山만 있고 朝山이 없으므로 딸이 귀하다.하지만, 청룡이 실함으로 전술한 바와같이 直系後孫은 百子千孫으로 번창했으니, 한음 이덕형의 말대로 땅의 이치는 이와같이 毫里之差도 없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토정도 이같은 결점을 알고 그 흠결을 보완코자 정면의 案山과 솔섬을 연결시키는 공사를 벌였지만,끝내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하지만, 현재는 솔섬으로 차량이 다닐정도의 방파제가 들어서 있어서 이를 다소 보완해준다. 그래서 이토정이 다시금 각광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이 점에서도 그의 利他行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는데, 이같은 사실을 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가장 불리한 쪽으로 선영을 잡았다는 점이 그 점인 것이다.
그의 묘 바로 뒤에 아들내외 묘가 있어서 풍수에서 금기시하는 소위 倒葬과 逆葬에 해당된다.이는 유교적 교리측면에서 보면 그렇지만,토정과 같은 道人의 측면에서 본다면 크게 문제시될 것이 없으리라고 보여진다. 그는 이미 이같은 세속의 경계를 뛰어 넘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倒葬의 경우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경우도 볼 수 있었는데,풍수사들이 둘러되기를 "그는 왕이 였기 때문에 괜찮다"라고 我田引水式 해석을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도장을 금기시한 것은 풍수적 논리가 아니라 長幼有序를 따지는 옛 유교의 病弊的 논리가 그렇게 만든 것으로 순수 풍수적논리로는 아무 문제가 될것이 없기 때문에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陽宅의 경우에는 부모집 뒤에 자식이 살거나,혹은 형집 뒤에 동생이 살면 피해를 보게되는 경우도 있다고들 하는데, 이 경우는 외관상 보기에도 좋지 않다.
이 땅은 龍脈의 起伏이 힘차게 내려오다가 國師峰에서 일단 숨을 죽인 후 우뚝솟은 다음, 왼쪽으로 약간들며 내려오는 도중에 正南向인 子坐午向으로 바다를 바라보면서 穴을 맺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來脈이 秀麗하고 아름다움으로 그 후손은 이 아름다운 氣를 받아서 발복했던 것이다.
이 땅과 관련하여 일부 풍수가는 혈장에 물고기 모양이 없으니 飛鯨入水形이 될 수 없고 오히려 松島( 솔섬,혹은 松鶴島) 제방에서 보면 호랑이가 바다에서 산으로 건너가는 뒷모습이 보이므로 猛虎入山形局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이들은 주장하기를 호랑이 뒷발 사이에 꼬리가 보이는데, 이 꼬리에 묘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 내룡은 호랑이 척추에 해당하며,국사봉은 호랑이 엉덩이에 해당하는데,이같이 꼬리에 혈이 있을 경우에는 마치 바둑판이나 퉁소,거문고,금계포란형처럼 여러개의 혈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 하지만, 이는 견강부회로 보아야 한다.
만약 이들의 말대로 호랑이 꼬리에 혈이 있다면 이는 크게 힘을 쓸 수 없는 부위이므로 명당이 될 수 없을 것이고, 그들 말대로 설령 혈이 있다손 치더라도 혈은 하나일 뿐이지 여러개가 있을 수 없다.이들 말대로 꼬리가 혈이 될려면 호랑이가 꼬리로 낚시를 했다는 이야기인데, 이도 말이 되지 않을뿐만 아니라 호랑이는 산에 있어야지 등을 돌리고 꼬리를 내렸다는 것은 항복했다는 뜻이니,항복한 호랑이가 무슨 기운을 쓸 수 있겠는가?
통상적으로 퉁소나 피리 및 바둑판,금계포란형에는 여러개의 혈이 있을 수 있는데,퉁소나 피리는 4 ~ 9개 정도의 혈을 맺으며,금계포란은 혈이 아주 까깝게 붙여있다.
(4) 명당에 쓰고 인물이 나나, 아니면 인물이 나니 명당이 되었는가?
李土亭의 幽宅을 보고 論하면서 현재 우리나나의 풍수사들이 얼마나 허황된지를 새삼 실감한다. 기본적으로 풍수를 論할 때는 순수하게 그 땅만 보고 論해야지, 그 속의 주인공을 보고 論해서는 안된다. 이토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수 많은 풍수사들이 견강부회로 아전인수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 자리의 주인공이 누구든 간에 땅이 말하게 해야 하는 것이지 사람이 말하게 해서는 않된다.
즉 '명당에 썼기 때문에 그 기운을 받아서 발복했는냐'를 말해야 하는 것이지,'인물나고 명당에 썼다'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禁囊經에 " 명당은 奪神功 改天命 한다"라고 하면서 '神의 권능을 능히 빼았고 하늘의 명을 고쳐 바꿀 수 있다'고 쓰여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 明堂은 地獄門도 바꾼다"라고들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앞서서 積德을 해야만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그래서 옛 부터 " 積德之家에 必有餘慶이라"고 했던 것이다.
명당을 차지할려고 하기 이전에 마음부터 닦을 일이다.
그 옛 날 동굴에 숨겨져 있었다는 麻衣相書에 이르기를 " 萬相不如心相:라고 했으며,
孟軻도 " 地理不如人和 "라고 했다.
마태복음 산상수훈에도 이를 나타내고 있으니
明堂을 꼭 찾고 싶은 사람들은 모름지기 남에게 덕을 베푼 후에 명당을 찾을 일이다.
ㅡ 知 雲 先 生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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