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강화 전등사

문근영 2010. 10. 26. 08:43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선사 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 서양 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강화도는 역사와 문화의 섬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강화도에는 전등사를 비롯해 유서 깊은 사찰도 많이 터 잡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전등사보다 300여 년 후에 세워진 보문사 및 정수사가 손꼽힌다. 삼랑성 내 위치한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鼎足山)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이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어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전등사란 명칭은 고려 충렬왕 8년(1282)에 왕비 정화궁주가 옥등잔을 부처님께 바친 데서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소재 전등사로 들어가는 문은 동문과 남문이 있는데 필자는 남문으로 들어갔다. 남문 주차장(주차료 2,000원)에 차를 세우고 입장권(2,000원)을 구입한다.  전통사찰마다 흔히 있는 일주문이 보이자 않아 매표소 담당자에게 어디에 있는지 물어본다.  그랬더니 전등사는 산성 내에 위치하고 있어 성문만 있고 별도의 일주문은 없다는 대답이 들려온다. 그러고 보니 남문은 성곽처럼 생겼는데, 문루(門樓)에는 "종해루(宗海樓)" 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남문인 종해루

 

 

이 문루가 바로 단군왕검의 세 이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정족산성)이다. 남문 양쪽으로 뻗어 있는 복원된 성의 모습이 사뭇 웅장하다.

 문으로 이어진 성곽

 

 성곽 산책로

 

 

이 종해루를 지나 50미터쯤 올라 좌측을 보면 전등사 역대 조사들의 부도가 세워진 부도전이 보인다. 이 뒤로도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부도전

 

 

위로 올라가니 오른쪽에는 화려한 색상의 탑과 같은 물건이 보이는데 설명문을 읽어보니 바로 윤장대이다. 윤장대는 회전식 불경보관함이라 할 수 있다. 윤장대에는 양쪽으로 축이 달려 있어 한 바퀴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고 한다. 필자는 불자는 아니지만 한 손으로 돌려도 쉽게 회전이 된다. 이제 나도 경전을 읽은 셈이 되었으니 부처님께서도 보살펴 주시겠지. 

 윤장대

 

 

수령이 600년 경과한 보호수 은행나무를 지나자 관람객들의 휴식처 겸 다원(茶園)으로 운영되는 죽림다원이 있고, 그 위쪽에는 전등사(傳燈寺) 편액이 붙은 건물이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해보니 "대조루(對潮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이 바로 전등사의 불이문 구실을 하는데, 건물 자체가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며 전등사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아주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조루 바로 옆에는 종루가 서 있다.

 보호수 은행나무

 

 전통찻집

 

 전등사 편액

 

 대조루

 

 종 루

 

 

대웅보전(보물 제178호)은 그 규모는 작지만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더욱이 대웅전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이 조각되어 있다. 필자가 사진을 찍을 때에도 원숭이 상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나부상(裸婦像)이라는 것이 다수설인 모양이다. 전설에 의하면 절을 짓던 목수가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한 것으로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대웅보전

 

 대웅보전의 올린 문

 

 추녀밑의 나부상

 

대웅전과  각종 요사채 

 

 

 

 

대웅전 오른편에 활짝 핀 능소화는 달려 있는 꽃이나 땅에 떨어진 꽃이나 그 숫자가 비슷한 듯 하다.

 

 

 

대웅전 왼편에는 향로전이 있다. 이는 법당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조선 시대에는 상궁이나 나인들이 기도하던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은 상임법사실로 쓰인다.

 대웅보전, 향로전, 약사전, 명부전(우로부터)

 

 

대웅보전 서쪽에 위치한 약사전(보물 제179호)은 대웅보전과 거의 같은 양식의 건물이다.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석조로 조성한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약사전

 

 

약사전 옆의 서남쪽에 세워진 명부전도 정확한 창건 연대는 밝혀지지 않는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해 모두 29존상이 모셔져 있다. 대개 명부전은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죽은 이를 재판하는 시왕이 있는 곳은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셨을 경우에는 지장전이라고 부른다. 이 전각은 죽은 사람들이 49일이 지나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들의 넋을 위해 치성을 드리는 곳이다. 이처럼 명부전에는 부처님 원력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제사의 공덕으로 극락을 기리는 정성어린 마음이 담겨 있다. 약사전 현판 밑에는 용머리 형상의 나무 조각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명부전의 용조각상

 

 

명부전 앞에는 전등사 범종(보물 제393호)이 있다. 이 범종은 중국 송나라 때(1097) 회주 숭명사에서 무쇠로 만든 중국종이다. 2차 대전 때 일본군이 병기를 만들려고 부평 병기창에 갖다 놓은 것을 광복 후 이곳에 옮겨 놓았다. 전형적인 우리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함을 금방 알 수 있다.

 범종각

 

 

범종각 앞의 큰 고목등걸에는 부처님상이 조각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부처님상

 

 

명부전과 종각 사이의 계단을 오르면 아담한 전각이 세워져 있다. 비교적 근래에 세워진 극락암이다. 서운 큰스님과 상묵 큰스님이 열반할 때까지 머문 곳이다. 현재 기도도량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극락암

 

 

도라지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길을 따라 뒤로 올라가면 삼성각이 있다. 산신, 독성(나반존자), 칠성 등 삼성(三聖)을 모신 건물이다. 본래 삼성은 중국의 도가 사상과 관련이 있는 성인들이지만 이 땅에 불교가 전래하면서 불교 사상과 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성각에서 뒤돌아보는 사찰의 기와지붕이 편안한 느낌을 준다. 기와지붕에는 우리민족이 얼이 서려 있다. 

 도라지

 

 삼성각

 

 내려다 본 사찰 전경

 

 

전등사 뒤쪽 삼랑성(정족산성)과 정족산(200m)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조산왕조실록을 보관하였던 정족산 사고가 복원되어 있다.

 정족산 사고터

 

 

정족산에 오르면 사방팔방으로 보이는 조망이 매우 좋다. 서쪽으로는 마니산이 우뚝하고, 서해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정족산에서 바라본 마니산

 

 

4세기에 창건된 전등사에 들러 사찰에 얽힌 여러 가지 전설도 살펴보고 삼랑성과 정족산을 가볍게 산책한 후 분위기가 차분한 죽림다원에 들러 차 한잔 시켜보자. 향긋한 전통차 향기에 취하면서 판매중인 도자기 작품들을 감상하노라면 속세의 시름은 어느 듯 저 멀리 달아나고 말 것이다. (2007. 7. 21).    

 죽림다원의 도자기(판매용)

 

 

 <전등사 가는 길>

 자료제공 : 전등사 홈페이지

출처 : 하늘이 감춘땅 무등산 석불암
글쓴이 : 자비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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