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충성공 한명회 묘

문근영 2010. 9. 26. 11:16

소재지  ;  충남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속창리

충성공 한명회

1415(태종 15)~1487(성종 1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 할아버지는 예문관제학 상질(尙質)이고, 아버지는 증영의정(贈領議政) 기(起)이며,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 이적(李逖)의 딸이다. 딸이 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와 성종비 공혜왕후(恭惠王后)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권람(權擥)과 더불어 산천을 주유했다. 1452년(문종 2) 문음으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었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

(首陽大君)과 의기투합하여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30여 명을 추천했다.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 때 심복 참모로서 큰 공을 세워 군기녹사(軍器錄事)에 임명 되고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의 호를 받았다. 곧이어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이 되었다가 1454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좌부승지로 승진했으며, 그해 가을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받고 우승지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켰으며, 사육신의 주살(誅殺)에 적극 협조했다. 이어 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457년 이조판서·병조판서가 되었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體察使)가 되었으며, 1461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지고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했다. 그뒤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고 1466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곧 병으로 사임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유교명(遺敎命)을 받들어 다른 대신들과 함께 승정원에서 숙직하며 서정(庶政)을 결재했다. 같은 해 남이(南怡)가 제거된 후 추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推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1469년(예종 1)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임했다. 성종 즉위 후 병조판서가 되었고, 1471년(성종 2)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같은 해 대궐의 동·서쪽에 군영을 설치할 것을 청하고 직접 서영(西營)을 거느렸으며, 흥학(興學)의 중요함을 역설하면서 성균관을 정비·확충하게 했다. 1484년 나이가 많아 벼슬을 그만두고자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성종으로부터 궤장(几杖)을 받았다. 세조의 총신으로 성종대까지 고관요직을 역임하면서 조선 초기의 군국대사에 많이 참여했으며, 부와 영화를 한몸에 누렸다.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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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에 있는 충성공 묘역비

 

 

 신도비도 눈에 들어오고

 

 

 충모사의 외삼문

 

 

 정면에서 바라본 묘의전경

 

 

 

 

 처음보는 둘래석. 그리고보이는 도로는 경부고속도로

 

 

 좌측 90도방향

 

 

 그때의 위세를 나타내는듯 우람한 장명등석

 

 

 묘역에서바라본 충모사의 전경

좌우에 좋은 안산이 존재하나 정녕 그대의묘는  아름다운 안산을 저버리고

백호자락 마저  고속도로로 인해 절단 났구려...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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