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스크랩] 정약용이 제시한 섬김의 길 / 임부연

문근영 2010. 8. 6. 08:57

제40호 (2007.4.11)


정약용이 제시한 섬김의 길



임 부 연(서울대 종교학과 강사)


유배지의 사상가 다산 정약용은 무엇보다 방대한 저술의 대가로 유명하다. 그의 수많은 저서는 지금의 분류 체계에 따르면 인문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거대한 학문의 세계를 담고 있다. 18년의 유배 기간을 보낸 정약용이 그토록 수많은 저서를 지은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비록 당대에 정치적으로 몰락하게 되었지만 학자로서 정약용은 자신의 책을 통해 미래의 독자인 우리와 대화한다. 다산은 팔이 마비되고 복사뼈에 구멍이 날 정도로 밤낮없이 매진하는 무서운 집념으로 저술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처럼 불굴의 의지로 구축된 그의 학문체계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근원적인 관심을 보려면 우선 그가 삶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이해해야 한다.  


교제(交際)에서 선(善)을 행하라


정약용에게 삶은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의 연속이자 총체다. 그는 단언한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처음부터 죽어서 관을 덮는 날까지 그가 함께 지내는 존재는 사람일 뿐”이라고. 우리는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누군가의 친구나 연인 또는 배우자로 살다가 죽는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사람과의 만남으로 삶이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정약용은 ‘나도 한 사람, 그이도 한 사람’(我一人, 彼一人)이라는 원초적인 사태에 기초해서 삶을 바라본다. 이때 나와 마주하는 사람은 관념적으로 설정된 사람 일반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만나는 남이다. 사회적인 위상에 따라 규정되는 구체적인 나와 남 ‘사이’에서 무수한 교제(交際)가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산이 생각한 교제는 내면의 영역으로 환원되지 않고 나와 남을 이어주는 실천의 결단 위에 정초된다. 


유교 지식인의 자의식이 강한 정약용은 “우리 유교의 도(道)는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단지 교제에서 (善)을 하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에게 유교의 진리는 나와 남 사이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교제가 요구하는 선을 실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자식이라면 나의 부모에게 효도하고 내가 부모라면 나의 자식에게 자애롭게 대하는 것이다. 자신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 정약용은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에 대한 해석은 자기 수양을, 일표(一表: 『經世遺表』)와 이서(二書: 『牧民心書』, 『欽欽新書』)는 국가의 경영을 위한 것이라고 정리한 적이 있다. 여기서 자기를 수양하는 일도 국가를 경영하는 일도 결국은 각각의 고유한 교제에 맞게 선을 행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나와 남의 일대일 관계에 맞게 자신의 본분을 실천하는 덕목의 총체가 바로 (仁)이다. 은 우주적인 본질이나 생명력이라고 보는 성리학과 달리 정약용은 실천적 관계의 관점에서 을 정의한다.


사람을 섬기는 길이 바로 하늘을 섬기는 길


정약용이 바라보는 삶의 윤리적 현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고발한다. “평생토록 사기를 쳐도 당대의 좋은 명성을 잃지 않고 멋대로 악을 저질러도 후세의 숭앙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하다”고. 다른 사람의 눈이나 사회의 법률은 우리의 마음을 다 들여다 볼 수 없다. 내면의 진실에 기초하여 윤리적 실천을 추구한 정약용은 위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감 [戒愼]과 두려움[恐懼]의 수양 자세를 제시한다. 삼감과 두려움은 자신만이 아는 내면의 공간에서 삼가는 신독(愼獨)의 군자가 행하는 수양이다. 이러한 수양들은 모두 인격의 하늘 [上帝] 아래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다는 실존적 각성에 기초한다. 정약용은 우리의 내면을 남김없이 들여다보는 인격의 하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여 극도의 자기 성찰적인 수양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내면의 진실과 자기 성찰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결국 의 실천으로 귀결되는데, 정약용은 여기서 (恕)의 방식을 제안한다. 그의 는 남에게 바라는 점을 자신이 먼저 남에게 베푸는 자기 초월적인 실천이다. 다시 말해 나와 남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억누르고 남을 배려하는 자세가 바로 이다. 정약용은 “하늘을 섬기는 학문은 인륜(人倫)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산의 하늘은 인륜의 영역을 초월한 신앙의 세계를 따로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교제에서 을 실천하는 보편적인 방식인 는 진실하게 사람을 섬기는 길이면서 동시에 하늘을 섬기는 길이다. 그렇다면 정약용의 거대한 학문세계를 관통하는 근원적인 관심은 사람을 섬기는 길과 하늘을 섬기는 길이 하나로 통합되는데 있는 것은 아닐까?

 


글쓴이/ 임부연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강사

·공저 :『스승 이통과의 만남과 대화 : 연평답문』, 이학사, 2006

·저서 :『중국철학 이야기3:근·현대-유학의 변혁, 서양과의 만남』,책세상,2006

        『정약용 & 최한기 : 실학에 길을 묻다』, 김영사, 2007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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