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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은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의 그늘 아래 있는 세밀화가들의 삶과 예술, 음모와 사랑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소설에는 서구 유럽이라는 타자와의 만남에 대한 오스만제국의 호기심과 두려움이 원근법이라는 회화기법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선험적으로 주어진 관념의 세계를 그리던 세밀화가들에게 ‘눈에 보이는 대로’ 풍경을 그리는 이탈리아의 새로운 화풍은 아주 낯설고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당혹스러울 뿐만 아니라 신성모독이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눈에 보이는 대로’(원근법에 따라) 그리다 보면 신전보다 개를 더 크게 그리거나 왕보다 노예를 중앙에 배치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먼저 보아야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일본의 평론가는 이것을 산수화와 비교해서 설명한 적이 있는데, 원근법이 무시된 채 그려지는 산수화의 화가는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인 개념’, 즉 ‘형이상학적 모델’을 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말을 바꾸면, 선험적인 개념이나 형이상학적 모델에 근거하여 그림을 그리는 한 결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이다.
개는 이렇게 생겼다, 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관념, 혹은 형이상학이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몽실이’나 ‘똘똘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개에게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왜곡시키기도 한다. 개를 식용으로 내다 팔기 위해 기르는 사람과 집을 지키려고 기르는 사람과 외로움을 달래려고 기르는 사람 사이에는 개에 대한 인식이 너무 멀게 자리하고 있다. 세상에 똑같은 개는 한 마리도 없다. 중요한 것은 어디서 어디에 있는 무엇을 보느냐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원근법의 산물이라고 말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이 큰가?’ 하는 질문에 대한 원근법적 대답은 ‘가까이에 있는 것이 크다’이다. 아무리 높은 산도 멀리 있으면 가까운 곳에 있는 낮은 언덕에 의해 가려진다. 사진을 찍을 때 얼굴을 작게 나오게 하려고 뒤에 서는 것은 우리가 그 이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전은 신이 거하는 집이므로 언제나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크게, 중심에 그려져야 한다는 생각, 술탄은 위대하므로 이 세상 어떤 인간보다 돋보이게, 중앙에 위치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근대적이고 비민주적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이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을 우대하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굽실거리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더 중요하고 더 위대한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것들, 그렇다고 인정되어 온 것들로 인해 다른 것들이 무시되거나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나아가 더 중요하고 더 위대한 것을 가르는 기준으로 원근법적 사고가 활용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이나 허구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인간을 위한 법과 정책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요컨대 보이는 대로 먼저 보아야 한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 지금 하는 일이 중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성경에 나온다. 성전의 신성함, 술탄의 위대함, 이념의 가치 같은 것을 원근법적으로 읽을 때 어떤 뜻이 되는지를 환기시키는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더 직접적으로 이 점을 가르쳐주는 성경 구절이 있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여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일이 곧 왕과 신에게 한 일이 된다. 반대로 여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일이 곧 왕과 신에게 하지 않은 일이 된다. 왜냐하면 여기 지극히 작은 자가 왕과 신보다 가깝게 있기 때문이다. 아니, 여기 지극히 작은 자가 곧 왕이고 신이기 때문이다. 소개한 이야기는 예수님이 사용하신 우화인데, 자기가 어려움을 처했을 때 도와주지 않았다고 책망하는 왕에게 억울해 하며 이렇게 항의하는 무리가 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왕의 대답은 이러했다. “여기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
현재가 중요하고,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가장 크고, 지금 하는 일이 가장 가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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