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동구릉 .......영조의 릉(원릉)

문근영 2010. 9. 3. 08:21

 

 

 

 

 

 

 

                 영조대왕 원릉(元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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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어진(御眞) 보물932호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57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시대 임금인 영조(英祖)(재위 1724∼1776)의 초상화이다. 숙종의 4남으로 자는 광숙(光叔), 호를 양성헌(養性軒)

이라 하였다. 영조(英祖)는 심각한 당파싸움에 대하여 탕평책을 실시하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사회를 안정시켰

으며 스스로 학문을 즐겨 문예 부흥기를 이루었다. 이 그림은 51세 때 모습을 그린 것으로, 가로 68㎝, 세로 110㎝

크기의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인데, 머리에는 임금이 쓰는 익선관을 쓰고, 양어깨와

가슴에는 용을 수놓은 붉은색의 곤룡포를 입고 있다.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돌고 있고 두 눈은 치켜 올라갔으며 높은 콧등과 코 가장자리, 입의 양끝은 조각처럼 직선적

으로 표현되었다. 가슴에 있는 각대 역시 위로 올라가 있고, 옷의 외곽선을 따로 긋지 않는 등 조선 후기의 초상화 양식

이 보인다. 이 초상화는 영조 20년(1744)에 장경주(張景周), 김두량(金斗樑)이 그린 그림을 1900년에 당대 일류급 초상

화가들이 원본을 보고 그린 것이다. 비록 원본은 한국전쟁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원본을 충실하게 그린 것으로 현존하는

 왕의 영정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50세때 초상화를 1900년에 채용신(蔡龍臣)(1850∼1941)과 조석진(趙錫晉)(1853∼1920)이 함께 이모(移模)한 초상화<영조대왕어진(英祖大王御眞)>만 남아 있으며 창덕궁(昌德宮)에 소장되어

있다. 

 

  

                        

 

 

 

 

 

 

 

 

         영조대왕은 조선 26명의 왕중 가장 장수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요즘 MBC 연속극 "동이"의 인기로 영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영조는 재위 기간 내내 어머니가 천출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마음 고생을 한 것으로 알고 있

    지만 탕평책을 써서 당파간 갈등을 조정한 정치에 귀재이기도 하다. 영조는 당초 시호가 영종(英宗)이었으나 고종

    때 영조(英祖)로 바뀌었다. 아래는 제가 비오는 날 우산을 쓰고 다니며 촬영한 영조와 그의 정비 정순왕후가 영면

    해 있는 원릉(元陵)입니다. 연속극 동이를 상기하시면서 천천히 감상하소서. 배경음악 있어요.

 

 

                                                                                                                      여강 최재효  拜

 

 

 

 

 

 

 

 

 

 

 

 

     영조대왕의 시호는 원래 영조(英祖)가 아니라  영종(英宗)이었는데 고종 27년 1890년 영조로

  변경되었다. 위; 사진은 당초 비문

 

 

 

 

 

 

 

 

 

 

 

 

 

 

 

 

 

 

 

 

 

 

 

 

 

 

 

 

 

 

 

 

 

 

 

 

 

 

  야화(野花)는 천지에 피어 있고 풀벌레는 여름을 보내며 짧은 생을 탓하는 듯~~~~

 

 

 

 

 

 

 

 

 

 

 

 

 

 

          영조

 

 

     영조(英祖, 1694년 ~ 1776년)는 조선의 제21대 임금(재위, 1724년~1776년)이다. 는 금(昑), 는 광숙(光叔),

   양성헌(養性軒), 사후 시호는 영종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

  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宗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

   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이며 이후 묘호가 영종에서 영조로 바뀌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영조지행순

  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

  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祖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

  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이다.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장순왕(莊順王)이다.

  숙종(肅宗)의 차남이자 서장자이며, 경종의 배다른 아우이다. 화경숙빈 최씨(和敬淑嬪 崔氏)의 소생으로, 왕비는 서종제

  (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와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조선 21대 임금으로서 1724~1776년까지 재위.

 

영조는 인재를 공정히 등용하는 탕평책으로 당쟁 조정에 힘썼고, 세재를 개혁하여 균역법을 시행하였다. 또한 신문고

제도를 부활하여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없게 하였다. 한편 사회변화에 대응한 실학의 진작 및 문화창달에도 노력하였다.

영조는 역대 임금 중 가장 오래 재위했으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뒤 죽인 불행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이유는?

 

영조는 즉위할 때 노론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 노론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그는 언제나 자유롭게 정치를

하고 싶었고 아들 사도세자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영조의 뜻을 잘못 해석해 노론을 멀리하며 남인,

소론가와 가까이 지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노론이 사도세자를 모함했다. 영조도 모함인 것을 알지만 노론의 세력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어서 뒤주 속에 가둔다. 이 때, 영조는 사도세자의 장인어른이 노론쪽의 유명인사라서 사위를

생각해서라도 사도세자 장인어른이 먼저 양보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사도세자 장인어른은 잠적해버렸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 갇혀서 죽게 된다.

 

 

 

 

 

  좌측이  영조임금 묘,    우측이  정순왕후 묘

 

 

 

 

 

  영조

 

 

재위 5년 ........ 치적도  사연도 많은 조선 최장수 왕 

영조 1694 ~ 1776 (83세)     재위 1724 .8 (31세) ~ 1776. 3 (83세) 51년 7개월

 

 영조는 조선 역대 왕 중 최장수 했고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다. 세계사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83세 1819 ~ 1901) 유럽 최장수 왕조 합스부르크가의 마지막 황제 프란츠 요제프(87세   1830 ~1916)

일본의 쇼와 텐노 히로히토(89세 1901 ~1989) 이들은 셋다 80세 이상 살고 60년 이상 재위한 군주의 트리오다

재위기간은 프란츠 요재프 68년, 빅토리아 64년, 히로히토 63년이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98세 까지 살았고

재위기간은 79년이다. 영조는 건강하게 오래 살았다.

 

66세에 15세인 정순왕후를 맞아들일 정도로 정력가였다. 장수와 노익장의 비결은 검소함과 금욕생활이었다

제사때 술대신 식혜를 쓰게 하는 등 음주를 멀리했다  그의 치밀을 본 사관은 이렇게 적었다. [임금이 목면으로 된

잠옷을 입고 명주로 만든 요 하나. 이불하나가 전부다. 병풍도 없다. 몸을 편하게 하는 도구는 민간의 부잣집

침실만도 못하다.]

 

영조는 재위기간이 긴 만큼 치적과 사연이 많다. 군왕의 지혜에 의해 정책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사회적 분위기가

정책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영조대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첨예했다. 당파라고 비난 일색으로 규정하는 것은

식민사관의 결과물이다.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정당이다. 정책 정당이 아니라 이념과 이익을 중심으로 뭉친 정치

집단이다. 현대에도 명확하게 정책 정당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정당이 있나?  노론 세력과 성향이 같은 영조와 소론

측에 동조한 세자와의 갈등으로 결국 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갔다.  28살 팔팔한 청년을 뒤주 속에 처넣어 질식 시킨

전대미문 사건의 총감독이 영조다.

 

영조를 평생 괴롭힌 업장은 2가지다  어머니인 숙빈 최씨가 천한 신분이란 것과 선왕이자 이복형인 경종 독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이다. 영조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간절한 노력을 기울였다. 숙빈 최씨의 아버지, 증조부,

고조부에게 벼슬을 추증했다. 외가 자체를 양반으로 승격시켜 어머니의 출신 성분을 격상시키려했다. 재위 29년

(1752)에는 어머니에게 화경(和敬)이란 시호를 추서했다.  서얼에 대한 규제완화도 영조의 출신 성분과 유관하다.

서얼에 대한 차별규정은 태종대에 만들어진 [서얼금고법]으로 부터 시작된다. 양반 소생일지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이 골자다. 광해군때 [홍길동전이 나오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양반의 출신 첩의 소생

을 서자(庶子), 천비출신의 소생을 얼자(孼子)이 둘을 합쳐 서얼이라 한다. 당시 양반들은 주로 자신의 집에 거느

리는 인물이 반반한 계집종을 첩으로 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서자보다 얼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것이 서얼을 더욱 멸시하는 이유였다

 

선조대에는 서얼 1600명이 서얼차별을 없애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선조는 서출 출신으로 왕이 된 첫번째 임금

이다. 영조 즉위 원년인 1724년에는 서열 5천명이 집단 상소했다. 영조의 출신 성분을 십분 활용하겠다는 사회적

환경 때문이다. 아울러 서열 인구가 전 백성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영조는 이들이 주장하는 [서얼 통청]

을 무시할 수 없었다. 사회적 환경과 자신의 콤플렉스의 합의점을 찾고자 했다  차별을 철폐하면 사회 기강이 문란

해진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했다. 1772년 영조는 서얼고 관직에 나갈수 있다는 통청을 허락하는 교서를 내렸다

서얼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수 있고 형을 형이라 부를수 있도록 했다 이를 어긴 자는 처벌을 받게 했다. 물론

왕의 교서로 오랜 관습이 하루 아침에 획일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선초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던 서얼

차대 철폐를 공식적으로 수용한것이 영조다. 허균의 [홍길동전]도 시대적 배경을 세종시대로 설정하고 있다.

 그때부터 홍길동과 같은 의식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는 암시다

 

영조 자신이 정비 출신 소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또한 정비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했다. 2명의 정비는 아예

자녀를 생산하지 못했고 4명의 후궁에게서 2남7녀를 얻었지만 두아들의 운명은 불행했다. 정빈 이씨 소생의

맏아들 효장세자는 10세에 죽었다. 영빈 이씨의 소생의 둘째아들이 영조가 40세 넘어 얻은 금지옥엽 바로 사도

세자다. 왕실의 자식은 그냥 자식이 아니라 공들인 작품이다. 무지렁이 백성들은 밭을 매다가도 덜컥 , 해우소

에서 나오다가도 쑥쑥 아들을 낳지만 왕실의 아들은 공들여 만든 유리 작품이다  화려하나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

이다.

 

중전이나 후궁이 간신히 회임을 하면 조정대신들이 거짓 웃음을 철철 흘리며 경하드리옵니다하고 법석을 떤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작품은 곧 잘 동백꽃 망울처럼 어린 나이에 죽어버리거나  혹여 청년으로 성장하면 권력 암투

의 주요임무를 맡아야한다. 정상적으로 여법하게 축복속에 왕위를 승계한 경우는 없다. 사도세자를 사도세자로

만드는데 한 몫을 톡톡히 한 여인이 지금 영조 곁에 묻혀있다.

 

영조는 정비 정성왕후가 66세로 승하하자 중전자리를 잠시 비워두었다가 15세의 정순왕후와 가례를 올렸다

이때 영조의 나이 66세 였다. 정순왕후는 어두운 그림자를 몰고 왕실에 입성했다. 자식을 낳지 못한 정순왕후는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낙으로 삼았다. 친정아버지 김한구와 더불어 영빈 소생인 세자를 모함하는데 앞장섰다

영조는 그녀의 책동에 분개하기도 하고 눈감아 주기도 했다. 어린 신부의 책동에 늙은 신랑은 애증이 갈팡질팡

했다. 결국 그녀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물고를 텄다. 나아가 미래의 위험인 세손(정조)의 등극을 막으

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싸움이 엎치락 뒤치락하는 와중에 영조의 천수가 마감되었다. 늙은 영조는 세손에게 그녀의 목숨만은 보전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83세로 승하했다. 정조는 할아버지의 유혼을 지켰다. 자신보다 겨우 7살 연상인 할머니를

지켜 주었다. 구원(耉怨)을 따지지 않은 덕분에 그녀는 손자 정조보다 오래 살았다. 증손자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수렴청정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정순왕후

 

 

경주김씨(慶州金氏)로, 아버지는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한구(漢耉)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
가 죽은 뒤, 1759년(영조 35)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1772년 예순(睿順)·명선(明宣) 등의 존호를 받았다. 소생은 없었고,
정빈 이씨(李氏)의 소생인 사도세자와 사이가 나빴다. 나경언(羅景彦)이 아버지 한구의 사주를 받아 세자의 비행을 상소
하자,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폐위시키고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했다(→ 사도세자사건). 그후로도 사도세자를 동정
하는 시파(時派)를 미워하고, 그 반대파인 벽파(僻派)를 옹호했다. 정조가 죽고 나이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공서파(攻西派)와 결탁하여 천주교 금압령을 내려 신서파(信西派)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능은 원릉(元陵)이며
시호는 정순이다.

 

 

 

 

 

 

 

 

 

 탕평책의 계승

18세기 탕평정치는 잘 알다시피 18세기 영, 정조시대에 강력하게 추진된 정치개혁 방략을 이야기한다. 요즘 용어로

표현한다면, 잘못된 길로 가던 역사를 올바른 길로 가돌고 하겠다는 ‘역사 바로세우기’ 인 셈이다. 하지만 붕당 사이의

 끝없는 쟁투 , 곧 당쟁은 대체로 3단계를 밟아 진행되었다고 파악했다. 처음에는 정치원칙에 대한 당파간의 의견 차이

의 싸움으로 시작되는데, 다음 단계에서 문벌과 지역 간 이해관계의 싸움으로 번졌고, 마침내는 원수간의 생사를 건

싸움으로 변질되었단 것이다. 탕평책의 목표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얽히고 섥 힌 사회현상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해결의 순서는 대체로 그 역순을 밟았다.


우선 원수간의 싸움판인 살육전을 중지시키기 위해 시비논쟁 자체를 금지했다. 그래서 송시열과 윤증의 시비, 사대

부의 여론과 공론에 대한 시비 등 시비논쟁을 모두 금지시켰다. 다음에는 문벌, 지역 간의 이해관계를 재조정했다.

그래서 ‘우열 조제론’, 이른바 인사탕평책을 내세워 관직 배분에 균형을 기하였다. 마지막으로 정치원칙, 곧 의리의

대립 상태를 한 단계 높을 차원에서 절충, 재창조할 수 있는 실력을 양성하려 했다. 첫째와 둘째 단계는 영조에 의해서,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정조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탕평정책의 구체적인 목표는 크게 네가지 였다.

 

첫째, 시비논쟁의 종식을 위해서였다. 이는 원수간의 싸움판인 살육전을 그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둘째로, 문벌과 지역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서였다. 즉, 관직을 배분하는

데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문벌과 지역 간의 이해관계를 재조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때문에 영조와

정조는 인사탕평책 방식을 통치스타일에 따라 각각 새롭게 고안하고 전 재위 기간에 걸쳐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셋째, 정치 원칙의 재창조를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실력주의 원칙이 통하는 학문정치가 표방되었다. 이 목표는 영조

년간에는 중요하게 추진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년간에는 준론을 조제하는 탕평, 규장각 설치와 관료 재교육, 본질

주의적 통치론 등을 토대로 적극 추진되었다. 그러나 학문정치 추진이 과거제를 본질적으로 개혁하는 데까지 이르

지는 못했다.


넷째, 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이 목표는 중앙정부의 지방 지배력, 국왕의 백성통치력(연결성), 군대통수권

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적극 추진되었다. 또한 생산을 담당하는 일반 백성의 저항과 같은 사회적 변화를 국왕이 직접

파악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나갔다.


이런 탕평책을 통해서 세계화에 대한 지향을 배울 수 있었다. 그 당시 탕평책으로 인해 집권층의 비주류세력인 소론

계와 남인계, 그리고 사대부에게 차별대우를 받던 기술직 중인과 서얼계층의 일부가 세계화론을 주도했다. 이들은

기자문화를 중국문화가 아닌 우리의 독자적인 옛 유교문화로 판단하고,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주자성리

학에 입각한 조선중화주의만으로는 진정한 자기주체성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조 또한 서학과 북학의 필요

성과 우수성을 인정하는 한편, 조선 고유의 문화와 기술을 아끼고 발전시키려 노력하였다. 이를 통해 21세기에 사는

나로서는, 세계화는 주체성의 확립과 함께 가야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원릉은 다른 능에 비해 상당히 품격이 있고 잘 정돈되어 있어 마치 영조임금의 심성을 보는 듯.............

 

 

 

 

 

 

 

  원릉  저 멀리 후손들이 사는 집들이 보이고..........

 

 

 

 

 

 

   조선을 가장 오래 통치했던 권력자의 릉 답지 않게 찾는 이가 없었다. 이것도 권력 무상인지........

 

 

 

 

 

 

 

 

 

 

 

 

 

  영조 어머니  숙빈 최씨 가계도

 

 

 

 

 

 

 공노비 출신의 후궁인 동이 최 숙빈(한효주 분)을 다룬 MBC 드라마 < 동이 > 가 후반부를 향해 달리고 있다. 이 드라마

에서, 동이의 라이벌인 장 희빈(이소연 분)은 동이의 가족관계를 추적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 장악원 노비가 되기 이전

에 동이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디서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없다는 사실을 장 희빈은 포착했다. 장 희빈이 동이를

후궁으로 추천한 것은 그 때문이다. 후궁으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신원이 낱낱이 파헤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비들의 반체제 비밀결사인 '검계'의 수장으로서 목숨을 잃은 최 효원(천호진 분)을 아버지로 둔 동이는 이 같은 장 희

빈의 움직임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런 사실이 죄다 밝혀질 경우 동이의 앞날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물론 이상은 드라마 속의 내용에 불과하다. < 동이 > 의 실제 주인공인 최 숙빈의 조상들이 반체제 운동

했다는 것은 드라마가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최 숙빈의 조상은 실제 반체제 운동을 했을까

그럼, 최 숙빈의 조상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이 반체제운동을 했는지 여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여기

서는 사회적 지위라는 측면에 국한해 최 숙빈의 조상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문헌이나 비문을 통해 확인된 이들의

지위를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표를 보다 보면, 순간적으로 최숙빈의 조상들이 정2품에서 정1품의 높은 지위를 가졌던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관직은 최 숙빈의 아들인 영조가 보좌에 오른 이후에 추증된 것들에 불과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운영하는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http://people.aks.ac.kr )의 조선시대 과거합격자 명단에서도 이들을 찾을 수 없다. 표에 나오는 추증 관직은 그들의 생전 지위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런데 표에서 딱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추증된 것이 아닌 실제 지위를 나타내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할아버지 최태일이 '벼슬을 하지 못한 채 죽은 선비'라는 의미의 '학생'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내용은 최 숙빈의 신도비인 '숙빈 최씨 신도비'에 기록되어 있다. 신도비는 신을 무덤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비석이고, '숙빈 최씨 신도비'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소재한 소령원(昭寧園, 사적 제358호)에 있다. 소령원은 사전에 승인을 얻은 사람만 입장할 수 있으므로, 혹시라도 '무턱대고' 소령원을 방문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으므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최 숙빈은 천출인데, 할아버지가 선비?

 

최 숙빈의 할아버지가 선비였다는 사실에 접하는 순간, 우리는 이 집안이 원래 양반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우리의 인식 속에서 선비와 양반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비란 것은 '글공부라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고, 양반이란 '일반인과 구별되는 상위 신분을 보유한 사람'이었다. 이 둘은 서로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양반문제 연구자인 송준호의 논문 '조선시대의 과거와 양반 및 양인'에 설명되었듯이 양반이 아닌 평민도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과거시험을 목표로 글공부를 하는 선비가 반드시 양반일 필요는 없었다. 사실, 양반이란 것은 법률상의 신분이 아니었다. 그것은 '재벌' 혹은 '사회지도층' 등이 대한민국 법률상의 신분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사의 권위자 중 하나인 미야지마 히로시가 쓴 < 양반 > 에 설명된 바와 같이, 양반이란 것은 지역별로 존재한 상류층 클럽의 회원명부 즉 향안(鄕案)에 등록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예컨대, 양반의 고장이라 알려진 경상도 안동에는 지역 유력자들이 참여한 진솔회(眞率會)라는 고급 사교클럽이 있었다. 이 모임의 회원 명부에 기재된 사람들이 소위 양반이었던 것이다. 전국적으로 통일된 양반의 자격 기준이 있었던 게 아니다. 각 지역의 상류층 모임에 가입한 사람들이 양반이라고 통칭됐던 것이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양반이란 신분을 인정한 게 아니기 때문에, 양반에게만 과거응시를 허용한다는 법률이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양반이건 아니건 간에, 경제적·시간적 여유만 있으면 평민도 글공부를 하고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과거에 합격하고 고위직에 오른 사람도 양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일들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 양반 > 에 소개된 송순(1493~1583년)이다. 조선 중기의 유명한 문신인 송순은 전라도 담양 출신의 선비로서, 중종 14년(1519)에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명종 2년(1547)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개성유수·이조참판·대사헌·우참찬 등을 역임했다.


위와 같은 관직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송순은 선비인 동시에 고위관료였다. 이런 인물이 역사 드라마에 나온다면, 시청자들은 필시 그를 양반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선비로서 과거에 합격하고 외국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개성유수와 이조참판이 된 후에도, 송순은 양반 대우를 받지 못했다. 고향인 담양의 양반 클럽에서 그를 회원으로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담양 양반들이 송순을 거부한 것은, 그의 외가가 남원에서 담양으로 이주해왔다는 점과 그의 집안에 유명한 관료가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완전한 담양 출신이 아닌 데다가 조상들이 '시시'하기 때문에 담양 양반으로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송순이 대사헌이 된 이후에 상황이 달라졌다. 감사원장 혹은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막강한 위상을 갖고 고향을 방문한 송순은 지역 원로들을 위한 연회를 마련했다. 이때 그는 담양 양반들에게 후한 대접을 베풀었다. 이를 계기로 담양 양반들은 회원명부에 송순의 이름을 기입해 주었다. 밥 한 끼 푸짐하게 얻어먹고 나서 송순을 담양 양반으로 인정해준 것이다. 만약 이런 일이 없었다면, 송순은 결코 양반 대우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선비와 양반이 반드시 일치하진 않았던 시절

 

이 같은 송순의 사례는 고위층과 양반의 개념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선비와 양반의 개념 역시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또 이것은 최 숙빈의 할아버지인 최태일이 선비였다고 해서 당시의 이 집안이 반드시 양반가였다고는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양반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최태일이 글공부를 했다는 사실은 그의 아버지인 최말정에게 경제적 여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물론 최태일이 집안 사정에도 아랑곳없이 글공부를 했을 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경험법칙을 볼 때에 그가 공부를 했다는 것은 그의 부모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점은 적어도 최태일 때까지만 해도 이 집안이 천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천민에게 '학생'이란 칭호가 부여되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최소한 할아버지 때까지는 최 숙빈의 집안이 적어도 평범한 평민 가문 이상은 되었음을 의미한다. 최태일의 손녀인 최 숙빈이 공노비가 된 것은 나중에 발생한 어떤 사유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효원 때에 와서 이 집안이 공노비로 전락했기 때문에 최 숙빈이 공노비가 되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최 숙빈이 나이 5세에 고아된 이후에 발생한 어떤 사정으로 인해 최 숙빈이 공노비가 되었을 수도 있다. 드라마 < 동이 > 에서는 최 숙빈의 아버지가 반체제 지도자였다고 설정했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실제로 이 집안은 할아버지 때에 잠시 글공부를 하는 사람이 있었을 뿐 별로 특기할 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가문이었다. 이런 혈통에서 숙종의 후궁이 나오고 영조라는 걸출한 임금이 나왔으니, '개천에서 용 난다' 혹은 '개똥밭에 인물 난다'는 속담처럼 이 경우에 적합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 참고 : http://blog.daum.net/kmb2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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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엔돌핀이 있는마을
글쓴이 : 여강 최재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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