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장준하 선생께 띄우는 편지
법정스님 2010/04/24 23:43 蓬生麻中
장준하 선생께 띄우는 편지 / 법정(法頂)
※『씨알의 소리』1976년 8월호 / 20주기 문집에 재수록
장준하 선생님!
선생님이 어처구니없이, 정말 어처구니없이 우리 곁을 떠난 지 한 돌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이 다 그런 것이긴 하지만, 장선생님의 죽음처럼 그렇게 허망(虛妄)한 경우는 또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무렵 산거(山居)를 마련하느라고 산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볼 일이 있어 광주에 나갔다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우연히 안병무박사를 만났었지요. 안박사는 대뜸, 장선생님 소식을 들었느냐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왜요? 무슨 일이? 놀라는 내 표정에 신문을 건네주었습니다. 일면 머리기사! 그 비보(悲報)를 보는 순간 저는 가물가물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느냐고.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그 길로 서울을 향했습니다. 면목동 집에 들러보고야 꿈이 아닌 현실임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장선생님의 육신은 우리들 곁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할 그 길을 먼저 떠나신 것입니다. 그토록 파란 많고 수난(受難)으로 점철된 일생. 50평생을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겨레의 자유를 위해 험난한 가시밭길을 헤쳐 가신 분. 서울 장안에 크고 작은 집들이 무수히 깔려 있는데도, 방 한 칸 없이 남의 셋집으로만 전전하다 가신 가난한 분. 커가는 자식들 교육을 남들처럼 제대로 시키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시던 아버지. 그러면서도 집안 사정은 전혀 입밖에 내지 않았지요. 호권(장남)이 결혼한 사실도 저희는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뒤에 안 사실이지만 친지들에게 폐를 끼칠까봐 전혀 알리지 않으셨다더군요.
장선생님을 처음 뵙기는 思想界 시절입니다. 제가 해인사에 머물고 있을 때지요. 서울 올라간 김에 思想界社로 찾아갔더니 아주 반겨주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마침 함선생님도 계셨지요. 함선생님이 저를 소개해 주시더군요. 그 후 시절이 잘못되어 가면서 우리들은 만날 기회가 잦았습니다. 그때까지 산에만 묻혀 살던 저에게 종교의 사회적 책임을 눈뜨게 해 주셨습니다.
『씨알의 소리』편집회의를 몇 차례 우리 다래헌(茶來軒)에서 열 때, 다른 분은 더러 빠지는 일이 있어도 함선생님과 장선생님만은 거르는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외형적인 종파는 달라도 절간의 분위기를 선생님은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실 때마다 작설차(雀舌茶)를 끓여드리고 향을 살라드렸지요. 때로는 좋아하시는 향을 나누어 드리기도 했고요. 선생님 댁에서 모임이 있을 때면 저의 채식을 위해 자상하게 마음을 써주셨습니다.
선생님이 내게 준 인상은 결코 시정(市井)의 정치인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이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지성(知性)이었고 불의 앞에 용감히 도전하는 행동인(行動人)이었습니다. 이런 선생님을 가리켜 한 동료는 "그는 금지된 동작을 맨 먼저 시작한 혁명가"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로 보고 한 말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신촌의 김박사 댁에서 『씨알의 소리』편집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항상 그러했듯이 선생님의 차로 저를 바래다 주셨습니다. 원효로 함선생님 집과 제가 거처하는 다래헌(茶來軒), 그리고 면목동 쪽은 도심을 벗어난 변두리로 거리가 먼 삼각 지점이었습니다. 그날 밤 선생님은 전에 없이 저의 방에 까지 들어오셔서 새로운 운동을 전개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선뜻 발기인 명단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세 번 째였습니다.
물론 그 성격은 다르지만, 편집회의 석상에서는 전혀 내비치지 않던 일을 은밀히 따로 말씀하신 것을 보고, 일을 위해서는 이렇게 신중해야 하는구나 하고 저는 그때 배웠습니다. 그날 밤 선생님께 죄송한 일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주문(一柱門)에서 우리 방까지는 밋밋하게 오르는 길인데 걸음이 빠른 저를 따라오시느라고 숨차게 해드린 일입니다. 선생님이 떠나신 후 그 길을 걸을 때마다 문득문득 그 날 밤일이 생각나곤 했습니다.
그 무렵 건강도 안 좋았는데 '큰 일'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일을 위해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긴급조치 제1호에 걸려 15년 형(刑)을 받고 복역 중 고질인 심장병의 악화로 형집행이 정지되어 병원으로 옮겨오신 후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갔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건강이 몹시 안 좋더군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베개 밑에서 서류를 한 뭉치 꺼내시면서 초지(初志)를 관철해야 할 길을 모색하였습니다.
선생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또 대성빌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모임이 거기서 있을 때마다 청중들의 불타는 그 눈들을, 그 중에서도 선생님이 주관하시던 민족학교 주최로 열린 '항일문학의 밤'을! 젊음의 그 열기, 그것은 곧 어떠한 불의 앞에서도 꺾이지 않을 이 겨레의 강인한 생명력입니다. 흩어져 있던 그 열기를 선생님이 하나로 뭉치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가신 후로도 세월은 그대로입니다. 지난 가을 산으로 들어온 이래 누구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저 반야검(般若劍)을 갈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을 빌린다면 소모되어버린 '밧데리'를 충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느라 글도 쓰지 않고 말도 하지 않은 채 산의 나무들처럼 덤덤히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의 『씨알의 소리』에도 전혀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장선생님 1주기를 추모하는 특집이라고 해서 이렇게 사연을 띄우고 있습니다.
지난 봄 서울에 올라가 면목동 집에 들렸더니 감회가 무량했습니다. 선생님이 계시지 않은 그 집은 텅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예나 이제나 사모님은 꿋꿋하셨습니다. 호권군이 얼마 전에 딸을 보았다는 소식과 취직이 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계시지 않은 집에는 찾아오는 친지들의 발길도 드문 것 같았습니다. 입이 무거우신 사모님은 별 말씀이 없었지만 집안 살림이 더욱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희들의 무성의와 무력을 부끄러워 할 뿐입니다.
1주기에 참례 못하여 대단히 죄송합니다. 안거중(安居中)이라 불전에 향다(香茶)의 공양이나 올리겠습니다. 안거 후에 찾아볼까 합니다. 옛날 그 집에 사시는지 또 다른 전셋집으로 옮기셨는지 산에서는 소식을 모르고 있습니다.
장선생님!
8月의 태양 아래 선생님의 육신이 대지에 묻히던 날, 저는 관위에 흙을 끼얹으면서 속으로 빌었습니다. 건강한 몸 받아 어서 오시라고요. 고이 잠드시라고 명복을 빌지는 않았습니다. 금생(今生)에 못다한 한 많은 일들을 두고 어찌 고이 잠들 수 있겠습니까. 가신 선생님이나 남은 우리들이 고이 잠들기에는, 우리 곁에 잠 못 이루는 이웃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웃이 고이 잠들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도 잠들 수 있을 것입니다.
"…… 50대 초반을 보내며 잠자리가 편치 않음을 괴로워한다." 고 『돌베개』에 붙이는 글을 선생님은 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잠자리가 편치 않음을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이 괴로움이 덜릴 때까지 우리는 잠들 수도 쉴 수도 없습니다. 지하에서나 지상에서나 우리들의 염원(念願)은 결코 다를 수 없습니다.
할 말을 줄입니다. 우리들의 시대가 보다 밝고 건강해질 때까지 우리들의 걸음은 멈출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늘 함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올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더위에 안녕히 계십시오. 분향(焚香) 합장(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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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장준하 - 그 심지에 다시 불길을
법정(法頂) 編著 동광출판사: 1982년 11월 15일
◎ 책 소개
1982년 법정은 『씨알의 소리』에 실렸던 추모의 글들을, 몇 개의 새로운 글들과 장준하의 「민족주의자의 길」, 『돌베개』 중에서 일부를 엮어서 추모문집 형태의 책을 냈다. 이 책은 첫부분을 장준하의 사진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현재 절판된 상태로 구입할 수는 없다. 다음은 '책머리에' 이다.
책머리에 / 법정
지난해 가을 지리산과 설악산, 그리고 바다 건너 한라산을 올랐다. 더 오를 산이 없음을 알고 토막난 국토를 실감했다.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북녘으로 첩첩이 쌓인 까마득한 산들을 바라보면서 분단 조국의 아픔이 오장육부에 와 닿았다.
산을 오를 때마다 문득문득 장준하 선생 생각이 난다. 선생님이 살아 생전 산을 즐겨 찾은 것은 여느 등산꾼들처럼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거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둘로 갈라진 이 겨레의 자주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청청한 산을 찾게 했던 것이다. 산에서 민족 통일에 대한 활로를 모색했었다. 오늘은 이 발로 갈 수 없는 내 나라 내 강산, 하늘가에 아득히 솟아 있는 침묵의 산들을 바라보노라면 한맺힌 겨레의 신음소리가 우리들 귀에 들려온다. 어느 세월에 다시 하나를 이룰 것인가.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은 약사봉에 올라갔다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아니, 이제는 자유혼이 되어 남녘이나 북녘을 가릴 것 없이 훨훨 마음대로 내왕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 겨레가 자주통일이 되기까지 우리들 곁에 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민족의 살길을 찾아 노심초사(勞心焦思)하고 계실 것 같다. 선생님이 남긴 말씀이 생각난다.
"나의 사상, 주의, 지위, 재산, 명예가 진실로 민족통일에 보탬이 되지 않는 분단 체제로부터 누리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과감하게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 위대한 자기희생 없이는 통일은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되새길 때 내 자신이 몹시 부끄럽다. 민족통일이란 혀 끝에 달린 말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온갖 편견과 불평등과 증오심에서 벗어나 오로지 하나를 이루기 위한 자기희생 없이는 달성될 수 없는 고귀한 과제다. 이와 같은 신념으로 장준하 선생은 집 한 칸 없이도 당당하고 의젓하게 살았었다. 날이 갈수록 그 높은 뜻이 그립다. 돌베개를 베고 가신 님을 그리며 책머리에 외람되이 붙인다.
◎ 차 례
책머리에 / 법정
ㅇ 산중(山中) 고혼(孤魂)아 / 문익환
ㅇ 분수(噴水) / 강민
ㅇ 아, 장준하 / 함석헌
ㅇ 나는 장준하를 위해 울지 않습니다 / 함석헌
ㅇ 그의 죽음이 분합니다 / 함석헌
ㅇ 장준하 선생이 묻히던 날 / 계훈제
ㅇ 영원한 추모 / 계훈제
ㅇ 형의 모습이 그리워 / 김동길
ㅇ 불의 앞에 용감히 도전한 행동인 / 법정
ㅇ 죽을 때까지 돌베개를 베고 / 김수환
ㅇ 그 심지에 다시 불길을 / 김도현
ㅇ 돌베개를 베고 가신 님을 그리며 / 문동환
ㅇ 형님! / 백기완
ㅇ 외유내강한 사람 / 김성식
ㅇ 지성과 용기의 표상 / 이태영
ㅇ 애국으로 일관한 청빈(淸貧)의 생(生) / 김준엽
ㅇ 나라의 큰 별 / 신일철
ㅇ 신학생 장준하 형 / 박봉랑
ㅇ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분 / 홍남순
ㅇ 애타게 그리워집니다 / 김숭경
ㅇ 민족의 횃불 / 전대열
ㅇ 평생을 민중의 삶으로 / 이신범
ㅇ 사상계 시절의 그 모습 / 박경수
ㅇ 약사봉 계곡의 진혼곡(鎭魂曲) / 김삼웅
ㅇ 땅 속의 선생이시여 / 고은
ㅇ 수기(手記)처럼 돌베개를 베고 / 김희숙
[부록] 민족주의자의 길 / 장준하
[부록] 탈출 / 장준하
이렇게 사시다가 이렇게 가시다 / 동광출판사 편집실
엮인글 주소 :: http://blog.ohmynews.com/heifetz725/rmfdurrl/262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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