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스크랩] 다산의 북한산 나들이와 어떤 인연 / 배우성

문근영 2010. 9. 3. 08:55
다산의 북한산 나들이와 어떤 인연
  글쓴이 : 배우성     날짜 : 07-02-21 09:17     조회 : 9    

북한산 태고사 계곡과 중흥사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산영루(山映樓)라는 정자가 있었다. 수많은 조선 시인들이 지금은 주춧돌만이 남아 있는 이 정자를 찾았다. 다산 정약용도 그 중 한명이었다. 다산이 산영루를 노래한 시 한 수.


험한 돌길 끊어지자 높은 난간 나타나니 

겨드랑에 날개 돋쳐 날아갈 것 같구나

십여 곳 절간 종소리 가을빛 저물어가고

온 산의 누런 잎에 물소리 차가워라

숲 속에 말 매어두고 얘기 꽃을 피우는데

구름 속에 만난 스님 예절도 너그럽다

해 지자 흐릿한 구름 산빛을 가뒀는데

행주에선 술상을 올린다고 알려오네.


산길을 돌아 도착한 그곳에 날아갈듯 날렵한 느낌의 누정이 서 있다. 다산과 친구들이 그곳 누정에 모였다. 가을날 해질녘, 산사의 종소리와 계곡의 물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산영루(山映樓)와 청담(淸潭)


산영루(출처 : 신동아 2005년1월 화보부록)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산영루의 모습이 확인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노적봉을 배경으로 계곡 위 절벽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주춧돌만 남아 있는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 지붕 모양이 이채롭다. 다산이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쳐 날아갈 것 같다’고 노래한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다산이 노래한 풍경 가운데 지금은 짐작조차 어려우리만큼 변해버린 것도 있다. 산영루 인근 어디에서도 다산이 노래한 ‘차가운 물소리’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흘러 넘쳤다. ‘차가운 물’은 한 곳으로 모여들어 못이 되었다.


포말이 부서지는 계곡물과 맑은 못은 산영루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이 누정과 못은 조선의 시인묵객들 사이에서 한번쯤 들러볼 만한 곳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다산보다 두 세대 앞선 학자들도 이곳 노적봉 자락의 정자를 즐겨 찾았다. 그들 중에는 성호 이익(李瀷), 그리고 이중환(李重煥)과 이인복(李仁復)이 있었다. 이익은 근기남인계 실학파의 중심이며, 이중환과 이인복은 남인계 신진 엘리트였다.


이익에 따르면 백운봉(白雲峯) 자락, 중흥동(中興洞) 계곡에 풍산홍씨 집안의 정자가 있었다 한다. 중흥동은 노적봉 아래 중흥사 자리를 뜻한다. 이익이 본 것이 산영루였다면, 산영루는 당시 풍산홍씨 가문의 정자였던 셈이다.


이인복의 일기는 중흥동 계곡의 누정이 산영루였다는 사실을 좀 더 직접적으로 시사해 준다. 그가 이 계곡을 찾은 것은 27세 때인 1709년(숙종 35) 봄이었다. 이인복의 시야에 절벽 위의 누정이 들어왔다. 일기에 따르면, 그 누정은 ‘날개 모양’이었다 한다. 날개모양의 지붕을 가진 중흥동 계곡의 정자는 다산이 ‘겨드랑이에 날개 돋쳐 날아갈 것 같다’던 바로 그곳이다.


중흥동 계곡을 흐르던 물은 산영루 아래에 모여 못이 되었다. 이익도, 이인복도 이곳을 청담(淸潭)이라고 불렀다. 맑은 못. 물론 다른 곳이라고 해서 맑은 못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서울과 그 인근에 살던 이들에게 청담은 중흥사 계곡을 뜻하는 고유명사였다. 청담을 아끼지 않은 사람은 없었지만, 누구보다 이 계곡과 못을 사랑한 또 한명이 있었다. 이 못의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은 사람. 그는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었다.


‘다른 시간, 같은 공간’


청담이라는 호는 이중환의 평온했던 젊은 시절을 상징한다. 그 때 이중환은 이인복, 오광운(吳光運) 등과 함께 북악산 자락 백운봉에 올라 시사(詩社)를 결성했다. 그들 백련시사의 동인들에게 산수(山水)는 ‘선비들이 돌아가야 할 곳’이었다. 그들은 산수 유람을 여가의 일부로 여기는 보통 사대부들과 자신을 구별하려 했다. 이중환이 훗날 ‘살만한 곳’을 찾으려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익도, 정약용도 산영루와 청담을 사랑했다. 그러나 산수를 보는 그들의 시선은 이중환과 달랐다. 누구 못지않게 명산과 명승지를 여행했던 이익이었지만, 그는 산수를 ‘선비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이익의 입장에서 보면, 세속과 거리를 두는 일은 몸으로 할 일이 아니라 마음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정약용은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를 보았지만, 이중환처럼 살 곳을 찾아 떠나려 하지는 않았다.


세 사람은 남인계 학계-정계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인물들이었다. 물론 정약용이 이익이나 이중환과 같은 시대를 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은 날줄이 되고 산영루와 청담은 씨줄이 되어 세 사람의 인연을 더 끈끈하게 만들어 놓았다. ‘다른 시간이지만 같은 공간’, 그것이 만들어내는 이런 인연은 낯설지만 신선한 느낌이다. 산영루에서 술상을 받은 다산의 느낌은 어떤 것이었을까.



글쓴이 / 배우성

·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저서 :『조선후기 국토관과천하관의 변화』, 일지사, 1998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공저), 효형출판, 1999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공저), 돌베개, 1999

         『조선중기의 정치와 정책』(공저), 아카넷, 2003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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