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유홍준의 국보순례] [14] 조선 왕릉(朝鮮 王陵)

문근영 2010. 7. 2. 10:45

[유홍준의 국보순례] [14] 조선 왕릉(朝鮮 王陵)[

명지대 교수·미술사

입력 : 2009.07.01 23:16 / 수정 : 2009.07.06 10:54

 

조선 왕릉(王陵) 40기가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또 하나의 세계문화유산을 갖게 되었으니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세계가 알아주는 이 조선 왕릉의 문화적, 건축적 가치에 대해 우리들이 과연 얼마만큼 인식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도 일어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삶의 공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못지않게 죽음의 공간에 대해서도 고민해 왔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내린 결론은 자연 속에 묻히는 것이었고, 그것이 국가적 의전(儀典)으로 발전한 것이 왕릉이다. 따라서 모든 왕릉이 갖고 있는 홍살문[紅箭門], 정자각(丁字閣), 능침(陵寢)에 이르는 공간 구성과 문신석과 무신석,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의 조각들에는 조선시대 전체를 꿰뚫는 정신, 즉 자연에의 순응, 도덕적 가치로서 경(敬), 윤리로서 충(忠)과 효(孝), 그리고 미적(美的) 덕목으로서 검소(儉素) 등이 들어 있다.

그리고 똑같은 공간구성이지만 각 능에는 그 시대의 문화적 분위기와 역량이 드러나 있다. 이는 백자항아리가 국초부터 구한말까지 그 빛깔과 형태를 달리한 것과 같다. 15세기 새로운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는 국초의 기상은 무엇보다도 동구릉(東九陵) 안에 있는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에 잘 나타나 있다. 고향 함흥 땅의 억새를 입혀 달라는 그의 유언이 지금껏 지켜지고 있는 이 건원릉의 늦가을 모습은 자못 처연하다.

조선적인 세련미가 구현되어 가는 16세기는 중종의 왕비인 문정(文定)왕후 태릉(泰陵)의 엄정한 능침 조각에서 볼 수 있다. 병자호란을 겪은 뒤 상처 받은 자존심을 되찾으려고 일어난 다소 허풍스러운 17세기 분위기는 효종 영릉(寧陵)의 무신석 어깨가 과장되게 표현된 모습에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조각이 아름다운 것은 18세기 사도세자(思悼世子)인 장조(莊祖)의 융릉(隆陵)을 따를 곳이 없다.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한 순종의 유릉(裕陵)은 대한제국 황제의 예에 맞춰 황제릉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지만 그 누구도 위엄이나 힘을 말하지 않는다. 조선왕릉은 이처럼 저마다의 표정을 갖고 있는 당당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출처 : 대구문학신문 - 시야 시야
글쓴이 : 문근영 원글보기
메모 :