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霞谷(하곡) 鄭齊斗 墓(정제두 묘)

문근영 2010. 9. 27. 15:56

[본문스크랩]  霞谷(하곡) 鄭齊斗 墓(정제두 묘)   2009/04/17 12:51 추천 0     스크랩 0
http://blog.chosun.com/kimivo/3871447
 원문출처 : 草阿(초아)의 삶과 그리움
 원문링크 : http://blog.chosun.com/pts47/3458601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 62-6
인천시 기념물 제 56호

 

정제두의 묘는 강화읍에서 마니산으로 가는 도중 하우고개 중턱에 있다.
정제두는 서울에서 태어나 늦게 관운을 얻어 사헌부에 몸담기도
하였으나 61세에는 강화 하곡으로 옮겨와 어렵게 살았다.

아버지 정상징 묘와 아들 정제두의 묘가 앞 뒤로 나란히 있다

 
 [묘 전경]

앞쪽에 보이는 묘가 정제두의 아버지인 정상징과
그의 부인인 한산 이씨의 합장묘이며, 뒤 쪽에 보이는 것이 정제두의 묘다.


 [정제두 묘]

霞谷(하곡) 鄭齊斗(정제두, 1649~1736)
본관 延日(연일). 자 士仰(사앙). 호 霞谷(하곡). 시호 文康(문강).
서울 출생. 현종 9년(1668) 별시문과 초시에 급제했으나
정국의 혼란을 통탄,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陽明學(양명학)을
연구 발전시켜 최초로 사상적 체계를 세운 조선후기 학자.

18세기초 강화도로 옮겨 살면서 양명학 연구과 제자양성에 힘써
'江華 陽明學派(강화 양명학파)'라 불리는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다.


 [정제두 묘 전경]

숙종 6년(1680) 영의정 金壽恒(김수항)의 천거로
司圃署別提(사포서별제)가 되나 사퇴하였고,
1684년 工曹佐郞(공조좌랑)을 잠시 지낸 뒤 다시 사직하였다.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重臣(중신)의 천거로 30여 차례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숙종 때 主簿(주부), 호조참의, 淮陽府使(회양부사),
경종 때 대사헌, 이조참판, 영조 때 右贊成(우찬성) 元子輔養官(원자보양관)
등을 잠시 지냈을 뿐, 거의 다 거절하고 주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정제두 묘]

처음에는 朱子學(주자학)을 공부하였으나, 뒤에 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陽明學(양명학)을 연구 발전시켜 최초로 사상적 체계를 세웠다.

문집으로
'霞谷文集(하곡문집)'
저서로
存言(존언), 論語解(논어해), 孟子說(맹자설), 中庸解(중용해),
天元說(천원설), 經學集要(경학집요), 經學書成(경학서성)
등이 있다.

 
 [정제두 묘역 문인석]

그는 학문의 중심을 인간 본연의 가치에 두고 학문이 사람을 위해
실용성이 있어야 한다고 보면서 이를 위한 실천을 강조했다.

 

이후 이광사, 이광려,이건창, 윤순, 이진병 등이 모여
하나의 학문적 체계를 형성하면서 당시 맹목적으로 주자학에
빠져들었던 학풍에서 벗어나 경전을 우리의 시각에서 연구하여
인간존재의 본질을 연구했고, 아울러 서로 講論(강론)하고
연구결과를 공유하면서 강화학파의 토대를 닦았다.

 
 [정제두 묘비]

묘비는 순조 3년(1803)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신대우가 짓고 서영보가 썼다.

 
 [아버지 정상징과 그의 부인 한산이씨 합장묘]

포은 鄭夢周(정몽주)의 11대 후손으로
진사 鄭尙徵(정상징)의 아들이다.


한양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하곡이 5살 때(1653년) 돌아가셨다.

16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鄭維城, 1596~1664)가 우의정까지 벼슬에 오르셨다.

 
 [묘 뒤에서 안산을 보며...]

20대에 南溪 朴世采(남계 박세채, 1632~1695)를 스승으로 모시고
明齋 尹拯(명재 윤증, 1629~1714)에게도 배웠다.

정제두는 정치를 의식적으로 멀리했다.
섣불리 당쟁에 휘말렸다가는 그의 사상이 자신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초청장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상징 묘 앞 문인석]

그는 천거로 몇몇 벼슬을 역임했지만 평택 현감으로 있던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남인 정권이 들어서자 벼슬을 내놓고
안산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숙종 20년(1694)의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차지한 뒤
여러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아버지(정상징) 묘]

61살 때인 숙종 35년(1709) 강화도 霞谷(하곡)으로 이주했다. 
그의 '연보'는 이 해 장손이 夭死(요사)하자 몹시 슬퍼해서 선조들의
묘가 있는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적고 있으나 이때는 노론 일당독재가
구축되고, 주자학이 유일사상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던 때였다.

 

그는 학문의 자유를 위해 강화로 이주한 것이었다.


 [정상징 묘비]

그 뒤 李匡明(이광명), 申大羽(신대우) 등 소론계 인사들이
이주하면서 강화도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의 조선에서 학문의
자유가 숨쉬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다.

 

양명학은 이후 정제두 집안의 家學(가학)으로
전승되면서 그 맥을 이어갔다.

강화학파의 특징은

'인간을 위한 학문, 조선을 위한 학문'
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기존 학문에 대한 단순한 비판보다는 자기의 내면을 더욱 충실하게
다지고자 했으며, 知行合一(지행합일)을 주장하면서 實學(실학)과
맥을 같이하는 실천의지가 강한 현실참여의 학파였다.

 
 [묘 전경]

조선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강화학파의 후예들은
대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초기 독립운동의 거물이었던 溥齋(보재) 李相卨(이상설),
임시정부 2대 대통령 白巖(백암) 朴殷植(박은식) 등이
모두 강화학파의 후예였으니 한 선비의 진실 지향 정신이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 할 것이다.

 

진리를 향한 구도의 열정뿐, 無慾(무욕)의 삶을 살았던
정제두가 젊은 시절의 잦은 병치레에도 불구하고
88살의 장수를 누린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사진. 글 / 草阿(초아) 박태선(안내판과 인터넷 참조)]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