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飛鯨入水形의 천하명당에 자리 잡은 토정 이지함과 그의 가족 묘소

문근영 2010. 11. 10. 08:42

1. 土亭 李之涵

 

(1) 토정 이지함의 생애    

김시습·정렴 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기인의 한사람으로 잘 알려진 토정 이지함은 매년 정초면 운수를 점치는 '토정비결'의 저자이기도 하다.

화담 서경덕(1489 - 1546)의 제자인 그는 세속적 욕망인 富와 명예 및 性理學에 얽매이지 않고 몸과 마음의 평화를 추구한 자유인이었으며,천문과 지리 및 인사에 능통한 당대의 대도인으로서 수많은 걸작을 남긴, 한 시대를 자유롭게 풍미하다 간 참 道人이였다.

 

그는 평생에 3권의 대저술을 남겼는데,

국가의 운명을 점칠 수 있는 '土亭家藏訣' 과 개인의 길흉을 알 수 있는 '靈龜妙算' 및 '月影圖'가 그것이다. 이 책들은 너무나 神妙한 나머지 당사자도 모르거나 오래된 사실까지도 정확하게 알아낸다.그래서 善人에게 들어가면 좋은일에 사용되어질 수 있겠지만, 만약 惡人에게 傳해지면 그 부작용이 엄청나게 크겠기에 非人勿傳이라고 해서 전수자에서 전수자로만 전해져 오다가 어느날 失傳되어 책만 전해지고 그 풀이방법은 전해지지 않게 되었기에

오느 날 책은 구해볼 수 있어도 그 풀이를 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 되었다.

 

나도 토정가장결과 월영도는 구해두었지만, 아직까지 一瞥한 외에는 정독해 보지 않았고,현재는 굳이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기에 그냥 보관만 하고 있다.

 

이와관련하여 재미있는 사실은 천문과 지리 및 인사를 두루 達通한 그가 전술한 바와같이 天文과 人事에 관한 책은 남겼으면서 地理에 관한 책은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인데, 이는 천문과 인사는 책으로 공부가 가능하지만 지리는 반듯이 明師를 만나서 직접 踏査해서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남긴 名著 ' 土亭家藏訣'은 본디 장자방이 神仙 黃石公으로 부터 받아, 이를 토대로 秦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게 했었던 黃石公神書인 '玄武發書'(이 책은 후일 제갈량에게 전해져서 그가 파촉을 근거로 '천하 三分之計'를 공고히 하는데 쓰였다)를 우리나라의 지리적 여건에 맞추어 再編撰했던 것으로 현재 전하는 '六韜三略'의 眞本이라고 한다.즉 '육도삼략'의 眞本이 '玄武發書'라는 이야기다. 이 책은 그 내용이 천하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어 後日 문제될 것을 두려워 한 제갈량이 가짜로 내용을 바꾸어서 編撰해 전해지도록 한 것이 現傳하는 '六韜三略"으로서 원래의 '玄武發書'의 僞本인 것이다.

 

그가 남긴 '월영도'는 그 정확도가 어떻게나 深澳한지, 사주를 알면 앞으로 맞이할 부인성과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 성명을 알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과히 상상불허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하기를,

하늘의 이치, 즉 한 나라의 운명을 알아 맞추는데는 太乙神數가 최고요

땅의 이치를 궁구하는데는 九宮이 최고며,사람의 운명 즉 人事를 아는데는 六壬이 최고로서, 이 태을신수와 구궁 및 육임을 달통하면 天文과 地理 및 人事를 달통하게되여 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훤히 꿰뚫게 된다고 하는데, 토정이 전한 이 두가지 책만 꿰뚫어도 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達通하게 된다.

 

양반이었지만 손수 고기를 잡고, 소금을 만들어 팔며, 상업활동에 종사한 그는 實學의 선구자였다.

또한 아산 현감 재직시에 걸인청을 설립해 걸인들을 구제했고, 그들에게 새끼 꼬는 방법, 짚신 삼는 방법등을 가르쳐 재활의지를 북돋았으니, 國家경제 酷寒期를 맞아 홈리스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 4백년의 時空을 넘어 이지함의 진면목이 다시금 돋보이면서  재평가한다.

 

내가 어릴 때 서당에서 읽은 그의 행장에 의하면, 그는 갓대신 무쇠솥을 머리에 쓰고 다니면서 비를 피했고, 다니다가 배가 고프면 그 무쇠솥을 꺼꾸로 하여 밥을 해 먹었으며,잠이 오면 한달 내내 잠만잤고,또 한달 내내 자지 않고 다니면서, 하루에 수백리를 갔다왔다고 한다.그 때 어린마음이였지만, '참으로 奇人이로구나. 어떻게 한 달씩이나 먹지 않고 잘 수 있었을까?'하는 궁금증과 의아함을 가졌었는데,지금보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최근에 그의 이같은 기인적 행장을 서양인의 눈으로 적은 기행문인 '코레아 코레아'라는 책이 나왔는데,스웨던의 아숀그렙스트라는 기자가 1905년 우리나라를 여행하면서 보고 듣은 것을 기행문으로 쓴 책이다.

 

이 책에 이토정의 이야기가 나오는데,그 내용은 아래와 갔다.

"이지함이 말년에 아산현감으로 재잭할시 그는 민초들의 병을 구제하고 민초들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불철주야로 노력했다고 한다.그가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마침 나병이 창궐했다고 한다.그런데, 이 병을 치료할려면 지네즙을 먹으면 낫지만,그 반대로 지네독에 의해서 죽으므로 지네즙을 먹은 후 곧 바로 밤 한 톨을 먹어서 지네독을 해독하면 된다고 옛 의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이 병을 잡고자 직접 나병에 걸린 후 옛 의서의 내용대로 지네즙을 먹은 후 곧 바로 밤을 먹을려고 아전에게 밤을 구해오라고 시켰다고 한다.평소 부정부패로 토정에게 찍혀서 전전긍긍하던 아전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 이 참에 토정을 제거하자'라고 마음먹고는 밤 대신에 나무로 밤 모양을 깎아서 나무밤을 토정에게 주었는데,토정이 이를 먹고 죽었다고 한다.하지만, 토정이 이를 먼저 알고는 죽기전에 그 아전에 관한 비리사실을 낱낱이 기록하여 두었기에 그 아전은 처벌되었고, 이 일로 인해서 그 이 후부터 아산 아전은 다른 지방의 아전들 보다 낮은 대우를 감수해야만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관련하여 백년전 이태리 외교관이였던 까를로 로제티가 쓴 '꼬레아 꼬레아니(Corea e Coreani)'라는 책에도 이 비슷한 내용이 있다.

 

여기서 보듯이 그는 백성을 사랑하는 愛民思想과 민본주의로 利他行을 행했던 분으로 이같은 실증적 이야기는 아직도 대천을 중심으로 전해온다.

 

그는 왕에게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백성이 없으면 임금도 없다.그러므로 백성을 국가의 제일로 삼아야 한다"면서 구휼과 구제사업을 억설하기도 했다고

하는 말을 전해들었다고 대천에 사는 이강원씨는 증언한다.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포구언덕 국수봉 기슭에 소재한 토정 일가의 선영. 맨앞이 토정의 묘소이다.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포구언덕 국수봉 기슭에는 탁 트인 서해 바닷가를 바라보는 10여기 이상의 묘가 있다. 그중 맨 윗줄 오른쪽이 토정 이지함(1517~1578)의 묘소다. 이 곳 묘 앞 상석에는 탁주 1병과 북어포 한마리 그리고 흰색 한지 뭉치가 놓여 있었다.

이지함 신을 숭배하는 무속인들이 치성을 드리고 갔다는 증거물인 셈이다.

이지함은 매월당 김시습·북창 정렴 등과 더불어 조선 3대 기인의 한 사람에 속한다. 무속인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보면 이지함의 道力이 높이 평가된다는 얘기다.

기록에 전하는 이지함의 외모 묘사를 보자.
“그는 보통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다. 건장한 체격에 얼굴은 둥글고, 검은 편이다. 안광이 빛나고, 목소리는 웅장하면서 상쾌하다. 특히 발이 한자를 넘는다.” “그는 천성이 욕심이 적어 명예와 재물, 여색에 담연하였으나, 때로 농담도 하고 장중하지 않아 사람들이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었다.”

발이 한자를 넘을 정도의 거인에다 거칠 것 없는 행실을 보인다는 점으로 봐 도인의 풍모가 떠오른다. 게다가 천문·지리·복서·의학 등에 달통했다는 평이고 보면 그러한 심증을 굳혀준다.

도학의 세계에서는 배가 불뚝 나오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달마대사와 같은 사람이 득도의 가능성이 크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이지함은 기인이라는 것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지함의 묘소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보자. ‘아산현감으로 등용된 뒤에는 걸인청을 만들어 걸인을 구제하고 노약자와 굶주린 이들을 구호했다. 그후 대부분의 생애를 마포의 토담집에서 청빈하게 지냈는데….’

이지함은 아산현감 재직시 병으로 죽었다. 그런데도 현감직 이후에도 마포에서 산 것으로 잘못 기록돼 있다. 이지함의 생애와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책으로는 후손들에게 유사시 보도록 했다는 “토정가장

결”과 주역을 발전시킨 易書인 “월영도”,"靈龜妙算", 후손인 李楨翊이 정리한 “토정유고” 2권1책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토정유고”에 수록된 이지함 관련 생애는 1573년 卓行(좋은 행실)으로 천거돼 포천현감을 했던 이후의 행적만 나와 있다. 이밖에 “연려실기술” “석담일기” 등에 많은 일화가 소개돼 있는데, 시간의 선후관계를 밝히기가 힘들다.

 

물과 인연이 아주 많은 土亭

이지함은 1517년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에서 아버지 李穉와 어머니 광주 김씨 사이에 출생했다. 그런데 그의 고향 장산리는 1959년 청천저수지를 만들면서 수몰됐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그가 '토정' 외에 '水山'이란 호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태어난 집터가 수몰된 것과 평소 마포 한강변에 土堀을 짓고 살면서(그래서 그의 호를 土亭이라고 했다) 물길과 항해술을 배우고 제주도와 중국을 수차례 왕래하였고 또 어떤 때는 중국을 하룻밤 사이에 다녀오기도 했던 점 및 죽어서 청천저수지 옆에 있는 화암서원(청라면 장산리)에 제향된 것과 그의 生家가 있는 마당까지 물이 넘실거리는 점, 또 죽은 身後之地가 바닷가 바로 옆에 있는 주교면 고정리 포구언덕에 있어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점 등과 그의 이름 끝자인 涵이 물과 관련된 점 등에서 그의 '水山'이란 호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號를 土亭으로 쓴다.오행상 土剋水로 물과 토는 상호 剋性이 있는데 물과 깊은 인연이 있는 그가 토굴에 살면서 스스로를 '토정'으로 불렸으며, 또 '水山'으로 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무슨 이유가 있음직도 해 보인다.'水山'이란 號 또한 土剋水이니 이 또한 상호 剋制하는 五行으로 天理에 밝은 그가 이를 모를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16세기는 士禍와 함께 시작한다. 사화는 조선을 건국했던 훈구척신들과 이들의 정치에 염증을 느끼며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士林의 싸움을 말한다. 훈구파에 패배한 사림들은 정치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대개 은거의 삶을 택하며 후일을 모색한다. 이들은 향촌을 중심으로 학문을 닦고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교육에 전념했다.


‘1년 사이 문장이 물 솟구치듯’ 발전

하지만 이들이 현실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지만은 않았다. 자유롭고 비판자적인 입장에서 다양한 학문을 수용했으며, 때로는 국정에 참여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을 실현하려 노력했다.

그 당시 민중은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 유리걸식하는 자가 허다했다. 이들 중에는 살기 위해 도적이 되기도 했는데 明宗 때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3년여를 활동했던 의적 임꺽정은 이들의 대변자였던 셈이다.

커다란 사회변혁기를 살았던 이지함은 개인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16세 때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이지함은 형 之蕃과 함께 3년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이때부터 큰형 지번은 지함의 아버지요, 글을 가르쳐준 스승의 역할을 했다. 시묘살이를 마치고 지번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온 이지함은 모산수(정종의 후손, 정4품) 呈郞의 딸과 결혼했다. 23세 때(중종 34·1539) 장남인 山斗와 큰형 지번의 아들인 山海, 둘째형 지무의 아들 山甫가 태어났다.

이지함은 결혼 후 광릉농장에서 1년동안 독학하면서 사서삼경에 達通하게 된다. 이 시기 이지함은 하인에게 밤에 쓸 등유를 가져오라고 했지만 장인이 그의 건강을 염려해 등유를 보내지 않자 이지함 본인이 직접 도끼를 들고 산에 들어가 관솔을 따서 불을 밝히며 공부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처럼 열심히 공부한 결과 그의 학문은 대단하게 진전했는데, 영의정을 지낸 조카 山海는 묘비명에서 “1년 사이에 문장이 물이 솟구치듯 하고 산이 자태를 뽐내는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

학문에 흥미를 느낀 이지함은 송도에 사는 화담 서경덕의 제자가 된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은 처사로 살았던 서화담에게서 主氣論 중심의 理氣一元論과 諸家雜術 등을 배웠다.

스승의 영향이었을까. 이지함은 벼슬에는 별로 뜻이 없었다. 마지못해 과거에 나갔지만 답안을 쓰지 않고 나오기도 했고, 또 답안을 제출하지 않기도 했다. 사람들이 왜 과거를 보지 않느냐고 물으면 “사람마다 제각기 좋아하는 바가 있소, 나는 내 좋은 대로 살 것이오” 라고 대답했다.

또 한가지 형 之蕃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것도 역시 과거를 등한시한 원인으로 해석된다.
29세 때(명종 1년) 스승 서화담이 타계했다. 그리고 다음해 지번이 39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런데 이지함의 나이 33세 때 죽마고우였던 安名世가 사형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유능한 사관이었던 안명세는 사관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을사사화(1545) 때 윤원형·이기 같은 소윤 일파가 윤임 등 대윤을 모함해 죽였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윤원형 일파가 절대 볼 수 없는 사초를 보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를 쓴 안명세를 처형한 것이다.


서울 마포구 토정동 소재 한강삼성아파트 입구 쪽이 토정이 토담집을 짓고 살던 자리다. 그곳에 표시석이 세워져 있다.


죽마고우 안명세 죽음이 인생 크게 바꿔놓아

실의에 빠진 그가 장인과 처남의 운수를 짚어보니 불길한 괘가 나왔다.

그는 형에게 “내가 처가를 관찰했더니 길한 기운이 없습니다.

이에 피하지 않으면 화가 장차 나에게까지 미칠 것이오”라고 말하며 처자를 데리고 서쪽으로 갔는데 곧 커다란 시련이 닥쳤다.

이른바 이홍남의 고변사건(청홍도 사건)이다. 이는 형제인 이홍남과 이홍윤의 감정대립이 불러온 역모 고변사건이었다. 이홍남은 동생 이홍윤이 왕에게 불충했다고 고변하게 되는데, 이 역모사건의 괴수로 이지함의 장인인 이정랑이 걸려들게 됐다. 이로 인해 이지함의 처가는 풍비박산났고, 이지함도 연좌법에 의해 양반 신분에서 천민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됐다.

안명세사건과 청홍도사건은 이지함의 삶을 크게 바꿔놓았다.

이때부터 그는 처가 식구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고기를 잡고 소금을 만들어 팔았다. 또 서해의 고향 앞바다 섬에 들어가 박을 심었다가 가을에 수확해 바가지로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수년만에 수천섬의 양곡을 모을 수 있었고, 그 양곡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다. 이러한 경험이 실학사상의 기초가 된 무역과 상업론의 바탕이 됐을 것이다. 이 무렵 그는 마포에 흙집을 짓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들에게는 도움을 베풀었지만 그 가족은 곤궁하게 살았다. 그는 베옷에 짚신을 신고, 삿갓을 쓰고 다녔다. 외출할 때는 철관을 쓰고 나갔다가 식사 때가 되면 그것을 솥으로 이용하고, 다시 씻어 관처럼 썼다고 한다.

그는 또한 제주도에 세번이나 다녀왔다. 그때마다 쪽배 네 귀퉁이에 큰 바가지를 달아 풍파를 견뎌냈다고 전한다. 토정에서도 오래 머무르지 않고 전국 산천을 떠돌아다녔다.

 

어떤 때는 열흘동안 화식하지 않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더위에도 물을 마시지 않아 주위 사람들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사대부들과 놀면서 옆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동하기도 했다. 정신과 행동 모든 면에서 자유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자 문제만은 매우 조심했던 모양이다. 서경덕이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쳤듯 제자인 이지함도 여자에게는 조신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제주에 갔을 때의 일이다. 제주의 관원이 그의 이름을 익히 듣고 기생으로 하여금 수청들게 했다.

그리고 기생에게는 이지함의 사랑을 얻는다면 창고의 양식을 모두 상으로 주겠다고 제의했다. 온갖 아양을 떨었지만 기생은 끝내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일찍이 아들·조카들에게 “여색에 엄하지 못하면 그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고 훈계했던 터다. 51세 되던 해 선조가 등극하면서 정국이 쇄신되고 사림파가 서서히 중앙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53세이던 1570년 이홍남고변사건의 죄인들이 사면됐다. 이지함도 법적으로 자유인이 됐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자유인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힘든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수없이 보았다. 이이·성혼·조식 등의 학자들을 만나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할 방도도 토론했다.

그는 소유나 명예가 부질없음을 알았고, 그럼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거리낌없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으로 옮겼

.


이지함의 명성을 들은 중봉 조헌이 제자가 되겠다고 그를 찾아왔다. 이지함은 55세, 조헌은 28세. 27년의 나이차를 넘어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다음해인 1572년 조헌이 홍문관 정자의 자리에서 파직되자 두 사람은 부여의 江寺에서 놀다가 지리산 홍운동의 徐起를 찾아가 친교를 나눌 정도로 가까웠다.


‘어느 때고 인재가 없었던 적은 없다’

1573년 이지함은 탁행으로 추천돼 포천현감(종6품)이 됐다. 마음 속에 품었던 가난구제책을 실현할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그는 기꺼이 현감직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는 백성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조사해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바로 사직하고 나왔다.

자리에 연연할 그가 아니었다.

유리걸식하는 민중의 구제를 최대 목표로 생각하던 이지함은 3대창고론을 주장했다. 3대창고론은 이지함의 사상이 집약된 ‘국부론’이라 할 수 있다. 첫째가 도덕의 창고인 인심을 계발해 화평한 세상을 만들자는 주장. 사대부들이 마음의 욕심을 버리고 修己治人하며 도덕을 지키면 백성은 경제활동에 힘을 쏟을 수 있다. 따라서 재물은 풍족해지고 그 재물이 균분돼 민생은 윤택해지고 이상적인 대동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인재창고론이다. 어느 때에도 인재가 없었던 적이 없는데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도가 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이지함은 인재를 보는 눈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이미 약을 쓸 수 없는 사람처럼 중병에 걸렸다. 하지만 기묘한 계책이 하나 있기는 하다. 李珥가 조정에 머무른다면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이는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려 했다. 그러자 “공자나 맹자 같은 성현이 병을 핑계로 제왕들의 부름을 받지 않는 것을 후세의 선비들이 본받는 것은 나태한 중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과 같다”며 호되게 질책했다.

또한 제자인 조헌에게 지극한 애정을 보였다. 조헌이 통진현감이 되자 찾아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책에 대해 논했다. 그는 또 조헌에 대해 “초야의 인재로서 쓸 만한 인물은 조헌밖에 없다”면서 “그의 우국충절은 나의 스승”이라고 격찬했다. 강직한 조헌은 임진왜란 때 큰 활약을 보인다.

셋째는 재용창고론이다. 육지와 바다는 1백가지로 소용되는 물산을 저장한 창고다. 이 창고에서 나는 은·옥·물고기·소금 등을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 누구나 생산하도록 하자는 주장이다.

당시는 모든 산물을 다만 그 고을에서만 취하여 쓰고 다른 고을에 있는 것은 항상 금지해 취용하지 못하게 하니 잘못된 일이라는 지적이었다.

또 인간의 덕이 근본이고, 재물은 지엽적인 것이지만 근본과 지엽이 상보작용을 이뤄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62세인 1578년 다시금 조정의 부름을 받은 이지함은 아산 현감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걸인들이 많자 그는 걸인청을 만들어 그들을 수용했다. 단지 수용뿐 아니라 그들에게 자활교육을 시켰다.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게 하여 각자 능력에 따라 기술을 익히게 했다.

그리고 임금에게 진상을 올리는 숭어양어장을 폐쇄해 농토로 만들었다. 봉건시대 때 이러한 결정은 자리를 내놓을 정도의 과감한 일이었다.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속담이 있지만 이지함은 가난한 백성에게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줬다. 그리고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며 자유인인 이지함은 그해 눈을 감았다.


연 표

1517 중종 12년 1세 아버지 穉와 광주김씨 사이 출생
1530 중종 25년 14세 아버지 별세
1532 중종 27년 16세 어머니 별세
1539 중종 34년 23세 장남 山斗 태어남. 조카 山海, 山甫도 태어남
1545 명종 1년 29세 스승인 서화담 죽음
1546 명종 2년 30세 큰 형 지번 진사가 됨
1549 명종 5년 33세 친구 안명세 사형당함. 이홍남의 고변사건 연루돼 장인 사형당함
1559 명종 15년 43세 장남 山斗 죽음. 1559-1562 임꺽정의 난
1569 선조 2년 53세 형 지번 청풍군수 제수
1570 선조 3년 54세 이홍남 고변사건의 죄인들 사면됨
1571 선조 4년 55세 28세의 중봉, 토정 찾아감
1572 선조 5년 56세 조헌이 홍문관 정자에서 파직되자

              그와 함께 부여의 江寺에서 놀다가 지리산 홍운동의 徐起 찾아감
1573 선조 6년 57세 포천현감에 임명됨. 1574 선조 7년 58세 포천현감직

               사직..
1575 선조 8년 59세 4월 큰형 지번 사망. 겨울에 조헌이 한강 입구 통진현감

               으로 부임하자 찾아감
1578 선조 11년 62세 3월 율곡의 대사간 사임 만류. 율곡이 듣지 않자 4월에

               다시 찾아가 석담으로 돌아가는 것 힐책. 4월 아산현감에 임명됨.

               7월17일 별세

 

(2) 土亭의 奇行 :  '周遊天下'하며 명사들과 교유, 쇠갓 쓰고도 당당했던 '奇人異才'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토정은 어디에 뛰어난 인물이 있다면 만사 제쳐놓고 찾아가
만났는데, 花潭 徐敬德, 南冥 曺植, 牛溪 成渾, 栗谷 李珥 등과의 交遊가 그렇게 이루어졌다.

박현석의 ‘사우록’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토정이 젊었을 때 화담의 학식이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배우고자 송도(개성)로 찾아갔다. 낮에는 화담에게 글을 배우고
밤에는 객사에서 잤다. 객사의 바깥주인은 행상이었는데 그의
아내가 젊고 예뻤다.

어느 날 안주인이 서방더러 장사 나가기를 권했다.

지아비가 행상을 떠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누라가 전에 없이 아양을 떨며 장삿길을 재촉한 것이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멀리 떠난 척하고 마을을 빠져나온 다음 그날 밤 몰래 집으로 돌아가
바깥에 숨어 동정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여우같은 여편네가 짐작했던 대로 토정의 침소에 들어가 갖은 교태를 부리며 열심히
꼬리를 치고 있었다.

서방이 일이 어찌 되는가 지켜보자 토정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의관을 바로 갖추고는 엄숙하게 남녀가
유별한 인륜도덕을 깨우쳐주는 것이었다. 온갖 교태로 아양을 떨던 마누라가 마침내 부끄러움에 못
이겨 잘못을 빌었다. 이런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던 서방은 단숨에 화담에게 달려가 말했다.

“소인의 집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사온데 참으로 괴이합니다. 혼자 보기 아까워 감히 아룁니다.”

화담이 그 말을 듣고 객사로 찾아가보니 과연 사내의 말이 틀림없었다. 탄복한 화담이 방안으로 들어가  토정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학업과 수양은 이미 내가 가르칠 경지를 넘어섰구려! 원컨대 돌아가는 것이 좋으리라.”

화담은 토정보다 28세 연상인데, 그때 혹시나 자신이 그 옛날 명기 黃眞伊로부터 유혹을 당했던
사건을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남명과의 만남도 비상했다. 토정이 처음으로 남명을 찾아가니 16세 연상인 남명이 뜰 아래까지
내려와 반겨 맞으며 대접이 극진했다. 당황한 토정이 말했다.

“존장께서 어찌 일개 야인에 불과한 후배를 이토록 후대하십니까?”

남명이 웃으며 대답했다.

“범상치 않은 그대의 풍모를 보고 내 어찌 천하에 명성 높은 토정을 몰라 보리오?”

그 뒤 남명이 서울에 왔다가 하인에게 술과 안주를 들려 한강변 토정의 집 토정으로 찾아왔다.
토정이 의관을 갖추고 토굴 같은 토정 안으로 남명을 맞아들였다.

“존장께서 이처럼 누추한 데까지 어인 행차이십니까?”
“지나던 길에 들른 것이외다. 술과 안주는 내가 장만해왔으니 상이나 봐오소!”

그리하여 두 풍류고사가 마주앉아 권하고 마시면서 고금의 일화부터 학문과 時事에 이르기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날 토정의 학식과 인품을 눈여겨보고 탄복한 남명이 이르기를 “그대야말로 도연명(陶淵明)에 못지
않은 고매한 선비”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하니, 그 옛날 풍류 군자들의 멋스러움이 이와 같았다.

토정은 남루를 걸치고 삿갓 쓰고 죽장 짚고 팔도강산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런 차림새로 주유하고
당대의 내로라하는 고관대작과 명사들을 만나는데 조금도 거리낌 없었다.

토정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혹인기사’라는 책에 나온다.

‘선생은 키가 보통사람보다 훨씬 컸고 골격도 건장했다. 또 얼굴이 검으면서도 둥글고 살집이 좋았다.
발 길이는 한 자가 거의 다 되었으며, 목소리 또한 맑고 우렁찼다. 말수가 적었으며 기개가 당당했고
위풍이 늠름했다.’

이 책은 또, 토정이 늘 저자와 산수 간을 돌아다니다가 잠이 오면 두 손으로 지팡이에 의지해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숙인 채 잠이 드는데, 코고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소나 말도 놀라 도망치기
일쑤였다고 전한다.

머리에 쓰면 갓, 뒤집으면 밥솥

그렇게 한 세상을 떠돌며 토정은 풍류사에 길이 남을 숱한 전설적 일화를 남겼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일화는 ‘쇠갓’을 만들어 쓰고 다닌 일일 것이다. 冠禮 이후 수십 년간 쓰고
다니던 갓이 망가져버렸는데 선비로서 의관이 없으면 바깥출입을 못하던 당시로서는 큰일이었다.

그런데 낡을 대로 낡아버린 밥솥까지 구멍이 뚫려 더는 못쓰게 되어버렸다. 궁리를 거듭하던 토정은
마침내 기발한 착상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것이 바로 쇠갓이었다.

쇠로 갓을 만들었으니 낡아서 버릴 염려도 없고 뒤집어놓으면 밥솥도 되니 이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닌가.

이런 일화는 토정의 기인다움도 돋보이게 하거니와 그가 얼마나 청빈하게 살았던가를 분명히
반증해준다고 하겠다. 장대한 체격의 사내가 보기에도 괴상한 쇠갓을 쓰고 다니니 그는 이내 서울의
명물로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토정의 부인 전주 이씨는 끼니 때마다 ‘움직이는 밥솥’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을까.

이처럼 토정은 청빈무구하게 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능하고 무기력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사농공상이라고 하여 상인이 가장 천대받던 시대에 그는 이미 상업과 경제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본보기삼아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떼돈을 번적도 있었다.

언젠가는 조각배를 타고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어서 수만 개의 바가지를 만들어 팔아 수천 석의
곡식을 사서 빈민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에는 쌀 한 됫박 들여놓지 않으니 부인이 바가지를
긁을 수밖에 없었다.

토정은 풍류거사였을 뿐만 아니라 앞날을 미리 내다볼 줄 안 도통한 예언가이기도 했다. 서산대사·
이율곡·이순신과 등과 더불어 토정도 임진왜란을 예측한 몇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또 사람의 안색과 음성만으로도 그의 길흉화복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토정은 또한 풍류객답게
음률에도 정통했고 특히 거문고를 잘 탔는데 그의 둘째아들 山輝 역시 知音의 奇才였다고 전한다.

율곡이 ‘경연일기’ 선조 11년(1578) 7월조에 이렇게 썼다.

‘아산현감 이지함이 죽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욕심이 없고 인색함을 몰랐다. 기질을 이상하게 타고나
추위·더위·주림·갈증을 잘 참았다. 어떤 때는 알몸으로 거센 바람을 맞았고, 또는 열흘을 음식 한 번
먹지 않아도 병들지 않았다. 천성이 효성과 우애가 깊었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남의 급한 사정을 잘
도왔다. 명령을 내리는 것은 모두 백성을 사랑하기를 위주로 하니 백성 모두가 그를 흠모했으나 갑자기 이질을 앓아 세상을 버렸다. 나이 62세였다.’
 
스웨던인 아숀그렙스트가 들은 바에는 그가 문둥병을 치유하고자 지네즙을 먹고 중독을 해독하고자
나무밤을 먹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율곡은 이질로 죽었다고 기록하였으니, 아마도 同時代人의
기록이 맞을 것으로 보인다.

1578년 음력 7월 17일 일세의 풍류기재 토정 이지함이 아산현감 자리에서 세상을 뜨자 수많은 고을
백성이 길을 메우고 마치 부모상을 당한 듯 애통해했다.





(3)아산에 동상과 선정비, 보령에 묘


충남 아산시 영인면은 토정이 아산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아산현 관아 소재지였다.

영인면사무소 앞뜰에는 1997년 12월 23일에 세운 토정 이지함의 동상이 있고, 그 뒤쪽에는 토정의 선정을 기리는 영모비가 있다. 또 영인초등학교 입구에는 토정 당시 아산현 관아 정문이었던 여민루가, 여민루에서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토정이 이전한 아산향교가 있다.

하지만 토정이 구세제민의 경륜을 펼치던 걸인청 건물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남아 있었으나 시골까지 불어닥친 개발 바람에 밀려 사라져버려 이제는 영영 찾아볼 길이 없다. 토정의 묘소는 서해의 낙조가 내려다보이는 충남 보령시 주포면 고정리 국수봉 기슭에 있다.

토정 이지함, 그는 참으로 우리 풍류사를 빛낸 비상한 奇人異才였다.


[사진]아산시 영인면은 토정이 현감으로 재직 시 아산현 관아 소재지로써  여민루는 토정이 현감을 지낼 때 아산현 관아
          문이었다. 그 뒤는 영임초등학교이다.이 곳에는 舊 韓末의 風雲兒였던 김옥균의 묘도 있다.
          
 
2. 土亭 李之涵의 墓
 
(1) 이토정과  한음 이덕형의 관계와 한음 이덕형의 풍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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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병이  있는곳이  토정 선생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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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과 한음은 조선 선조 때 名臣이자 라이벌이였고 또 일화가 많은 친구 사이였던 백사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을 일컫는 말이다.

이 가운데 이덕형과 관련해서는 풍수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온다.

이덕형이 토정 이지함의 조카 사위이기 때문이다.

토정이 경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약, 卜筮 등에도 능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 바, 그가 지였다가의 너무 정확하게 적중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토정이 자기가 지은 책을 아궁이에 던졌는데,이를 보고 기겁을 한 그의 제자가 재빨리 건져내니 이미 반쯤 탓더란다. 그래서 이 반쯤

불에 탄 책을 다시 잘 수선한 후 부족한 나머지를 지어 붙인것이 현재 전해지는 ‘토정비결’이란 책이다.그같은 연유로 이 토정비결은 반은 맞고 반은 맞지 않는다고도 한다.

 풍수지리와 사주는 물론 관상에도 능했던 토정은 조카인 李山海(훗날 영의정을 지냄)의 딸을 李德馨과 결혼시키도록 했다. 이덕형의 관상이 장차 큰 인물이 될 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이덕형은 38세에 좌의정에 올라 죽기 1년 전인 52세까지 영의정과 좌의정을 번갈아 지낸 인물이니 토정의 사람 보는 눈이 얼마나 신묘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토정 가문에서는 토정보다는 그의 兄(李之蕃)을 비롯해 그 윗대 어른들이 더 천문, 지리, 복서에 능통했다고 한다. 토정과 그 일족이 묻힌 곳도 바로 토정의 형님이 잡아놓은 자리라고 한다(하지만, 또 一說에는 토정이 生前에 직접 잡은 자리라고도 한다). 어쨌든 토정 집안의 풍수적 지식이 얼마나 풍부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처가의 이러한 집안 내력 때문인지 이덕형은 처가 문중이 명당을 써서 집안이 興盛하고 있다고 확신하였던 듯하다. 언젠가 다른 사람들과 명당 발복에 대해 논쟁을 벌이던 이덕형은 한 사람이 풍수의 허황됨을 주장하자 다음과 같이 논박했다(이산해의 14대 후손 이항복 전 예산문화원장의 증언).

“명당 발복은 있다. 眞穴을 못 찾아서 그렇지, 眞穴만 찾으면 발복한다. 우리 처갓집을 보라!”

실제 이덕형은 처갓집의 명당 발복과 관련해 그의 주변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기록[竹窓閑話]도 전해진다.

“내가 일찍이 처갓집 선영이 있는 고만산(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에서 지관들의 평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수십년 후에 확인해보니 귀신처럼 맞더라. 풍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이덕형이 언급한 고만산에는 現在 토정 이지함과 그의 조상, 그리고 토정 아들 및 조카들의 幽宅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이덕형이 풍수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왕조실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 명지관으로 활약하였던 스님 性智와 빈번하게 교류하였다고 전해진다. 성지 스님은 광해군 때 궁궐의 터를 잡는 데 관여해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으나 광해군의 실각과 더불어 죽임을 당한 지관이었다.

이덕형은 명당을 고르는 일에도 직접 나선 적이 있다. 이덕형의 장인이자 토정의 조카인 山海가 죽자 충남 예산 대솔면 안골에 안장하는데, 이때 조정에서 禮葬을 위해 파견한 관리가 바로 이덕형이었던 것. 따라서 이 자리는 토정 가문의 풍수적 지식과 이덕형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산해의 무덤이 있는 마을 입구에는 연못이 있고 그 연못에는 흙으로 만든 3개의 작은 섬이 있으며, 그 위에 나무가 한 그루씩 자라고 있다. 흔히 이것을 三神島라고 하여 道家의 흔적으로 본다. “이산해의 글 가운데 仙境을 동경하는 글이 많아서 삼신도를 만들었다”는 게 이산해 후손의 말이다. 그러나 풍수적 안목에서 보면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風水無全美'라.

 

 



(2) 土亭一家의 家族墓園  周交面 高亭里 國師峰 언덕

大川海水浴場에서 서쪽으로 隱浦里 松鶴을 지나 포구로 향해 12km쯤 가다보면 保寧郡 周交面 高亭里가 나오고 동구 입구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포구 언덕바지인 고만산에 토정의 아버지 神道碑가 있고 그 오른쪽에 그 두배나되는 신도비가 서있는데 이 비가 李之涵의 神道碑다.

 

비석은 1965년에 세운 것으로 되어있는데 없어졌던 신도비를 이곳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이 곳에서 언덕을 넘으면 이어있는 산허리에 묘가 즐비하게 자리해 있는데 윗쪽 중앙에 土亭 李之涵의  묘가 있고 그 왼쪽에 부친 묘가 있으며 그 위에 비석조차 없는 요절한 그 아들들의 묘가 있다.

 

 묘비가 남아있는「贈領議政」의 묘만도 넷이나 된다. 조카 李山甫의 묘도 여기에 있으며 맨 아래쪽에 議政府左參贊을 지낸 韓平君 李工의 묘가 있다.

 

이들 墓所는 주역에 밝은 土亭 이지함이 손수 잡았다는 墓들로서 명당터인데 西海바다가 내려다 보이고 海松으로 둘러쌓였으며 포구로 들어오는 물이 마치 湖水같고 포구앞에 서너개의 암초가 솟아나 있으며 멀리 큰섬이 있어서 그림처럼 아름다운 터다.

 

  土亭 李之涵은 中宗 12년에 태어난 道人이다. 그의 자는 響仲이며 號는 土亭 또는 水山이고 시호는 文康이며 본관은 韓山이다. 高麗朝의 三隱 中 하나인 木隱 李穡의 후손으로 縣令 이치의 아들이며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兄 之蕃에게 글을 배웠고, 그 후 花譚 徐敬德에게 배웠던 사실은 전술한 바와 같다. 土亭集遺事를 보면 그를 가르켜 「키는 크고 건강하였으며 얼굴은 검으면서 둥글고 살집이 좋았으며 발은 커서 한자가 되었으며 눈은 빛나서 사람을 움직이게 하였으며 목소리는 웅장하고 맑되 말수는 적었고 기개가 당당했고 위품이 늠름하였다.」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가 諸家雜術에 능통했던 능력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主氣論者였던 李珥와 친하였는데, 李珥가 性理學을 배우라고 권유했을 때 "나는 욕심이 많아서 배울 수 없다"고 대답한 것도 그 나름대로의 奇智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문과 지리 및 인사에 能通한 道人으로서 청빈함을 자랑으로 삼았고 청빈락도의 길을 택해서 오히려 스스로가 지니고 다니는 양반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서민의 세계로 파고든 민본사상에 뿌리한 도인이었던 것이다.

 

 전술한 바와같이 그는  의학. 복술. 천문. 지리. 음양 술서 같은 기술학에 능통해서 기행, 일담, 예언이 수없이 많으며,경서자전에도 통달한 그가 수학과 이학에도 통달하였기에 민중의 고달품을 어우를 수 없는 학문을 배격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主敬窮理를 학문의 연구방법으로 택해서 전국을 답사하지 않는곳이 없을정도로 방랑하며 民本과 風水를 익혔고 麻浦의 동막부근(현재 토정동) 토막에 살면서 스스로 土亭이라고 불렀었다. 그는 항해술과 물길을 익혀 네 귀퉁이에 큰 박을 단 작은 배를 타고 濟州道를 세 번이나 왕래하였지만 풍랑 한번 겪지 않았었다고 한다.

 

 몸소 염전을 경영하면서 섬들을 왕래하였고 박을 심고 바가지를 만들어 몇 년내에 곡식 수십만섬을 쌓은 일이 있는데 이것을 백성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주민들의 만류를 뿌리치며 다른 곳으로 떠났었을 정도로 愛民思想이 깊었다. 그가 방랑으로 생애전반을 보내게된 동기를 趙重峰은 말하기를 "젊어서 친구인 安名世의 죽음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만년인 선조 6년(1573)에 宣祖가 탁행이 뛰어난 인물 8명에게 육품 벼슬을 내릴때 일원으로 발탁되어 抱川縣監이되고, 이 후 1578년 4월 牙山縣監이 되어서는 관내에 '乞人廳'을 두고 불우한 밑마닥 인생을 도왔었다. 아산현에서 善政을 베풀어 칭찬이 대단하였으나 그 해 7월 17일 이질병으로 아산에서 죽으니 그의 나이 62세때였다. 지금도 그가 善政을 베풀은 牙山郡 靈仁面 牙山里에는 그의 선정비가 남아있다.

 

 그는 누구에게 돋보이기도, 또 부귀영화를 누리기도 싫어서 그 많은 재주로 오직 民本의 極致에 살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 도인이었는가는 牙山縣監으로 在職時에 올린 상소문을 봐도 단적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그는 주변머리가 없어서 토막에서 살은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욕심이 많아서 儒學을 배울 수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가 儒學者 李珥에게 말한대로 "욕심이 많아서 性理學을 배울수 없다"는 

苦言은 그가 孔孟의 儒學보다는 자기가 느끼고 깨우치는 民本位의 愛民思想이 깨우친 사상이라

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 길을 가지 않았던것일 뿐이다.

 

 그는 때를 잘 만났더라면 크게 빛났을 不世出의 濟世的 큰 인물이였다고 생각된다.

현재 충남 보령시 청라면 옥계리에 그의 위해를 모시고 춘추제향을 받게한 화암서원이 있다.

 

(3) 飛鯨入水形 大明堂

 

천문과 지리 및 인사에 通達했던 토정은 生前에 그의 부모 묘와 자신의 身後之地 및 그의 형 등, 그 一族의 墓를 잡았다고 한다.그가 잡은 자리는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바닷가 야산으로 國사峰 자락이다(최근 충남 문화재 자료 319호로 지정되었으며,보령화력발전소 가는 도로에서 보이는 곳이다).

이 곳에는 그의 부모와 토정 삼형제내외 및 그의 아들내외, 그리고 그의 조카 등 14基, 즉 4代가 한 자리에 밀집되어있다.

 

 國師峰 자락에서 내려오는 來龍이 힘차면서 氣運있게 내려오고 좌청룡과 우백호가 확실하게 혈을 감싸며, 穴 앞의 서해바닷물이 湖水처럼 조용하면서 아름답게 보이고  海岸에서 약 700m 떨어진 案山은 세개의 봉우리가 균형을 이루는 이 곳은 한 눈에 보아도 明堂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곳이다.

 

 이 땅에 관해서 한산모시로 유명한 韓山李氏 先塋山圖에는 "나는 고래가 물 속으로 들어 간다는

'飛鯨入水形' "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 명당은 토정이 기대했던것 만큼이나 확실하게

發福을 시켰주었다.

 

 토정이 그의 부모를 이 곳에 모시고 그의 長兄 之蕃이 청풍군수로 제수되었고, 之蕃의 두 아들 중 맞이인 아계 山海(1539 - 1609)가 영의정으로, 또 山海의 사위인 이덕형이 좌.우.영의정이 되었으며, 之蕃의 둘째 아들인 山光(1559 - 1624)은 문장이 출중하고 지조가 있어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워서 공신이 되었다.

 

이어서 中兄인 之頭는 외아들 명국 山甫(1559 - 1624)를 두었는데,임진왜란 때 이조판서로 봉직하면서 큰 공을 세우고,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수습하다가 과로로 병사함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하지만, '風水無全美'라고 옥에도 티가 있으니,백호가 내백호뿐이라서 虛하여 藏風이 다소 虛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풍수에서는 靑龍은 長子를,白虎는 支孫을,朝山은 外孫을 의미하는데,이 땅은 內外靑龍은 이중으로 穴을 감싸안았는데 반해서 白虎가닥만은 內白虎 뿐이고 또 끝쪽이 허하여 案山과 右白虎 사이 南南西쪽 바닷물이 보이는 곳이 虛하니  三兄弟 中 막내인 토정의 자손이 그 害를 입게되어있다.그래서 그의 큰 아들 山斗와 셋째 아들은 전염병으로 죽고, 차남 山輝는 범에 물려 죽었다. 또 案山만 있고 朝山이 없으므로 딸이 귀하다.하지만, 청룡이 실함으로 전술한 바와같이 直系後孫은 百子千孫으로 번창했으니, 한음 이덕형의 말대로 땅의 이치는 이와같이 毫里之差도 없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토정도 이같은 결점을 알고 그 흠결을 보완코자 정면의 案山과 솔섬을 연결시키는 공사를 벌였지만,끝내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하지만, 현재는 솔섬으로 차량이 다닐정도의 방파제가 들어서 있어서 이를 다소 보완해준다. 그래서 이토정이 다시금 각광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이 점에서도 그의 利他行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는데, 이같은 사실을 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가장 불리한 쪽으로 선영을 잡았다는 점이 그 점인 것이다.

 

 그의 묘 바로 뒤에 아들내외 묘가 있어서 풍수에서 금기시하는 소위 倒葬과 逆葬에 해당된다.이는 유교적 교리측면에서 보면 그렇지만,토정과 같은 道人의 측면에서 본다면 크게 문제시될 것이 없으리라고 보여진다. 그는 이미 이같은 세속의 경계를 뛰어 넘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倒葬의 경우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경우도 볼 수 있었는데,풍수사들이 둘러되기를 "그는 왕이 였기 때문에 괜찮다"라고 我田引水式 해석을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도장을 금기시한 것은 풍수적 논리가 아니라 長幼有序를 따지는 옛 유교의 病弊的 논리가 그렇게 만든 것으로 순수 풍수적논리로는 아무 문제가 될것이 없기 때문에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陽宅의 경우에는 부모집 뒤에 자식이 살거나,혹은 형집 뒤에 동생이 살면 피해를 보게되는 경우도 있다고들 하는데, 이 경우는 외관상 보기에도 좋지 않다.

 

 이 땅은 龍脈의 起伏이 힘차게 내려오다가 國師峰에서 일단 숨을 죽인 후 우뚝솟은 다음, 왼쪽으로 약간들며 내려오는 도중에 正南向인 子坐午向으로 바다를 바라보면서 穴을 맺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來脈이 秀麗하고 아름다움으로 그 후손은 이 아름다운 氣를 받아서 발복했던 것이다.

 

이 땅과 관련하여 일부 풍수가는 혈장에 물고기 모양이 없으니 飛鯨入水形이 될 수 없고 오히려 松島(

솔섬,혹은 松鶴島) 제방에서 보면 호랑이가 바다에서 산으로 건너가는 뒷모습이 보이므로 猛虎入山形局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이들은 주장하기를 호랑이 뒷발 사이에 꼬리가 보이는데, 이 꼬리에 묘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  내룡은 호랑이 척추에 해당하며,국사봉은 호랑이 엉덩이에 해당하는데,이같이 꼬리에

혈이 있을 경우에는 마치 바둑판이나 퉁소,거문고,금계포란형처럼 여러개의 혈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

하지만, 이는 견강부회로 보아야 한다.

 

 만약 이들의 말대로 호랑이 꼬리에 혈이 있다면 이는 크게 힘을 쓸 수 없는 부위이므로 명당이 될 수 없을 것이고, 그들 말대로 설령 혈이 있다손 치더라도 혈은 하나일 뿐이지 여러개가 있을 수 없다.이들 말대로 꼬리가 혈이 될려면 호랑이가 꼬리로 낚시를 했다는 이야기인데, 이도 말이 되지 않을뿐만 아니라 호랑이는 산에 있어야지 등을 돌리고 꼬리를 내렸다는 것은 항복했다는 뜻이니,항복한 호랑이가 무슨 기운을 쓸 수 있겠는가?

 

 통상적으로 퉁소나 피리 및 바둑판,금계포란형에는 여러개의 혈이 있을 수 있는데,퉁소나 피리는 4 ~ 9개 정도의 혈을 맺으며,금계포란은 혈이 아주 까깝게 붙여있다.

 

(4) 명당에 쓰고 인물이 나나, 아니면 인물이 나니 명당이 되었는가?

 

  李土亭의 幽宅을 보고 論하면서 현재 우리나나의 풍수사들이 얼마나 허황된지를 새삼 실감한다.

 기본적으로 풍수를 論할 때는 순수하게 그 땅만 보고 論해야지, 그 속의 주인공을 보고 論해서는 안된다. 이토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수 많은 풍수사들이 견강부회로 아전인수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 자리의 주인공이 누구든 간에 땅이 말하게 해야 하는 것이지 사람이 말하게 해서는 않된다.

 

즉 '명당에 썼기 때문에 그 기운을 받아서 발복했는냐'를 말해야 하는 것이지,'인물나고 명당에 썼다'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禁囊經에 " 명당은 奪神功 改天命 한다"라고 하면서 '神의 권능을 능히 빼았고 하늘의 명을 고쳐 바꿀 수 있다'고 쓰여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 明堂은 地獄門도 바꾼다"라고들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앞서서 積德을 해야만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그래서 옛 부터 " 積德之家에 必有餘慶이라"고 했던 것이다.

 

명당을 차지할려고 하기 이전에 마음부터 닦을 일이다.

 

그 옛 날 동굴에 숨겨져 있었다는 麻衣相書에 이르기를

 " 萬相不如心相:라고 했으며,

 

孟軻도 " 地理不如人和 "라고 했다.

 

마태복음 산상수훈에도 이를 나타내고 있으니

 

明堂을 꼭 찾고 싶은 사람들은 모름지기 남에게 덕을 베푼 후에 명당을 찾을 일이다.

 

 

 

                                                 ㅡ      知     雲     先    生    ㅡ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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